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아! 여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펴낸 김정운]

뚝섬 2025. 5. 2. 06:38

[아! 여수]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펴낸 김정운] 

 

 

 

아! 여수

 

외환 위기 당시 국민이 모은 금이 227톤이었다. 국내 채굴 금은 연 1톤 수준이고, 수입 금 대부분은 가공, 재수출돼 왔기 때문에 장롱 속 금은 대부분 밀수 금으로 추정됐다. 예부터 금 밀수 주요 루트 중 하나가 여수였다. 일본과 가깝고, 섬이 많아 숨을 곳이 많았다. 세관원 출신의 여수 밀수왕 허봉용은 여수를 밀수 중심지로 키웠다. 여수에서 돈 자랑 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1970년대 동양 최대 석유화학 단지가 조성되면서 여수는 공업 도시로 탈바꿈한다. 소백산맥 끝자락의 넓은 구릉지대였고, 항구와 가까워 공업 단지, 수출 기지로 적격이었다. 섬진강이 지척이라 공업용수 조달도 용이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비료와 석유화학 제품은 한국을 제조업 강국으로 키우는 밑거름 역할을 했다. 2022년엔 여수 산업단지의 수출액이 521억달러에 달했다. 산업단지 덕에 여수는 전남권 총생산의 70%를 차지할 정도로 호남권 중심 도시가 됐다.

 

2012년 여수 엑스포 개최 이후 여수에선 관광업도 급성장했다. 한 해 여수를 찾는 관광객이 1500만명대로 불어났다. 여수의 낭만을 노래한 ‘여수 밤바다’도 일조했다. 여수 경제가 피크를 쳤던 2020년, 여수 시민의 연평균 소득은 9459만원으로, 광주시민(2843만원)의 3배를 웃돌았다. 이즈음 재벌그룹 총수들의 여수 섬·땅 투자가 화제가 되며 부동산 투기꾼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2020년대 들어 중국이 석유화학 자립에 나서고, 산유국 중동 국가들이 자체 석유 정제 시설을 구축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세계적 공급 과잉 탓에 LG화학·롯데케미칼 등 여수 산단 대표 기업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 여수시의 법인세 세수가 2020~23년 평균치 대비 66%나 격감했다. 정부가 1일 여수시를 제1호 ‘산업 위기 대응 지역’으로 지정했다. 경영난을 겪는 기업에 긴급 자금을 지원하고, 산업 구조조정을 추진한다고 한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2012년 여수의 한 섬에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 생각을 하는 공간’이란 의미로 ‘미력창고(美力創考)’를 만들어 정착했다. 그는 “외로움이 성찰의 밑거름이 된다”면서 여수의 바다 풍경을 격찬한다. 하지만 여수가 산업 위기 지역으로 가장 먼저 지정됐다는 소식은 여수 바다마저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중국의 비약적 발전 탓에 석유화학만이 아니라 우리 산업 대부분이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2호, 3호 위기 지역이 이어질 것이다. 가슴이 답답하다.

 

-김홍수 논설위원, 조선일보(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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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펴낸 김정운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죽도록 하기 싫은 일이 생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만나는 것, TV 채널을 1번부터 100번까지 돌려보며 등장인물 욕을 하는 것. 싫다면서도 계속 "그 짓"을 하고 있었다. 반대로 꼭 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평생 사 모은 책을 근사한 책장에 꽂아 놓는 것. 그림도 원 없이 그려보고 싶었다. 문화심리학자이자 '나름 화가'인 김정운(57)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그게 바로 공간 충동이었더라"고 했다.

"미친놈 소리 들으면서 있는 돈 다 털어서 여수까지 갔잖아요. 남쪽 섬에 있는 창고를 하나 샀고 그걸 개조해 그림 그리고 책 읽는 작업실을 지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게 다 그놈의 충동 때문이더라고. 근데 작업실 지으면서 깨달았어요.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대한민국 모든 문제가 이 공간 충동에서 시작된다는 걸!"

최근 펴낸 책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21세기북스)엔 그 깨달음이 담겼다. 왜 여수 남쪽 섬까지 갔는지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결국 대한민국 밑바닥에 흐르는 고통과 분노의 뿌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15일 낮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봤다. 그의 그림과 나의 그림이 별반 다르지 않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한국 남자들은 왜 사우나에서 자나

김정운이 여수 섬에 지은 작업실 이름은 '미역창고(美力創考)'다. '아름다움의 힘으로 창조적인 생각을 한다'는 뜻이다. 100평 낡은 창고를 시세 두 배 가격을 주고 사는 바보짓 끝에 완성했다. 한쪽 벽은 죄다 책장으로 만들었다. "배 아프죠? 이게 나의 슈필라움인 걸 오십 넘어 알았다니 안타깝지. 그치만 괜찮아, 오래 살 거니까, 하하!"

 

15일 만난 김정운 소장이 느닷없이 “45×8이 뭐냐”고 물었다. 계산하려는 찰나 “지금 눈을 위로 치켜뜨고 있다”면서, “사람은 복잡한 생각을 할 때 그렇게 위를 보거나 멀리 본다. 사고할 땐 그래서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먼 곳을 봐야 한다. 내가 여수까지 간 이유도 그것”이라며 웃었다. 아래 사진은 김 소장이 2년쯤 지낸 여수 바닷가 작업실. 횟집이었던 곳을 고쳐 썼다. /조인원기자·21세기북스 

 

슈필라움(Spielraum)은 그가 작업실을 짓는 좌충우돌 끝에 찾아낸 심리학 용어. 김 소장은 '놀다(Spiel)'와 '집(Raum)'의 합성어인 이 말에서 '인간이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란 의미를 발견했다고 했다. "이걸 갖지 못해서 다들 그렇게 화나고 아프고 괴로운 거예요. 우리나라 남자들이 툭하면 1·2·3차까지 술집을 옮겨다니며 밤거리 헤매고 사우나에서 자는 것도, 20~30대 젊은 친구들이 집 놔두고 블루보틀 같은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줄 서 가며 그곳에 앉아 보려는 것도 슈필라움이란 공간에 목이 말라서인 거죠."

김정운은 독일 베를린 자유대 심리학과를 졸업(박사)하고 명지대 교수를 지냈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는 도중 사표를 쓰고 교토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공부했다. '휴테크' '워라밸' 같은 개념을 가장 먼저 전파한 이도 김 소장이다. 그는 "압축 성장을 거치는 동안 여성은 집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꾸리는 법을 찾아냈지만, 한국 남성들은 돈 벌고 권력 잡겠다고 큰소리 떵떵 치면서 오히려 슈필라움을 잃고 거리를 헤매는 꼴을 맞게 됐다"고 했다. "요즘 무슨 숲에 들어가 사는 자연인을 보여주는 TV 프로에 중년 남자들이 열광하는 것, 소셜미디어에서 아웅다웅 다투는 것도 다 슈필라움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행복해지려고 무엇을 했나

인간 수명이 100년으로 늘어난다고들 한다. 김정운은 "대책 없이 늙어만 가면 어쩔 거냐"고 했다. "친구들이 다들 퇴직했는데, 명함이 없다고 꼴이 말이 아녜요. 형편없어." 그는 "행복은 생각보다 구체적이고 처절한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밥상 하나 놓고 시집을 읽어도 좋고, TV 치우고 거실에서 음악을 들어도 좋겠죠. 그 정도 노력도 안 하면서 다들 불행한 이유를 사회구조 같은 남 탓으로 돌리지만, 지금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건 혹시 당신 책임 아닌가요?"

김 소장은 요즘 여수 작업실에 머물 때면 아침마다 양동이와 낚싯대 하나 들고 바닷가로 향한다고 했다. 온몸이 간질간질하고 웃음이 난다고 했다. "이 순간을 찾기까지 57년이 걸린 거야. 오래 걸렸지만 다행이지. 다들 이제부터 함께 찾읍시다. 늦지 않았다니까?"

 

-송혜진 기자, 조선일보(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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