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재처리 권한 추진, 끈질기되 조용한 외교를]
[미군 분담금 증액 불가피하다면 안보 족쇄도 전면 해제돼야]
[핵 없는 韓에 돈 뜯는 트럼프, 핵도 없이 안보 포퓰리즘 文]
[美 대통령 "한국이 최악", 한 번도 경험 못한 사태]
[방위비 금액, 그 밑에 흐르는 기류]
[駐獨 미군에 보내는 러브콜]
핵 재처리 권한 추진, 끈질기되 조용한 외교를
11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대사관 국정감사에서 조현동 주미대사와 대사관 간부들이 위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자리해있다. /연합뉴스
조현동 주미 대사가 워싱턴에서 열린 국정감사에서 차기 미 행정부가 출범하면 사용 후 핵연료(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재처리 시설 확보를 위한 대미(對美) 설득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권한을 일본 수준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질의하자 나온 답변이었다. 그는 자체 핵무장이나 미국 전술핵의 재배치는 정부 입장이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핵연료 재처리를 “(내년 1월) 미국 신정부 출범 후 우선 추진 현안으로 삼겠다”고 했다.
핵무기를 만들려면 우라늄을 고농축하거나 원자력 발전 후 남은 핵연료를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추출해야 한다. 한국의 핵물질 처리 권한은 한미 원자력협정의 제약을 받는다. 2015년 협정을 개정했지만 여전히 사용 후 핵연료에 대한 재처리 권한을 확보하지 못했다. 우라늄도 비군사용인 20% 미만으로 농축하는데도 미국 동의를 얻어야 해 군사적 사용은 원천 봉쇄돼 있다.
일본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을 확보했다. 이후 일본이 재처리로 추출한 플루토늄은 47t이 넘는다고 한다. 일본 역시 당장은 핵무기를 제조할 수 없다. 그러나 재처리 권한을 통해 유사시 즉각 핵무장에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잠재적 핵 능력’이라고 한다. 북핵과 직접 맞서는 우리에게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 능력’ 확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는 안보뿐 아니라 산업과 환경을 위해서도 불가피하다. 원전 가동으로 발생한 사용 후 핵연료는 2030년 이후 원전 내 저장 시설이 포화 상태에 도달하게 돼 재처리가 불가피하다.
최근 러시아 외교장관은 “북한 비핵화는 종결된 이슈”라고 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도 “북한은 사실상의 핵보유국”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핵 폭주에 국제사회가 무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핵우산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2015년 개정된 한미 원자력협정은 유효 기간이 20년이지만 한미가 합의하면 언제든 개정할 수 있다.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 능력’은 자위권 확보를 위한 최소한의 수준이다. 미국의 경계심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설득력 있는 외교를 끈질기게 추진해야 한다.
-조선일보(24-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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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분담금 증액 불가피하다면 안보 족쇄도 전면 해제돼야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이 14일 서울에 온다. 방한한 국무부 차관, 차관보 등에 이어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이전보다 5배 오른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를 우리 측에 요구할 것이다. 협상에서 깎는다고 해도 동맹 분담금 인상을 대선 업적으로 삼으려는 트럼프 속셈을 감안하면 상당한 증액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러나 동맹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미국이 관례와 합리적 선을 넘는 증액을 요구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한(對韓) 보상도 제시해야 한다.
한국 미사일에 대한 탄두 중량 제한은 2017년 풀렸지만 사거리는 800㎞가 최대치다. 한·미 미사일 지침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민간 로켓에도 고체 연료를 쓰지 못하게 막고 있다. 한국은 총 추력 100만파운드.초(lb.sec) 이상 고체 연료 로켓을 만들지 못한다. 선진국 고체 로켓의 10분의 1 수준의 추력이다. 우주 선진국들은 액체와 고체 로켓을 병용하는데 우리는 미사일 지침에 묶여 '반 쪽짜리' 액체 로켓만 개발하고 있다. 반면 '전범 국가'인 일본은 고체 로켓도 맘대로 쏜다. 이 기회에 한·미 미사일 지침은 완전히 폐기돼야 한다.
지금 북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은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다. 동해 물밑에서 SLBM을 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선 북 잠수함 기지에서부터 밀착 감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려면 수개월 이상 바닷속에서 작전할 수 있는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원자력 추진 잠수함을 자체 개발해도 '군사용 핵연료'를 금지한 한·미 간 협정 때문에 가동할 수가 없다. 이 족쇄도 풀어야 한다. 원자력 추진 잠수함의 필요성에 대해선 찬반론이 있지만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는 자유는 이번에 얻어야 한다.
미국이 방위비 분담금을 5배 더 내라는 것은 그만큼 대한(對韓) 방위에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미국의 한국 방위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미 국방대학은 지난 7월 한·미·일이 '핵무기 공유 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처럼 한·일이 미국의 핵무기 정책 논의에 참여하고 핵 사용 결정에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토에 배치된 핵무기는 나토 전투기가 투하한다. 한·미 간에 핵 공유 협정을 맺고 미국 대통령의 최종 승인권 전제 아래 한국 잠수함이나 전투기가 미국 핵탄두를 운용할 수 있게 되면 미국의 한국 방위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그만큼 미국이 쓰는 비용도 감소할 것이다.
여전히 불평등한 한·미 원자력 협정도 고쳐야 한다. 2015년 개정으로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後) 핵연료 재처리의 문을 겨우 열었다. 그러나 미국산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저농축할 때도 사실상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한국은 세계적 원자력 기술을 보유한 원전 강국이지만 규제 때문에 우리 손으로 우라늄 연료봉 하나 못 만든다. 매년 1만6000다발씩 쏟아지는 사용후 핵연료도 재처리를 못 해 임시 저장만 하고 있다. 일본도 있는 농축·재처리 권한이 우리에겐 없다.
미국에 어떤 행정부가 들어서든 계속 더 많은 방위비 분담금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미국의 안보 부담을 우리가 나눠 맡는 것이 양국을 위해 더 도움이 된다. 트럼프는 한·일 핵무장에 대해서도 반대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 기회를 잘 활용하면 분담금 인상액 이상의 가치를 가진 안보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 비전을 갖고 실행에 옮겨 국가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다.
-조선일보(19-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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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없는 韓에 돈 뜯는 트럼프, 핵도 없이 안보 포퓰리즘 文
미국이 현재 진행되는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이전보다 5배 오른 50억달러(약 5조8000억원)를 우리 쪽에 요구했다고 한다. 한국민은 적정한 정도의 방위비 분담금을 부담할 용의가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한꺼번에 5배라니 아무리 부동산 업자의 거래 수법이라고 해도 어이가 없다. 과거 최고 인상률이 25.7%였다. 5배 요구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약점을 이용해 돈을 뜯겠다는 협박과 다를 것이 없다.
북한, 중국, 러시아 등 핵 국가들 앞에 핵 비무장으로 노출돼 있는 한국민을 향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것이다. 트럼프는 동맹의 가치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다. 미국을 위해 1만명의 목숨을 바친 쿠르드족을 헌신짝처럼 배신했다.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은 월세 받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돈이 안 되면 무슨 협박 카드를 들고나올지 모른다. 미국 협상 대표는 '주한 미군 철수·감축 우려'에 대해 "트럼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했다. 완전히 협박이다. 미국 대통령이 우리 안보의 '위험 변수'가 돼 버렸다.
트럼프 리스크만이 아니다. 이 정부는 핵무장한 120만 북한군 앞에서 국군 병력을 62만에서 50만으로 줄인다고 한다. 육군 사단 6개가 없어지고 최전방 사단이 지켜야 할 전선이 1.2배 늘어난다. 저출산으로 병역의무자가 어쩔 수 없이 감소하는 만큼 전력(戰力)을 유지하려면 복무 기간을 늘려야 정상 국가다. 그런데 거꾸로 복무 기간을 줄이고 있다. 유사시 7년 이상 장기 복무하는 북한군 전면 공세를 18개월 복무에 절반 병력인 국군이 정말 막아낼 수 있나. 북에 급변 사태가 발생할 경우 안정화 작전을 펴는 데도 26만~40만 병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기본적 병력 부족은 첨단 장비로 메꿀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위중한 안보 상황에서 우리가 국방 실험을 할 처지인가.
민주당 싱크탱크는 7일 보고서에서 "모병제는 인구 절벽 시대에 병력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모병제는 장단점과 찬반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다. 장기적으로 논의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당장 공론화를 시도하는 것은 내년 총선에서 20대 남성들에게 '군대 안 갈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줘 표를 얻으려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대선이 다가오면 대통령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복무 기간을 더 줄이는 공약을 내놓을 것이다. 세계에서 안보 위협이 가장 큰 나라가 선거 한 번 치를 때마다 복무 기간이 줄어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한미연합사 창설 기념사에서 "전작권 전환에 더 심혈을 기울여 달라"고 했다. 임기 내 전환이 목표다. 이 역시 정치 포퓰리즘일 뿐이다. 북은 핵이 있고 우리는 없다. 북핵은 미국의 핵·재래식 전력을 총동원하는 확장 억지력으로만 제어할 수 있다. 한국군엔 확장 억지 자산이 단 하나도 없다. 북핵 동향을 감시할 능력조차 없다. 그런 한국군이 미군 확장 억지를 어떻게 지휘하나. 상식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전시작전권 환수와 같은 멋진 말로 인기를 끌려고 할 문제가 아니다.
지난 70년간 우리는 한·미 동맹을 근간으로 북·중·러의 위협을 막으며 평화와 발전을 누려왔다. 그런데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 대통령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드는 한국 대통령의 포퓰리즘이 겹쳐 마치 쓰나미가 안보 방파제를 넘어올 듯한 상황이다. 지금 미국에선 비록 일각이지만 한·일의 자위적 핵무장, 핵 공유 협정, 전술핵 재배치 등을 공개 거론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 빛을 찾아야 한다.
-조선일보(19-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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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통령 "한국이 최악", 한 번도 경험 못한 사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취임 초 "한국은 미국을 가장 많이 이용해 먹은 나라다. 중국과 한국이 오른쪽 왼쪽에서 우리를 벗겨 먹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미 국방장관 연설문 작성자가 책에서 밝힌 내용이다. 트럼프가 "한국은 매년 600억달러(약 70조원)를 내야 한다"고 하고, 틸러슨 전 국무장관이 "트럼프의 눈엔 한국이 (동맹 중) 최악"이라고 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트럼프가 돈을 앞세우며 동맹의 가치를 헌신짝 취급해온 것은 더 이상 뉴스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한국이 '최악'으로 각인돼 있다는 증언은 충격적이다. 한국에 개인적 감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흥적이고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트럼프는 사적 감정이나 선입견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가 불과 몇 달 전에도 한국에 대해 "엄청난 부자이면서 '우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라'를 지키느라 많은 돈을 잃고 있다"고 한 걸 보면 트럼프의 취임 초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진행되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미 측은 이전보다 5배 이상을 요구했다고 한다. 트럼프는 그러면서도 "북한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별문제 없다"며 한국민 안위를 도외시한다. 미 행정부 내에는 트럼프를 제어할 '어른'도 거의 남아있지 않다. 트럼프의 충동적인 시리아 철군 결정 같은 일이 한반도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나.
한국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은 '김정은 쇼'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쇼에 필수적인 배우가 트럼프다. 트럼프가 출연하지 않으면 김정은 쇼는 상영될 수 없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트럼프의 비위를 맞추고 아부하는 데 전력하고 있다. 트럼프를 향해 "세계사의 엄청난 대전환을 이뤘다"는 등으로 기회만 있으면 찬사를 퍼붓는다.
미국 대통령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대한민국의 안전과 국익이 아니라 국내용 정치 이벤트를 위한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정작 트럼프의 비뚤어진 대한(對韓) 선입견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악성으로 바뀌면서 상식을 넘어서고 있다. 그동안 한국 외교가 한 일은 뭔가.
미국 대통령은 한국을 '최악'이라고 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군사 동맹을 맺을 태세라고 하고, 북한은 무관중 무중계 폭력 축구도 모자라 한국 청소년 역도 선수 시상 현장에서 집단 퇴장하고, 일본 국민은 한국과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에 회의적이라고 한다. 정말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다.
-조선일보(19-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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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위비 금액, 그 밑에 흐르는 기류
美軍 놓고 흥정하는 트럼프
거칠고 천박하지만 미국 자체가 바뀐 게 문제
방위비는 빙산의 일각일 뿐
한·미 방위비 분담금 협상을 앞두고 한 전직 외교관이 트럼프 미 대통령 영상을 메신저로 보내왔다. 지난해 백악관에서 열린 미·폴란드 정상회담 기자회견의 일부다. 영상에서 트럼프는 "폴란드에 미군을 영구 주둔시키는 대가로 폴란드 대통령이 20억달러보다 훨씬 많은 돈을 내겠다고 한다. 우리는 비용 측면에서 이를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고, 폴란드 대통령은 "우리는 더 많은 미국 무기 구입을 희망한다"고 받는다. 용병 거래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트럼프의 '돈 타령'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전 세계가 지켜보는 공개 석상에서도 미군을 놓고 이런 흥정을 거리낌 없이 벌인다. 실제로 얼마 전 폴란드 내 6개 지역에 미군이 주둔하는 데 합의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영상을 보낸 외교관은 "방위비 협상이 틀어지면 주한미군 철수 같은 일이 현실화되지 말란 법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번으로 11번째인 방위비 협상이 쉽게 마무리된 적은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이번 전망은 특히 어둡다. 벌써 '5배 증액 요구' 얘기도 나온다. 미국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방어하기 위해 청와대가 '숫자와 예산에 밝은' 기재부 출신 관료를 처음으로 대표선수로 내세웠지만, 미국은 사실상 트럼프가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다. 방위비 협상은 한국에서나 민감한 이슈지, 미국에서는 실무자 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것이 트럼프가 '동맹의 무임승차 저지'를 대표 브랜드로 들고 나오며 국가적 이슈가 돼버렸다. 그는 내년 대선 유세장에서 "내가 한국에서 ○억달러를 더 받아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되든 67년 혈맹(血盟)이 돈 문제로 심하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의 이런 행태에 워싱턴 주류 지식인들은 진저리를 친다. 노골적으로 돈을 앞세워 동맹을 압박하며 '민주주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전통적 역할을 팽개치고 있다는 것이다. 미 주요 언론은 트럼프를 '부끄러움을 못 느끼는 거짓말쟁이(shameless liar)' '폭력적인 깡패(abusive bully)'라고 부른다. 그런데 정말 트럼프가 탄핵당한다면, 아니면 내년 재선 도전에 실패한다면, 미국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올까. 이 모든 게 트럼프 탓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미 미국은 과거의 미국이 아니다. 대다수 일반 미국인은 미국이 세계 모든 분쟁의 조정자 역할을 떠안는 데 대해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다. 공화당·민주당 지지자 구분없이 '동맹 보호에 미국 세금을 쏟아붓지 말고 미국인을 위해 더 써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사명을 지난 특별한 나라'(미국 예외주의)라는 자부심은 역사 속으로 거의 사라졌다. 오바마 전 대통령조차 퇴임 전 인터뷰에서 일부 동맹을 "무임승차자"라고 비난한 것은 이런 흐름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로버트 케이건의 말을 빌리면 "트럼프가 미국을 바꾼 게 아니라 미국이 바뀌었기 때문에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물론 트럼프가 아니었다면 '바뀐 미국'은 지금보다 훨씬 덜 거칠고 덜 적나라하고 덜 천박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당장 이번 협상에서 방위비를 얼마로 타결하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여론의 관심도 액수에 집중돼 있다. 하지만 정부는 숫자 싸움에만 올인하지 말고, 그 뒤에 내포된 미국의 근본적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 우리 안보 전략 방향을 잡을 것인가도 고민하길 바란다. 우리는 이미 주한미군, 전략자산, 연합훈련, 확장억지 등 동맹 이슈가 미·북 협상 테이블에서 거래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이런 미국의 새 민낯 앞에서 방위비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임민혁 논설위원, 조선일보(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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駐獨 미군에 보내는 러브콜
리처드 그리넬 독일 주재 미국 대사는 '유럽에 상주하는 트럼프' 소리를 듣는다. 그는 "독일에 미군을 주둔시키기 위해 미국 납세자들이 낸 돈을 써야 하는 건 불쾌하다"고 말한다. 독일이 국방비 지출에 인색해서 미국이 홀로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떠받치고 있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유럽 외교가에서는 미·독 관계가 트럼프 집권기에 악화되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 이미 균열이 생긴 지 오래라는 진단이 나온다. 냉전(冷戰) 시대에는 미·독 관계가 끈끈했다. 함께 소련에 맞섰다. 특히 주독 미군이 양국 관계의 가교였다. 1980년대 중반 주독 미군은 25만명에 달했다. 하지만 독일 통일을 거치면서 지금은 3만5000명으로 줄었고, 이와 맞물려 미·독 관계도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주독 미군은 폴란드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폴란드는 백악관을 향해 "주독 미군을 폴란드로 재배치해주면 비용을 전액 부담하고 기지 이름을 '트럼프 기지'로 하겠다"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미군의 경제적 가치를 높게 보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러시아의 서진(西進) 위협에 맞서 미국의 안보 우산으로 무장해 해외 자본이 안심하고 투자하게 만들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다.
폴란드가 기업 유치하듯 미군을 모셔 가려고 하자 화들짝 놀란 독일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분위기다. 독일인들은 미군의 도움 없이 국토를 방어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미군에 안보를 의존하면서 국방 예산을 GDP(국내총생산) 대비 1.2% 안팎만 쓰는 나라가 독일이다. 선진국 최저 수준이다. 국방비를 덜 쓰고 다른 분야에 투자를 늘릴 수 있었던 것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다. 미군의 도움으로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점에서 독일과 한국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요즘 세계인들은 미군이 있고 없는 차이를 눈으로 확인하는 중이다. 시리아에서 미군이 철수한다고 결정하자마자 터키군이 시리아 국경을 넘어 쿠르드족을 타격하는 장면을 보고 있다. 트럼프가 가까운 우방으로 꼽는 이스라엘에서도 언제 미국이 배신할지 모른다며 "칼은 우리 등 뒤에 있다"는 우려가 터져 나왔다. 독일도 국방 예산을 2024년까지 GDP의 2%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하며 미국의 마음을 사려고 애쓰고 있다.
각국이 미군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지만 반대로 한국에서는 미군 철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다. 트럼프가 한·미 연합 훈련을 "완전한 돈 낭비"라고 하고, 주한 미군 방위비도 늘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현재 집권 세력은 별달리 긴장하지 않는 것 같다. 유럽 최대 국가이자 경제 규모 세계 4위 대국(大國)인 독일보다도 미군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하다. 한반도에서 미군이 떠난 후폭풍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손진석 파리 특파원, 조선일보(19-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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