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후손’의 침묵]
['관제 민족주의'가 나라를 망친다]
‘고구려 후손’의 침묵
함경남도 출신인 기자는 20년 전 한국에 입국한 이후 사극을 즐겨봤다. 재미도 있지만 북한 당국이 왜곡한 역사를 다시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구려, 발해를 주제로 한 ‘주몽’ ‘대조영’ ‘연개소문’ 등이 인상 깊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고구려·발해의 후손이라고 강조하는 북한은 왜 이런 드라마를 만들지 못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16일 중국 베이징 국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방길금(동방의 상서로운 금속)-한중일 고대 청동기전' 입구. 2022.9.16 /연합뉴스
최근 중국 국가박물관이 한반도 고대사 연표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고의로 뺀 것과 관련해 한국은 강하게 항의했지만 북한은 함구하고 있다. 한중 행사이기 때문에 북한이 침묵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고구려의 후손이라고 강조해놓고 중국의 고구려 지우기에 눈을 감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중국 베이징 국가박물관의 ‘한·중·일 고대 청동기전’에 게시된 ‘한국 고대 역사 연표’. 표 왼쪽 ‘시대/왕조’ 칸 위에서부터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고조선, 신라, 백제, 가야,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라고 적혀 있고 고구려와 발해는 빠져 있다. /웨이보
북한이 중국의 고구려사, 발해사 왜곡에 침묵하는 건 처음이 아니다. 북한의 고구려 관련 사극은 1986년 제작한 ‘온달전’이 마지막이다. 1990년대 초 ‘단군릉’ ‘동명왕릉’을 만들었지만 한반도의 역사를 평양 중심으로 기술하고, 김씨 왕조 세습을 정당화하는 수단이었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 100부작 만화 ‘소년 장수’는 배경이 고구려임에도 수, 당 등 고구려를 침략했던 중국 왕조를 공개적으로 거명하지 못했다. 대신 ‘돌탄국’ 등 황당한 이름을 붙였다. 북한은 2000년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
북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는 적극 대응해왔다. 그런데 역사적 정체성의 뿌리로 삼는 고구려사를 중국이 왜곡하는데도 항의하지 못하는 건 중국에 기대 먹고사는 북한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북한이 고구려를 언급하며 중국을 비판한 것은 중국이 ‘핵 개발’에 제동을 걸었을 때다. 2015년 김정은의 핵 개발에 중국이 노골적으로 반대하자 조선중앙TV는 특집 방송에서 고구려를 공식 언급했다. “고구려는 사대주의를 몰랐고 동서 6000리 영토를 가진 강대한 나라였기에 사대주의를 할 까닭이 없었다”며 중국을 겨냥했다. 중국이 핵 개발을 막는다면 고구려처럼 들이받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일 것이다.
김일성이 북한 정권을 세운 이후 중국을 40회 넘게 방문했지만 마오쩌둥은 한 번도 북한을 방문하지 않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 김정은은 중국 지도부의 조전을 본인 이름으로 받지 못했다. 세습 정권을 인정받으려면 중국에 먼저 머리를 조아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계승자라고 강조한다. 반면 남한은 신라와 백제의 계승자라고 한다. 이 때문에 신라의 삼국 통일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고구려사는 칭송한다. 그러나 현재 고구려 역사는 후손을 자처하는 북한이 아니라 신라·백제의 후손이라는 한국이 대신 지켜주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중국 눈치를 봐야 하는 북한 처지 때문이다. 앞으로도 고구려 역사는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것 같다.
-김명성 기자, 조선일보(2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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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제 민족주의'가 나라를 망친다
관제 민족주의 치명적 독소… 권력, 실정 숨기고 정통성에 악용… 정권 무능·빈곤·양극화 은폐도
친일 적폐 청산이 한국판 문화대혁명 비화 땐 삼권분립·법치주의 파괴
민족주의적 역사 정치가 불을 뿜고 있다. 친일 적폐 청산을 바라는 대중의 감성적 요구와, 북한과 함께 한반도 평화를 이루자는 '우리 민족끼리'의 열정이 그것이다. 왜곡된 한반도 현대사를 바로잡는다는 '백년 전쟁'의 열망이 역사 전쟁을 부추긴다. 그리하여 친일 적폐 청산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우리 민족끼리'는 2차 미·북 정상회담의 결렬로 숨 고르기에 들어갔을 뿐 언제든 다시 불붙을 수 있다.
지금의 반일 정서와 '우리 민족끼리'는 전형적 '관제 민족주의(official nationalism)'의 소산이다. '관 주도 민족주의'라고 해서 정부가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민족 감정을 주입하는 건 아니다. 대중이 민족주의적 감성을 이미 깊숙이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 통치와 분단에서 비롯한 뼈아픈 역사의 경험은 한국인의 민족주의적 감성을 극대화했다. 우리의 민족 감성이 평화 지향의 저항적 민족주의였다는 사실(史實)이 한국 민족주의의 정당성을 한층 강화했다. 이제 한국 민족주의는 신성불가침의 성소(聖所)가 되어 누구도 그 역린을 건드릴 엄두조차 못 낸다. 관제 민족주의가 번성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다.
하지만 민족 개념 자체가 서양 근대의 산물임을 주목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와 신성로마제국이 지탱한 중세 봉건 체제의 붕괴 이후 개별 민족의 국민국가가 그 빈자리에 들어섰다. 근세의 시작이었다. 언어·신화·문화·관습·혈통을 공유한 특정 종족 집단이 민족의 이름으로 '호명'되어 정치 주체로 등장했다. 근대 특유의 정치 기획이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y)'인 민족을 창출해낸 것이다. 국민국가의 탄생과 민족주의가 동행한 게 그 증거이다. '민족이 민족주의를 만든 게 아니라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
민족과 민족주의가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몽골 침략으로 바람 앞의 촛불이던 고려 말에 단군신화는 집중적으로 재조명되었다. 한민족의 영광을 외친 환단고기 같은 위서(僞書)가 일제 때 '발견'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위기의 순간에 민족은 '발명'되고 민족주의는 '호출'된다. 근대국가에서 국사와 국어는 모두 의무교육 과목이며 학교는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이다. 민족과 민족주의야말로 국민 만들기와 나라 세우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우리네 마음의 습관에 뿌리내린 민족주의는 민중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모습으로 표출된다. 친일 적폐 청산이 대중의 공감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배경이다.
그러나 관제 민족주의엔 치명적 독소가 있다. 권력은 실정(失政)을 숨기고 정권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한다. 유신 체제는 정부 주도로 민족주의 사관을 극대화해 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했다. 북한은 김씨 세습 정권을 옹호하려고 우리 민족의 역사 전체를 '김일성 민족'의 주체사관으로 변질시켰다. 관제 민족주의의 최대 폐해는 현실의 불평등과 빈곤, 양극화와 정권의 무능 같은 진짜배기 문제를 은폐한다는 데 있다. 러시아·중국·터키·베네수엘라에서 보듯 수평적 형제애로 맺어진 허구의 민족 개념을 정권이 부추겨 심각한 체제 모순을 감추는 것이 관제 민족주의의 본질이다.
나아가 문 정부는 우리의 생사가 걸린 남북문제까지 관제 민족주의로 분식(扮飾)하려 한다. '우리 민족끼리'의 민족적 감성에 호소해 북핵 위기를 풀고 한반도 평화 체제를 건설하자는 그림은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민족 감정으로 남북 관계를 해결하려는 문재인식 관제 민족주의는 제대로 된 출발조차 어렵다. '김일성 민족'임을 강조하는 북한 민족주의와, 한민족을 내세운 한국 민족주의의 동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삼일절과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함께 기리자는 우리의 제안을 북한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데는 사상적 이유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관제 민족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친일 적폐 청산이 민중의 동의를 업은 한국판 문화 대혁명으로 비화할 때 삼권분립과 법치주의가 파괴된다. 정권이 폐쇄적 민족 감정을 부추기는 국가는 예외 없이 정치 후진국이다. 남북 국가 이성의 긴장을 무시한 관제 민족주의는 우리 안보를 총체적 위기로 몰고 간다. 경제 실패와 국정 난맥을 감추기 위한 문 정부의 관제 민족주의가 나라를 망친다. '우리 민족끼리'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는 역사에 대한 반동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식민지 콤플렉스와 영원히 결별할 때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조선일보(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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