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된 호남, 차별의 기억 넘어 대한민국 미래 비전을 보여줄 때]
[우리도 그래서 망했다]
권력이 된 호남, 차별의 기억 넘어 대한민국 미래 비전을 보여줄 때
달라진 호남의 위상
아직도 '약자' 말하나

이재명(가운데) 대통령과 이재용(오른쪽)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 보고회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호남에 800조원을 투자해 총 4기의 반도체 공장을 구축하기로 했다. /뉴스1
나에게 1980년 ‘전라도’는 광주가 아니다. 그것은 서도역이다. 지금은 없어진 손바닥만 한 역사(驛舍). 전라도에 대한 나의 기억은 거기서 시작된다.
내 부친은 10대 언저리에 서울로 올라와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가난한 집 둘째 아들로 태어나 돈이 없어 장가도 못 가던 그가 간신히 이룬 산동네 신접 살림에서 본 첫아이가 바로 나였다. 명절이면 우리는 아버지의 고향 전북 남원으로 향했다. 계란을 까먹다 까무룩 잠들면 뙤약볕에 지친 기차가 느릿느릿 달려 도착하는 곳. 그곳이 바로 서도역이었다.
역사를 나오면 마당이 있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할머니와 함께 고구마와 채소를 팔았었다고 했다. 거기서 왼쪽으로 돌면 작은 점방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술과 주전부리를 사곤 했다. 거기서부터 비포장도로를 걷다 보면 서도리 숲말(수촌·藪村)에 닿는다. 숲말까지 신작로는 없었다. 비포장도로는 비가 오면 진창 구렁이 되고, 눈이 오면 얼음 구덩이가 됐다.
1980년 가장 놀라웠던 것은 아궁이였다. 할머니는 나뭇가지를 때서 밥을 지어주셨다. 그 당시 우리는 못살긴 해도 연탄불이 있었다. 목욕이라도 하려면 연탄불에 물을 끓여 찬물에 섞어 써야 했지만, 그래도 나뭇가지를 때서 밥 짓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꺼멓게 타버린 방구들. 대여섯 명이 누우면 꽉 차는 그 방과 옆에 딸린 쪽방이 전부였는데, 여기서 조부모와 5남매, 아니 일찍 죽은 형제까지 합치면 한 9남매쯤 될 텐데,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후로도 매년 서도리에 내려갔지만 오랫동안 신작로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라면서 ‘호남 차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아궁이, 그 방구들, 그리고 진창으로 변한 비포장도로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서 “호남은 낙후된 곳”이라는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곤 했다.
굳이 전라도의 추억을 꺼낸 이유는 요즘 전라도가 화두인 것 같아서다. 고등학교 야구 시합에서 5·18과 전남광주를 모욕했다고, 10대 아이들을 상대로 경찰 수사를 하겠단다. 대통령은 호남에 ‘역사적 보상’을 하겠다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몇 년 내로 호남에 수백조원을 투자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그 아궁이, 그 구들장, 진창이 되던 비포장도로 시절에서 거의 반세기가 지났는데, 호남은 아직도 차별받고 있고, 더구나 낙후된 곳이란다. 과연 그런가? 2022년 기준 시도별 1인당 지역총생산을 보면, 전체 17개 단위 중 전라남도가 4위(5142만원)였다. 전북은 13위(3246만원), 광주는 16위(3090만원)였지만, 전북 밑에 부산과 제주가 있고, 광주 밑에 대구가 있다.
지난 30년간 대통령이 6명인데 그중 4명이 ‘호남의 아들’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호남 유권자들은 지난 40년간 고도의 전략적 투표 행태를 보여왔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호남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받았고,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지난 대선에서 8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호남인들은 이런 전략적 투표를 통해 결국 권력을 잡은 것이다.
이재명 정부 초기 장관 후보자 18명과 수석비서관급 인사 15명 중 12명이 호남 출신이다. 서울·경기·부산·경남을 합친 것과 같다. 청와대 장관급 3실장 중 둘(국가안보실장 위성락, 정책실장 김용범)이 전남광주 출신이고, 외교 안보 라인 내각(외교 조현, 통일 정동영, 국방 안규백)은 모두 전북이다. 인사를 보면 이재명 정부는 호남 정부이다.
이러니 젊은 사람들이 요즘 호남의 행태를 보면서 위화감이 들지 않겠나? 이미 호남은 ‘권력’이 된 지 오래인데, 아직도 차별받고, 모욕받고 있다면서 사과하라고 하고, ‘역사적 보상’을 내놓으라고 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호남에 투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가균형발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반론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부가 민간 기업 운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박정희·전두환 시절의 악습이다. 게다가 옛날에는 민간에 인적·물적 자원이 부족해서 정부가 계획경제라는 명분으로 민간에 개입하는 것이 필요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삼성이나 SK는 이미 세계적 기업인데, 뭐가 부족해서 정부가 대신 경영 판단을 해준단 말인가? 이런 국가주의적 행태야말로 호남인들이 과거 박정희·전두환 시절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던 독재의 잔재인데, 호남 출신이 주축이 된 정부가 그 구태를 답습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 특정 지역이 정치적 대전환의 계기를 제공한 예는 많다. 하지만 그러한 혁명적 전환의 정신은 전 국민, 나아가 전 인류의 것으로 승화돼야 한다. 프랑스 대혁명이 파리에서 시작됐다고 파리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왕정 타파와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이제 세계인의 유산이 됐다. 미국 독립혁명 역시 동부 백인 지주들이 주축이 됐지만 이제 그 유산은 모든 미국인은 물론 세계인의 것이다. 에도 막부를 상대로 승리한 사쓰마와 조슈의 사무라이들이 오로지 자기네 지역 이기주의만 추진했다면 일본의 근대화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 호남은 ‘약자 코스프레’를 그만해야 한다. 호남은 권력이다. 권력을 잡은 호남이 자꾸 자신이 느끼는 모욕감에만 집착한다면, 지역 차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차별과 반목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권력을 잡았으니 이제 호남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지 미래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호남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위하는 길. 그것만이 진실로 호남이 독재와 차별의 잔재를 극복하는 올바른 길이 될 것이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조선일보(26-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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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래서 망했다
오랜만에 자유한국당을 보고 웃었습니다. 이 당의 플래카드에 적혀 있던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우리도 그래서 망했다'라는 문구 때문입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의 국정원 댓글 수사하듯, 문재인 정권의 드루킹도 그렇게 수사하라는 취지였죠.
웃음이 터져 나온 이유는, 당연히 뒷 문장 때문입니다. 자유한국당의 자학 개그랄까요, 풍자랄까요. 주지하다시피 풍자는 약자의 언어입니다. 유머와 위트가 강자의 여유라면, 풍자와 해학은 비주류와 아웃사이더의 무기죠.
하지만 이 당이 언제 약자였던 적이 있었나요. 새누리당 한나라당 신한국당 민자당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들은 늘 강자이고 주류였죠.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야당 시절에도 아마 내심 약자나 비주류와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고 확신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리멸렬. 보수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보수의 적이라는 비판까지 있죠. 누군가는 우리'도'가 아니라 우리'는'으로 써야 맞는다고 비아냥댔지만, 조사를 뭐로 쓰건 이 간증(干證)은 어떤 특정 신경을 정밀하게 자극하더군요. 약자의 풍자는 폭소와 연민을 불러일으키죠. 지금의 자유한국당을 진심으로 약자이자 비주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래서 망했다'라는 고백은, 드루킹이 여권에 일본 오사카 총영사직을 청탁한 황당한 사건에 대한 공격입니다. 물론 더불어민주당과 청와대는 '열린 인사' '열린 추천시스템'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하지만, 당장 이런 반박이 나올 수밖에 없죠. 최순실이 추천하면 국정 농단이고, 드루킹이 추천하면 열린 추천인가.
집권 여당이 착각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라는 것. 그런데도 여전히 스스로를 야당으로 착각하거나 남 탓을 하고 약자 코스프레를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드루킹의 댓글 공작에 대해 "우리도 피해자였다"고 주장하거나, 사퇴한 김기식 금감원장에 대해서도 반성이 아니라 선관위 탓을 하며 위헌 소송을 검토하겠다고 하더군요. 한국당 전신인 새누리당이 정확히 지금 민주당처럼 하다가 망했죠. 다시 한번, 풍자는 약자의 무기입니다.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조선일보(18-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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