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삽화도 곁들인 친절한 판결문 보셨나요] [공소장과 소설]

뚝섬 2023. 1. 29. 05:49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삽화도 곁들인 친절한 판결문 보셨나요] 

[공소장과 소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삽화도 곁들인 친절한 판결문 보셨나요

 

쉽게 달라장애인 요청에
행정법원 11부가 기울인 노력
 

 

기왕증(旣往症), 해태(懈怠)하다, 궁박(窮迫)하다, 불상(不詳), 요(要)하지 아니한다, 장구(葬具)….

 

이 단어들의 정확한 뜻을 아시는지. 순서대로 풀이하면, ‘지금까지 걸렸던 질병’ ‘게을리하다’ ‘곤궁하고 절박하다’ ‘알 수 없는’ ‘필요가 없다’ ‘장례 도구’다. 신조어만큼이나 해독이 어려운 이 단어들은 법원 판결문에 흔하게 등장해 분쟁 당사자들을 괴롭히는 주범. 대법원은 1991년 “판결서는 당사자를 위한 것”이라며 “법률 전문가가 아닌 당사자도 이해하기 쉽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되도록 짧게 세분하여 간명하게 작성하도록 한다”며 ‘쉬운 판결문’을 권장했지만 여전히 난독의 대상이다.

 

법률 용어를 쉽게 풀어보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2008년엔 서울남부지법 판사들이 판결문 수십 건을 국립국어원에 보내 “용어와 문장을 쉽게 고쳐 달라”고 의뢰한 바 있다. 2011년 법원도서관에서는 전국 법원의 판례들을 모아 ‘읽기 쉬운 판결서 작성 핸드북’과 ‘간결한 판결사례집’을 발간했다. 2017년 법무부는 ‘알기 쉬운 민법 개정 TF’를 운영해 2019년 ‘민법 일부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일본식·한자어 표현을 개선하고,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표현으로 민법 조문을 바꾸는 내용을 담았다. 

 

지난달 2일 서울행정법원 11부가 작성한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에 들어간 삽화. /서울행정법원

 

장애인·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판결문

 

그간의 노력이 밑거름이 된 것일까. 쉬운 단어와 구어체를 사용하고,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까지 들어간 ‘쉬운 판결문’이 지난달 2일 한국 사법 역사상 최초로 등장했다.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 이는 청각장애인(원고)이 서울 강동구청장을 상대로 낸 ‘장애인 일자리 사업 불합격 취소 소송’ 판결문에서 나온 첫 문장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재판장 강우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기존 판결문에 쉽게 풀어 쓴 문장을 나란히 붙여 썼다.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도 이어졌다. 3쪽 반 분량의 ‘해설’에는 단문과 구어체 문장으로 재판의 내용이 쉽게 적혀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삽화도 실렸다. 이는 판결 선고에 앞서 “알기 쉬운 용어로 판결문을 써달라”는 장애인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재판부는 “UN 장애인권리협약 및 UN 권고 의견에 근거하여, 판결문의 엄밀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지 리드(Easy-Read) 방식’으로 최대한 쉽게 판결 이유를 작성하도록 노력했다”고 밝혔다.

 

이번 사례를 두고 전문가들은 “재판 내용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것은 헌법에서 명시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최갑인 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변호사는 “난해한 판결문은 장애인은 물론 비장애인에게도 어렵다”며 “재판 당사자가 변호사의 해석과 번역을 거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판결문을 직접 이해할 수 있을 때, 재판받을 권리를 충실히 보장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팝송 가사도 등장하는 해외 판결문

 

해외는 어떨까. 영국은 정부 차원에서 지적 능력, 문해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쉽게 쓴 글(easy-read)’을 장려한다. 영국법을 계승한 미국도 판결문에 쉬운 영어를 쓰려고 노력한다. 심지어 ‘팝송 가사’가 등장한 연방대법원 판결문도 있다. 2008년 통신 사업자들 간 소송 판결문에선 밥 딜런의 노래 ‘뒹구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를 적었다. “당신이 가진 게 없다면 잃을 것도 없다(When you got nothing, you got nothing to lose)”는 가사를 통해 ‘원고가 피고에게 소송을 걸어 얻을 것이 없다’는 취지를 비유로 풀어낸 것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위한 ‘쉬운 판결문’이 널리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변호사 김재왕씨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각하·기각 등의 표현이 난해한 것은… 물론, 법률 언어가 일상 언어와 다른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아 법률가가 아닌 재판을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판결문이 어렵게 읽힐 수밖에 없다”며 “‘쉬운 판결문’에 대한 내규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아모 기자, 조선일보(23-01-28)-

_______________

 

 

공소장과 소설

 

과거 검찰 공소장은 가급적 한 문장으로 쓰는 게 원칙이었다. 그래서 나온 게 '고, 며, 바, 데' 공소장이다. 늘 똑같은 어미(語尾)만 쓰긴 뭣하니 처음엔 '~하고'로 쓰다가 '~하며'로 이어가고, '~한 자(者)인 바'로 넘어갔다가 '그런데'로 돌려서는 '(범행을) 한 것이다'로 끝맺는 식이다. 읽다가 숨 넘어갈 정도였다. 1990년대 컴퓨터 사용이 보편화되자 공소장 분량도 늘어났다. 

 

▶현장 취재 시절 공소장 복사하다가 줄 선 민원인들에게 눈총 꽤 맞았다. 웬만한 장편소설 분량과 맞먹는 700페이지 공소장도 있었다. 그런데 길다고 좋은 공소장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기 혐의 공소장에 교통 위반 전력은 왜 넣나" "공소시효 지난 사건을 검찰이 슬쩍 끼워 넣었다" "공소장은 여러 장인데 범죄 사실은 달랑 네 줄"…. 변호사들 불만은 넘쳐났다. 판사들도 "검찰 공소장을 법적 요건에 맞춰 요약하고 판결문 쓰느라 밤을 새웠다"고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그제 법정에서 "검찰 공소장은 미숙한 법률 조언을 거친 한 편의 소설 같다"며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혐의'를 부인하면서 한 말이라지만 공감이 간다는 법조인이 적잖다. 양 전 대법원장 공소장은 전체 300페이지, 목차만 15페이지다. 내용도 범죄 혐의 사실보다 '피고인의 지위와 권한' '당시 법원의 상황' 같은 배경 설명이 압도적으로 많다. 사람 마음속에 들어가 본 것도 아닐진대 '마음먹었다' '재차 마음먹었다' 같은 주관적 표현도 숱하게 눈에 띈다. 

 

▶양 전 대법원장 공소장만 그런 게 아니다. 법원 사건으로 기소된 다른 판사 재판에선 재판부가 "공소장에 너무 힘이 들어가 있다. 공소장 1~10페이지는 '피고인들은 공모하여~' 한 문장이면 전부 요약된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 공소장에는 당사자들이 모두 부인한 대화 내용이 '직접 인용' 형식으로 실렸는가 하면 수사 전 이미 사망한 대기업 간부의 '생각'이 담기기도 했다. 

 

▶공소장은 형사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문서다. '제1의 증거'라고도 한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느냐 아니냐가 걸린 문서다. 그런 만큼 공소장에는 의심이나 추정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만을 담아야 한다. 판사에게 선입견을 심어주거나 언론에 보도돼 여론전을 벌이기 위한 공소장은 무죄 추정 원칙을 허무는 헌법 위반이다. 요즘엔 검찰이 소설 같은 내용을 공소장에 끼워 넣어도 법원은 못 본 척 눈을 감는 일이 잦다고 한다. 그런 재판이 공정할 리 없다.

 

-이명진 논설위원, 조선일보(19-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