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 당시 한 대선 후보가
모 직능협회와 간담회를 하는 자리에서 몇몇 협회 간부가 메모를 돌리며 필담을 나눴다. "내년에
몇 번 준대?" "○○번 정도?"
"△△△(협회장) 말고 XXX가 하는 게 좋을 듯"…. 대선 직후 있을 총선 때 이 단체 몫의 비례대표 의석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기자는 "협회 사람들이 정책 발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오로지 '비례대표 잿밥'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다"고 했다.
▶'전국구'에서 명칭이 바뀐 비례대표제는 각계
전문가를 국회로 보내 높은 식견과 다양한 민의를 수렴하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하지만 이런 취지가
무색하게 우리 정치사의 비례대표는 온갖 거래와 추문으로 얼룩져 있다. 선거 지원 대가, 정치자금 조달, 논공행상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비례대표 되는 데 최소 몇 억이 필요하다며 '전(錢)국구'라 일컫던 시절도 있었다.
▶2008년 총선 때 어느 당에서 당 대변인조차 얼굴 한 번 본 적 없다는 인물이 비례대표 1번을 받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십수억 공천 헌금의 대가였다는 게
드러나 의원직을 사퇴했다. 2012년에는 진보 인터넷 매체 인사가 실세들과 맺은 친분을 앞세워 비례대표
공천 희망자들에게서 40억원을 챙긴 일도 있다. 재외 국민
투표가 허용된 후에는 선거 때마다 비례대표를 미끼로 한 주요 정당들의 러브콜에 교민 사회가 사분오열된다고 한다.
▶그제 외식업중앙회장이 민주당과 간담회를 하면서 선거 지지 대가로 비례대표를 공개적으로 요구해 화제가 됐다. 이 단체 회장은 "대선 때 20만 진성 당원을 만들어 지지 기자회견을 했다" "1억원
들여 주요 언론에 성명 광고를 냈다"는 등 어떻게 민주당을 도왔는지를 소상히 공개했다. 그러면서 "내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꼭 주셔야 한다. 지난번에 새벽까지 운동해서 (비례대표 순번) 12등 했는데 결과 발표는 28등이었다. 배신당했다"고도 했다. 기자들까지
있는 자리에서 너무나 노골적으로 '한자리' 달라고 하니 정치판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민주당 대표도 말문이 막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고 한다.
▶민주당은 이후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고 했지만, 이 해프닝은 비례대표의 실상이 어떤지를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국당을 뺀 4당은 비례대표 의석을 현행 47석에서 75석으로 28석
늘리기로 합의한 상태다. 비례대표 의석 수가 늘어날 가능성이 있으니 먼저 한자리 확보하려는 물밑
작업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임민혁 논설위원, 조선일보(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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