얼마 전 산사(山寺)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일종의 템플스테이였다. 푸른 하늘 아래 걸린 매화·목련·벚꽃·진달래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 새벽 5시 30분에 시작하는
아침 공양(식사)마저도 달콤할 지경이었다. 평소 귀농(歸農)을 꿈꾸던 동행은 새삼 의지를
다졌다. "내가 꿈꾸던 자연의 삶이 여기 있군!"
마루야마 겐지(61)라는 일본 작가가 있다. 약관(弱冠)을 겨우 지난 23세에 일본 신인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비범한 재능이다. 그는 상을 받자마자 도쿄에서 나가노현 시골로 들어갔다. 외부적 요인에 유혹받지 않고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글만 쓰겠다는 결의였다. 중앙
문단에서 쌓은 인맥이 작가의 미래에 결정적이던 당시 일본 문학계 분위기를 정면으로 거스른 선택이었다.
작가의 40년 시골 생활을 요약한 산문집에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 있다. 낭만적 귀농·귀촌(歸村)을 꿈꾸는 당신에게 가혹할지 모르지만 체험에 기반한 그의 충고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풍경이 아름답다는 건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귀농자는 더 이상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자가 아니라는 것, 자연은 놀이터가
아니라 생활의 장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미어터지지만 도시에서 나는 '섬'일
뿐이라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감이지만 고독은 시골에도 따라온다. 먼저 귀농했던 50대 선배가 있다.
그는 돌잔치와 결혼식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A의 결혼식에는 참석하고 B의 돌잔치 초대에는 바빠서 참석하지 못했더니 '동네 왕따'가 됐다는 것이다. 그는
"도시에서는 애매한 변명이 통하지만 여기서는 턱도 없다"면서 "모두 참석하든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아예 처음부터 모두와 관계를 맺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친해지지 말고 그냥 욕을 먹는 게 낫다는 것이다.
다시 겐지를 인용하자. 그는 그렇다고 도시에서 온 이주자들과만 어울리면 사달 난다고 했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원시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지방의 토착 문화와 예술을 알리고
싶어서, 사랑의 상처를 입어서…, 묻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들은 뚜렷한 직업도 없이
말만으로 세상살이를 하려는, 그런 주제에 대의명분만은 찾고자 하는 교활한 철면피이니까.
지난해 귀농·귀촌 가구는 전년 대비 36.2% 증가한 4만2424가구, 5만6267명이었다. 사상 최대였다. 너도나도 귀촌이니
'나도 한번?'의 유혹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묻지 마 귀농'은 백전백패를 부를 뿐이다.
'100세 시대, 인생 2막'이라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떠난다고? 떠났다고? 어딜 가든 삶은 따라온다. 도시의 각박한 삶은 템플스테이의 하룻밤을 동경하지만 다짐과 각오 없는 귀농과 귀촌은 결국 유턴을
부른다. 인생을 현실 도피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 여행의
낭만에 취했던 친구는 겐지부터 읽어보겠다고 했다.
-어수웅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1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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