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餘暇-City Life]

[쑥부쟁이와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

뚝섬 2025. 6. 1. 06:15

[쑥부쟁이와 '카사블랑카']

[카사블랑카]

 

 

 

쑥부쟁이와 '카사블랑카'

 

우리는 왜 돈이 안 되는 것만 잘 아는가

 

아내는 신기할 정도로 꽃과 나무 이름을 잘 아는 편이다. 어렸을 때 꽃집에서 자랐거나 나 모르게 수목원에서 직장 생활을 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보령으로 이사 와서 산책할 때도 길거리에 핀 꽃들의 이름을 줄줄 나열해 나를 놀라게 하더니 김용택 시인의 북토크가 열린 완주의 한옥 마을에서는 아원고택 주변에 있는 나무들의 이름을 죄다 알아맞혀 사람을 질리게 했다(같이 갔던 지인이 스마트폰으로 나무 이름을 검색해 보더니 아내 말이 맞다고 했다).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다 알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식물을 좋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반면에 나는 꽃 이름을 하나도 모른다. 아내가 매번 가르쳐 주는데도 매번 새롭다. 그런 나를 아내는 가끔 시험한다. “이 꽃 이름이 뭐야?” 그럴 때마다 나는 똑같이 대답한다. “쑥부쟁이.” 아내가 웃었다. 무슨 꽃을 가리키며 물어도 다 쑥부쟁이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내가 미쳐.” 완주에서 그 얘기를 들으며 웃던 지인과 나에게 아내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런데 사실 우리 남편은 쑥부쟁이가 뭔지도 몰라요. 당신, 쑥부쟁이 뭔지 모르지?” 나는 무슨 소리냐고, 나도 안다고 하며 눈에 띄는 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지만 아쉽게도 그건 냉이꽃으로 밝혀졌다. 그때부터 내 별명은 쑥부쟁이가 되었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쑥부쟁이. 꽃은 7~10월에 핀다. /편성준 제공

 

“당신이 영화배우 이름 잘 아는 것과 같은 거야.” 내가 꽃과 나무 이름을 잘 아는 아내를 신기해하면 아내가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니 금방 이해가 되었다. 나는 영화 제목이나 배우 이름을 많이 알고 또 그 배우들이 나온 영화 장면들을 잘 기억하는 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버트 히긴스가 히트시켰던 노래 ‘카사블랑카’를 길에서 흥얼거리다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에서 빌리 크리스털과 맥 라이언이 각각 다른 장소에 누워 영화 ‘카사블랑카’를 시청하며 이야기 나누는 장면을 얘기하는 식이다. 해리와 샐리는 아마 같은 케이블 채널에서 전송해 주는 영화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들이 나누던 대사 얘기를 하다가 “카사블랑카야말로 영화 사상 가장 대단하고도 이상한 영화”라는 얘기를 한다.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클래식 영화인데 놀랍게도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워너브러더스에서 급하게 만들어진 ‘프로파간다 명작’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절박함과 로맨스를 결합한 이 작품은 제작 당시부터 대단한 화제였고 시간이 흐른 지금도 ‘전설’이라 불릴 만큼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재밌는 건 잉그리드 버그먼도 촬영 당시에 영화의 결말을 몰랐다는 거야. 그러니까 마지막 비행장 장면에서 험프리 보가트와 남편 둘 중 누구와 함께 떠나는지 모르고 연기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주 인간적인 표정이 나왔던 거지.” 내가 이렇게 얘기하며 잉그리드 버그먼을 떠나보내고 험프리 보가트가 자신을 도와준 프랑스 관리에게 내뱉던 냉소적인 대사 “내 생각엔 이거야말로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인 것 같은데”에 대해서도 말한다. 물론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우디 앨런 영화의 원제 ‘Play It Again, Sam’도 영화 속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이 했던 명대사라는 걸 덧붙이길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먼 주연의 로맨틱 영화 '카사블랑카'의 한 장면. 마이클 커티즈 감독이 연출했다. /코르비스

 

그러면 이번엔 아내가 놀라서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지겹다, 정말”이라며 웃는다. 나는 “아마도 돈이 안 되는 거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라고 대답한다. 그렇다. 아내와 나는 돈이 안 되는 것만 열심히 하기로 유명하다. 꽃이나 나무 이름, 영화배우 이름에 열중하는 삶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핵심을 조금 비켜 나간 ‘바보스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보가 하나 떠오른다. 톨스토이가 쓴 ‘바보 이반’이라는 단편의 주인공 이반이다. 형제들은 다들 앞서가는데 이반은 뒤에 남아 땅을 고르고 씨를 뿌렸다. 어리석어 보였지만 자기 손으로 생명을 길러내며 결국 스스로를 지켰다. 카피라이터로서 또는 작가로서 나는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방향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대신 꾸준히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매일 글을 쓴다. 남들의 눈에는 좀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행복에 가까운 시간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 대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에 기꺼이 마음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꿈꾼 삶의 방식이었다. 결국 행복은, 바보처럼 보일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온다는 걸 이제는 안다. 아, 이제 쑥부쟁이도 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꽃이 되었으니까.

 

-편성준 작가, 조선일보(25-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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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

 

때는 1943년 초, 무대는 모로코 항구 도시 카사블랑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등과 연합국 승리를 위한 국제군사전략 회담을 엽니다. 얼마 후 루스벨트는 백악관(White House)에서 제목이 포르투갈어로 '하얀 집'인 영화를 관람합니다. 불후의 명작 '카사블랑카(Casablanca·사진)'입니다.

때는 1941년 말, 무대는 서방 자유 세계로 통하는 관문인 프랑스령 카사블랑카. 나치 독일의 침공을 피해 탈출한 유럽 피란민들과 도망자들은 미국행 비자와 통행증을 암거래하거나 훔칩니다. 베일에 싸인 미국인 릭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비밀리에 그들을 도와줍니다.

 

하루는 미모의 여인과 레지스탕스 빅터가 나타나 릭을 찾습니다. 그들 부부는 독일군의 1급 사찰(査察) 대상입니다. 릭은 충격받습니다. 프랑스가 침략당할 무렵 파리에서 릭을 남겨두고 홀연히 사라진 연인이 빅터의 아내 일자입니다. 그녀가 떠나야만 했던 사연은 가려둡니다. 릭이 고뇌합니다. 숨겨둔 통행증 두 장을 자신과 일자를 위해 쓸지, 그녀 부부에게 줄지의 선택을 놓고서. 

 

독일군 장교가 들이닥치기 직전 릭은 일자 부부를 돕기로 결심합니다. 생명줄과도 같은 통행증을 빅터에게 건네자 한때 릭이 레지스탕스를 도운 전력(前歷)을 아는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연합국 승리를 위한 싸움에 다시 가세하신 걸 환영합니다. 이번은 우리 편이 이겨요. 장담합니다(Welcome back to the fight. This time I know our side will win)."

한편 일자는 릭이 지금도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에 괴로워합니다. 마침내 일자가 리스본행 탈출 비행기에 오르려 할 때 릭이 이렇게 말합니다. "Here's looking at you, kid." 연인이었던 시절 그녀와 건배하며 했던 이 명대사의 뜻은 널리 회자(膾炙)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가 아닙니다. "당신 앞날에 행운이 있길 빌어요"입니다. 건배할 때도 아닐 때도 똑같이. 

 

-이미도 외화 번역가, 조선일보(1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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