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이 소설'이라는 피고인 양승태의 호소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시국사건 공소장과 같아
정권 반대를 국가 반역 몰더니 이젠 말 안 들으면 사법 적폐로
"이것(검찰 공소장)은
법률가가 쓴 법률 문서라기보다는,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 한 편의 소설을 쓴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재판으로 온갖 거래 행위를 하고 있을 수 없는 재판 거래를 획책한 것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가면서 모든 걸 왜곡하고 견강부회하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만들어내다가 결론 부분에선 재판 거래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심의관들한테
몇 가지 문건과 보고서를 작성하게 한 것이 직권남용이란 걸로 끝을 냅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법정에서 한 진술이다. 이 진술에서 그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있었던
사법부 시녀화와 무리한 수사, 그리고 그로 인한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새삼 반추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 진술을 통해 사법부 정치 도구화가 '민주-진보'라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았음을 주장한 셈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트집 잡기'
'흠집 내기' '재판 지연'이라고 반박했다. 법정 안팎이 심각하게 탐사해봐야 할 공방이다.
사법부 장악 기도는 우파 권위주의에서나 좌파 권위주의에서나 똑같이 일어난다. 이 점은 1960년대 브라질 군사정권과 2000년대 베네수엘라 좌파 정권 때
분명히 입증되었다. 좌파든 우파든 독재는 국회 무력화에 앞서 사법부 시녀화부터 착수한다. 이를 위해 우파 권위주의도 좌파 권위주의도 정권에 충실한 판사들만 요직에 앉히고, 그렇지 않은 판사들은 법복을 벗게 한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좌파 정권은 사법부를 권위주의 정권 못지않게 철저하게 도구화했다. 마리아
루르드 아피우니란 판사가, 장기 구금됐던 전(前) 정권 금융인을 석방하자 차베스 정보부는 판결 15 분 만에 그녀
사무실에 들이닥쳐 '부패와 직권남용' 혐의로 그녀를 구속했다. 차베스는 TV에 나와 그녀가 30년
형을 받아 싸다고 했다. 차베스 추종자들로 채워진 베네수엘라 대법원은 국회를 제치고 입법권까지 부여받았다. 삼권 분립 아닌 삼권 통합, 독재화였다.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진보'가 한철인 요즘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지난해 12월 전 대법관·헌법재판관·검사장·변협회장 등 변호사 200명이
발표한 긴급 성명 '김명수 대법원장 즉각 사퇴하라'는 "(운동권 집권 후) 사법부 정치화-시녀화-신(新)사법 농단이 자행되었다"고 비판했다. '양승태 재판 거래'를 기정사실로 몰아 외부 공격을 부추긴 것, 법관대표자회의 특정 성향 판사들의 행동을 부추긴 것, 마음에 들지
않는 판사 탄핵을 동료 판사들이 하게 방조한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역시 법정 안팎이 엄밀하게 살펴야
할 사법적 쟁점이다.
그러나 법적 논쟁이야 여하튼 양승태 재판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따로 있다. 양승태 재판을 촛불 혁명의 속편으로 만들려는 '운동적 의지'가 그것이다.
운동권엔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혁명의 시작일 뿐, 완결이 아니다. 탄핵은 그들의 혁명 1장 1절에
불과하다. 이제부턴 혁명 2장을 열 차례다. 2장은 행정부 장악에 이어 사법부를 장악하는 혁명이다. 사법부
장악을 위해선 양승태 대법원이 '응징받아야 할 구체제'임을
드러내 보여야만 한다.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바로, 자신에 대한 '한 편의 소설'을 쓰는 것에 의해서라는 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주장이다. 권위주의
시대 시국 사건 공소장들이 곧잘 그랬다. 그때의 공소장들은 정권에 대한 반대를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확대 해석하는 특별한 소설적 재능을 발휘하곤 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또 박근혜 시대 대법원과 '말 안 듣는'
판사들을 바로 그 '공소장 소설'에 의해 사법
농단-사법 적폐로 몰아 혼을 내고 있다는 게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체감이다. 이건 '피고인 입장'의
논리다. 그러나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이 시대 갈등의 기구한 현장인 것만은
틀림없다.
'양승태 재판'을 둘러싼 오늘의 혁명적 풍향은 결국 자명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구정권 타도)-문재인 대통령 집권(신정권 장악)-양승태
대법원장 타도(사법부 장악)-2020년 운동권 총선 승리(입법부 장악)-개헌-자유민주주의
삭제-민중민주주의 도입-'촛불' 독재-안보 무력화-한·미
동맹 해체-남북 연방제가 그것이다.
이 바람대로라면 마지막으로 닥칠 건 '폴 포트 본색(本色)'이다. 자유민주뿐 아니라 완장 찬 운동권도, 남로당 후예도, 백두충성 패도 다 갈 것이다. 그땐 한국 정치사의 반복된 자해(自害)극 '공소장 사화(士禍)'를 아무리 후회한들 너무 늦었을 것이다.
-류근일 언론인, 조선일보(19-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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