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은의 妄想·문재인의 夢想
핵무기 그늘 아래서도 북핵 문제 당사자 아니라는 착각이 빚은 破局
김정은의 동생 김여정의 말투와 단어는 버릇없고 고약했다. 제 오빠는 최고 존엄(尊嚴)으로 받들어 모시면서 아버지뻘 되는 남쪽 대통령을 몇 번이고 시궁창에 내팽개쳤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비판 여부를 떠나 국민 전체가 모욕감과 좌절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난 3년 남북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무슨 말이 오갔기에 저들 남매에게 이런 닦달을 당해야 하는가. '지금은 인내하는 수밖에 없다'는 대통령 말이 더 허망했다.
이번 사태로 남북 관계가 채무자와 채권자 관계로 변질됐음이 확실히 드러났다. 세계에서 열 몇째로 잘사는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에 돈을 꿨을 리 없다. 마음의 빚을 따질 양이면 6·25와 그 이후 북한에 의해 희생된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의 얼굴을 떠올려 보라. 김여정은 남쪽 국민 세금으로 지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하고 추가적인 군사 행동까지 예고했다.
김여정은 "'판문점 선언'과 '평양 공동 선언'에서 남조선 당국이 이행하겠다고 약속한 내용 가운데 제대로 실행한 것이 한 조항이라도 있는가" 하고 추궁했다. 총액 계산서를 흔들었지만 계산서 세목(細目)을 들여다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재작년 방북 때 '평양 능라도 5월 1일 경기장'에서 한 군중대회 연설 가격도 나와 있을 것이다.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남북 정상 부부가 손을 맞잡은 사진은 또 얼마나 멋졌는가. 그게 공짜일 리 없다. 과거 남북정상회담은 '선불(先拂)과 후불(後拂)' '현찰 납부와 물납(物納)'의 차이가 있었을 뿐 공짜는 없었다. 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대통령은 유럽 5국을 순방하며 대북(對北) 제재의 한 모퉁이라도 헐어보려다 프랑스 대통령한테 '국제 공조가 우선 아니냐'는 민망한 소리까지 들었다. 김여정은 이걸 '국제적 구걸질'이라고 상스럽게 표현했다.
문제의 근원은 '북한 핵 문제'와 '남북 관계'를 별개의 문제로 보는 이 정권의 착각에서 비롯됐다. 이 착각은 북한 핵무장 문제의 당사자는 한국이 아닌 미국과 북한이라는 더 큰 착각을 낳았다. 북한의 핵 위협 아래 살면서도 자신의 당사자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결정은 연쇄 후유증을 다시 낳았다. 한국 대통령 자리는 운전석에서 조수석을 거쳐 미·북 회담 결과를 회담장 밖에서 기다려야 하는 처지로 격하(格下)됐다. 미국과 북한은 한국이 미·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미국과 북한에 각기 다른 말을 전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신뢰 저하(低下)로 중개인 자격마저 흔들리는 처지다. 김정은 남매의 폭언과 폭력 시위는 북한 핵 문제와 남북 문제라는 맞물려 돌아가는 두 톱니바퀴에 낀 한국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이 개성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뒤 현 정권의 외교 문제 브레인들이 청와대에 모였다. 현재의 파국(破局)을 불러들인 아이디어를 대통령에게 심어준 사람들이다. '북한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기회를 만들자'는 그들의 결론은 그대로 대통령 소신(所信)이 됐다.
미국이 정말 북한 핵무장 문제의 제1 당사자일까. 미국은 동맹국 한국의 안보를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국익(國益)이란 저울에 달아보고 미군을 증파(增派)할 수도 있고 뺄 수도 있다. 미국은 자신이 만든 핵 확산 방지 체제를 흔드는 북한의 핵 보유를 저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과 미국 국민에게 임박(臨迫)한 위험은 아니다. 미국은 1962년 코앞의 쿠바 핵무기를 제거하기 위해 소련과의 핵 전쟁을 무릅썼던 나라다. 행동 개시에서 작전 완료까지 13일이 걸렸다. 미국은 핵심 이익과 직결된 중동 지역 이라크의 핵 보유 위험이 커 보이자 침공을 서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미국이 북한 핵무장으로 자신들의 안보가 직접적이고 현저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했다면 북한 핵 문제 해결이 25년간이나 지지부진했겠는가.' '대화로든 그것이 안 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해결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북핵의 당사자가 한국 말고 누가 따로 있겠는가.'
북한의 이번 협박과 위협은 핵 보유국이 핵 없는 나라를 압박하는 전형적 수법이었다. 북한의 본심은 미국과 핵무기 제거가 아니라 핵 군축(軍縮)을 논의하는 것이다. 그것이 김정은의 망상(妄想)이라면, 북한이 원하는 대로 들어주면 스스로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통령의 몽상(夢想)이다. 적(敵)의 망상과 내부의 몽상이 만나면 무서운 일을 비켜갈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강천석 논설고문, 조선일보(20-06-20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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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정권 '창조물'이라는 트럼프·김정은 '가짜 춤판'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회고록에서 비핵화를 둘러싼 "미·북 외교는 한국의 창조물"이라고 썼다고 한다.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포함한 북핵 외교가 북핵 폐기를 위한 진지한 논의보다는 "한국의 '통일 어젠다'에 더 많이 관련됐다"는 것이다. '통일 어젠다'라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남북 이벤트'를 말한다. 볼턴의 말은 북핵 협상이 핵 폐기 시한·방법·원칙 등 본질적 문제를 논의하는 대신 한국 정부가 마련한 트럼프·김정은 회담 쇼 위주가 돼버렸다는 뜻이다. 볼턴은 그 결과 싱가포르에서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낚였다(hooked)"고 했다. 이를 '판당고(춤판)'라고 불렀다.
실제 미·북 정상회담은 2018년 3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평양에서 김정은을 만난 데 이어 워싱턴으로 달려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상회담 제안 의사를 전달함에 따라 성사된 것이다. 정 실장이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확고하다"고 보증을 선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실제 김정은이 정 실장에게 말한 것은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었다. 이 말은 북한이 20년 이상 해오고 있는 것으로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과장되게 전달한 것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비핵화'는 주한미군과 미국 핵 억지력의 철수를 전제로 한 '한반도 비핵화'다. 북핵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폐기(CVID)를 뜻하는 미국의 비핵화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개념이었다. 북핵 폐기를 하려면 비핵화 개념부터 정리하고 그 후에 북핵 시설 신고와 폐기, 검증 절차를 합의해야 한다. 김정은은 이럴 생각이 전혀 없다. 미국 정보 당국자 전원과 볼턴,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외교 안보에 문외한이면서 공부조차 하지 않는 트럼프는 한국 정부가 전하는 김정은의 말을 믿고 '낚인' 것이다.
핵을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김정은과 '내가 북핵을 없앤다'는 트럼프가 아무런 비핵화 실무 과정 없이 무턱대고 마주 앉았다. 김정은은 트럼프를 낚아 제재를 해제하고, 트럼프는 제 자랑을 하고, 한국 정부는 남북 쇼를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국 정부가 '김정은 비핵화 의지'라는 있지도 않은 환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게 환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나자 트럼프는 하노이에서 미·북 협상판을 걷어찼고, 김정은은 이제 분풀이를 하고 있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문 대통령 말대로 했는데 이게 뭐냐'는 것이다.
핵실험을 한 국가 중 스스로 핵을 포기한 나라는 한 곳도 없다. 김씨 왕조는 주민 수십만을 굶겨 죽이면서 핵을 개발했다. 핵 보유 때문에 자신이 죽을 정도가 아니면 핵을 포기할 리가 없다. 이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김정은 비핵화 의지'를 선전한 것은 속은 것인가, 아니면 알고도 그런 것인가. 이 상황에서도 정권 인사들은 지금 문제의 근원인 북핵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남북 쇼만 하자고 한다. 그렇게 모래성을 또 한 번 쌓아본들 그게 얼마나 가겠나.
-조선일보(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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