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총선 참패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들이 분분하다. 코로나 사태, 공천 실패 등….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 하나가 간과되고 있다. 바로 진보가 내뿜는 이념의 열기가 보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력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진보의 이념적 확신은 거의 광신적이다. 가장 큰 증거가 작년 가을 조국 사태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이다. 조국 패밀리의 광범위하고도 명백해 보이는 각종 비리와 불법의 증거에도 많은 진보 세력이 길거리로 나서 '조국 지지'를 외쳤다. 바로 이런 것이 이념적 광신성이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보수에서는 그런 광신성을 별로 찾아볼 수 없다.
'풀뿌리'가 행동하지 않는 보수 진영
해방 이후 70년 넘게 나라를 지키고 경이적인 경제 발전을 주도해 온 보수가 강한 자부심, 나아가 상당한 광신성을 가진다고 누구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요즘은 보수의 자괴심과 이탈자가 급속히 늘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마디로 지난 약 30년 동안 보수에는 풀뿌리가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보에 비해 보수는 너무 게을렀고 또 인색했다.
진보는 참 열심히 뛰었다. 가장 큰 증거가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들이다. 1994년 설립된 참여연대는 현재 회비를 내는 회원이 1만5000명이 넘는다. 군대로 치면 6개가 넘는 정예 사단 병력이 매달 후원하면서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이룬 그동안의 업적은 무척 인상적이다. 26년간 660여 개에 달하는 입법안을 제안하거나 그 통과를 위해 직접 뛰었다. 거의 한 달에 2개꼴이다. 또 700여 건의 소송을 직접 제기하거나 지원했다. 이뿐 아니다. 온갖 이슈에 대해 총 1400개가 넘는 입장서, 연구 자료 등을 발간했다.

경실련도 초창기 활동은 이에 뒤지지 않았다. 이 진보 싱크탱크들은 진보가 제대로 싸우는 데 필요한 이론적 무기와 탄약들을 공급했다. 자신들도 뛰었다. 분야별 학자와 전문가 수천 명이 이슈별로 진보의 철학에 입각한 각종 정책 대안을 제시했다. 진보가 벌이는 각종 공청회, 토론회, 강연회 등은 이들이 제공하는 풍부한 이론과 데이터 때문에 대중에게 설득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지적 영양분을 마음껏 들이켜면서 대한민국의 진보는 강력한 설득력, 단결력, 투쟁력을 가진 집단으로 무럭무럭 성장했던 것이다. 진보의 광신성은 바로 이런 풀뿌리 전사들의 줄기찬 노력에서 잉태되고 성장하였다. 그들은 몸으로 뛰고 쌈짓돈을 털어 후원했다. 최근에는 가상하게 혼자 수천억원을 기부해 진보 성향 싱크탱크를 설립한 기업가까지 생겨났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보수 시민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는가. 민망할 정도로 존재와 활동이 미미하다. 일반 시민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보수 시민단체가 하나라도 있는가. 대한민국 보수는 지금 그들의 분노가 탱천한 것에 못지않게 이념적 지평이 참담하게 황폐해 있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보수가 쌩쌩하게 살아 있는 나라에는 예외 없이 풀뿌리 보수가 생동하고 있다. 미국에는 '헤리티지 재단'이라는 거대한 보수 싱크탱크가 있다. 1973년 쿠어스 맥주 창업자인 조셉 쿠어스가 25만달러를 기증해 설립된 이 재단은 지금 유료 회원 50만을 가진 거대한 싱크탱크로 성장했다. 인구 비례로 따져도 참여연대의 6배가 넘는다.
위풍당당 美 보수, 그 뒤에 거대한 싱크탱크
이 재단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정책 연구 활동, 다른 하나는 시민 교육이다. 헤리티지는 1980년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지 불과 1주일 만에 3000여 건에 달하는 개혁안이 담긴 '리더십을 위한 위임령'을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무려 60%가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미국의 전략방위계획(SDI) 이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서구 동맹 체제의 공고화 이론 등이 모두 그곳에서 나왔다. 이 재단은 선거 때마다 보수의 철학에 부합되는 숙고되고 정제된 정책과 논리들을 대거 내놓아 보수 후보들을 돕는다. 때로는 신랄하게 정부를 비판하기도 한다.
이 재단의 다른 한 축은 교육 활동이다. 재단 예산의 거의 절반을 사회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보수의 이념과 철학, 정책을 교육하는 데 쓰고 있다. 보수 이념의 가장 핵심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공동체에 최대한 '자유'와 '선택의 기회'를 늘리자는 것이다. 그를 통해 '풍요롭고 자부심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자는 것이다. 헤리티지는 이 이념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 전 국민을 상대로 전파하고 계몽한다. 미국 보수가 위풍당당한 가장 큰 이유는 헤리티지 등이 제공하는 이념적 자신감 때문이다. 이런 헤리티지가 가능했던 것은 미국의 보수 풀뿌리들의 열정적인 후원 때문이었다. 한국 진보의 득세가 그 풀뿌리들 덕분이었듯이….
지금 대한민국 보수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처해 있다. 과거 업적에 취한 채 게으르고 인색했던 것에 대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로 광신적 진보를 이긴다는 것은 난망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보수 싱크탱크가 나와야 한다.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뛰는 싱크탱크가 나와야 한다. 정당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이고 자율적인 풀뿌리 시민 주도의 싱크탱크가 나와야 한다. 그것이 제공하는 풍부한 이론적 탄약과 무기로 모든 보수가 힘을 합쳐 같이 진격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시작의 첫걸음이다.
-전성철 글로벌 스탠다드 연구원회장, 조선일보(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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