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 전략
민주당은 ‘이 모든 게 이명박 탓, 박근혜 탓’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으니 문재인 대통령은 책임 하나는 확실히 질 것으로 생각한 국민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정권에선 '대통령이 안 보인다’고 한다. 책임이 명백한 일에도 대통령은 침묵하거나 아예 사라진다는 것이다. 청와대 비서실이 경찰까지 동원해 일사불란하게 ‘대통령 30년 지기’를 울산시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공작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심각한 사건으로 대통령 측근이 줄줄이 기소됐다. 대통령이 모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금까지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것은 역으로 이것이 문 대통령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뜻이라고 유추할 뿐이다.

▶문 대통령을 '형'이라 불렀다는 유재수씨가 뇌물을 수천만원 받았는데 청와대 특감반 조사를 빠져나가고 오히려 영전까지 했다. 예상대로 정권 실세들의 구명 로비가 드러났다. 그런데 대통령은 유감 표명 한번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문 대통령을 쳐다보는데 정작 본인은 먼 산을 쳐다보며 딴소리만 한다. 박원순·오거돈의 ‘권력형 성범죄’도 국민은 대통령의 생각이 궁금했으나 역시 먼 산 보며 침묵했다. 마치 대통령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았다.
▶침묵 아니면 유체 이탈 화법이 나온다.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조국씨를 임명해 국민을 쪼개놓은 문 대통령은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했다. 불공정과 반칙의 주인공들을 잇달아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고선 청년들에게 “공정”을 37차례 강조했다. 인사·경제정책 실패가 이어졌지만 사과한 적 없이 남 탓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도 했다. 자신의 기록관을 짓기로 하고 의사봉까지 두드렸는데 문제가 되자 ‘불같이 화를 냈다’며 아랫사람을 탓하는 식이다.
▶문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우리 공무원을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운 북한의 만행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공무원이 실종된 지 일주일 만이고, 처음 보고받은 지 125시간 만이었다. 북한군 만행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10시간 동안 대통령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새벽에 청와대에서 긴급 회의까지 열었는데 대통령만 몰랐다고 한다. 이 거짓말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통령은 모르는 것으로 하자고 했을 것이다. 야당이 ‘대통령을 찾는다’는 1인 시위도 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의 ‘실종 전략’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동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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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이 하수처리장인가
북한이 지난 25일 통지문을 통해 밝힌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의 사살·소각 사건의 전모는 많은 사람을 갸우뚱하게 했다. 북한의 일방적인 사건 설명은 우리 군이 첩보 수집을 통해 밝힌 사실과 너무 달랐고 의혹투성이였다. 북측 선박이 A씨와 80m 떨어진 곳에서 말을 주고받았다거나, 비무장 상태인 A씨가 도주해 50m 밖에서 총을 쐈다는 얘기는 궤변에 가까웠다. 오히려 “북측이 방독면·방호복을 갖춰 입고 A씨에게 접근해 총살한 뒤 시신에 기름을 붓고 태웠다”는 우리 군의 첩보 보고가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전면 부정하자 군은 납작 엎드렸다. 군 고위 관계자는 북한의 주장과 우리 군 첩보가 다르다는 지적에 “우리 정보를 객관적으로 다시 들여다볼 예정”이라고 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다시 관련 자료를 보겠다”고도 했다. 스스로 수집한 첩보를 다시 보겠다며 자기 부정을 한 것이다. 군 내부에선 “북한의 일방적 주장에 우리 군 첩보를 다시 꿰맞추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자조 섞인 얘기가 나왔다.
청와대와 정부 쪽에선 27일 북한이 통지문을 보낸 직후부터 공공연하게 군에 책임을 넘겼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군이 미숙한 상황 판단으로 상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며 “북한의 통지서 내용을 보니 우리 군의 첩보 내용이 부정확하다”고 했다.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28일 “북한이 A씨를 구조하는 줄 알았다”고 했다. 군의 초기 판단 잘못이 있었다고 고백한 셈이다. 그사이 청와대와 통일부, 국정원 등은 모두 뒤로 빠졌다. 청와대는 군으로부터 사살·소각을 보고받았으면서 책임이 없는 듯 모른 척했다. 북한과 연락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원은 국민적 지탄이 쏟아질 때 내내 숨어 있다가 북한 통지문이 도착하자 제일 먼저 나서서 생색을 냈다. 우리 국민을 지키기 위해 북한과 소통해야 했던 통일부도 남북 간 연락선이 없다며 빠졌다. 군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모양새다.
현 정권 들어 중대한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군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황제 휴가’ 의혹이 제기되자 여권에선 “군에서 행정처리를 잘못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청탁한 사람은 잘못이 없고, 이를 매끄럽게 처리 못한 일부 군 간부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검찰이 본격적으로 나서기도 전에 이미 “군에서 책임지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는 말까지 돌았다. 결국 검찰은 28일 실제로 청탁한 보좌관과 추 장관 아들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내리고, 군 간부만 군 검찰에 송치했다.
정부는 코로나 대책 등을 위해 추경을 편성할 때마다 국방비를 수천억원씩 삭감했다. 군 내부에선 “우리가 봉이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한마디 항변도 못했다. 결국 군이 이 정권의 하수처리장이 됐다는 비아냥을 자초한 것이다.
-양승식 정치부 기자, 조선일보(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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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참사가 대통령 치적으로 바뀌는 마법
소셜미디어·검색 통한 뉴스
사람마다 다른 ‘현실상’ 제시
실리콘밸리조차 민주주의 걱정
우리는 포털 출신이 여론 관리
‘대통령님 진짜 어떻게 하신 거임, 북이 이 정도로 성의 있게 사과·반성·재발 방지 약속까지 풀세트로 한 적 없었음’(별난놈) ‘김정은 사과 수위가 의외로 높아 놀랐다. 역시 문프!’(Evergreen). 일부 여권 지지자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서해상에 표류하던 우리 국민이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졌는데, 이들은 북의 사과를 더 반긴다. 통지문 한 장에 참사가 대통령 치적으로 바뀌는 마법이 벌어진 것이다. 여권 인사들의 ‘전화위복’이니 ‘계몽군주’니 하는 발언은 이런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정권 지지자들은 큰 이슈가 생기면 사안을 비틀어 유리하게 몰고가는 데 능하다. 김어준은 시신 훼손을 ‘화장(火葬)'이라 표현하더니, “북이 (코로나 때문에) 평소 같으면 환영했을 월북자 한 명 거둬줄 여유가 없다”고 했다. 총격 사망과 시신 훼손에 쏠리는 관심을 틀어 보려는 의도가 드러난다. 친여 성향 유튜브 ‘이동형TV’에선 출연자들이 웃어가며 시간대별 사건 정황을 짚어보기까지 했다. 이들은 아무리 위중한 사안도 희화화해 심각성을 휘발시켜 버리는 재주를 갖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발생한 세월호 참사나 지난해 조국 사태, 울산시장 선거 개입,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 병역 비리 등에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여론 형성 과정에 사실(fact)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일을 자주 경험하고 있다. 마치 하나의 현실이 있고, 이와 다른 현실이 또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세월호 침몰 배후설, 선거 부정 음모론 같은 이른바 ‘대안적 사실’에 심취한 이들도 많다. 물론, 대안적 사실은 대부분 허구다.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소셜딜레마’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실험이 하나 소개된다. 구글 검색창에 ‘기후변화’(climate change)를 입력해 사람·지역에 따라 얼마나 다른 연관 검색어가 제시되는지 조사했더니 어떤 이에겐 기후변화의 연관어로 ‘거짓말(hoax)’이 추천되고, 다른 이에겐 ‘환경운동’, ‘지구 파괴’ 같은 단어가 나왔다. 이용자별로 최적화된 검색 결과를 찾도록 만들어진 알고리즘 덕분인데, 이는 맛집 검색이나 영화 추천에는 도움이 되지만, 뉴스까지 이런 식으로 접하면 다른 견해를 접하지 못하는 상황에 갇히게 된다.
매스미디어의 경우, 독자나 시청자가 최소한 같은 조간 신문, 같은 저녁 뉴스를 본다는 전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검색과 소셜미디어로 뉴스를 접하는 이들은 보는 내용이 다른데도 같은 뉴스를 본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된다. 김어준의 ‘화장’ 발언에 ‘좋아요’를 누른 사람들에게 고(故) 백선엽 장군 추모 뉴스는 백만 광년이나 떨어진 뉴스인 셈이다. 어느덧 우리는 같은 시간대에 존재하면서도 만날 수 없는, 여론의 ‘평행 우주’에서 살아가고 있다.
미국에선 소셜미디어를 통한 뉴스 소비가 가져올 위험성을 놓고 청문회가 집중적으로 열렸다. 민주주의의 퇴보를 걱정하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상황을 활용하는 데 더 혈안이다.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출신들은 유명세를 기반으로 지상파 메인 MC를 꿰찼고, 포털 임원 출신들은 청와대에 참모로 들어갔다. 지금은 여당 의원이 된 네이버 출신 윤영찬 전 국민소통수석의 ‘카카오 너무하군요, 들어오라 하세요’ 메시지는 이 정권이 여론을 어떻게 다뤄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소셜딜레마’에는 구글·페이스북에서 일했던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이 직접 출연한다. 자기 손으로 페이스북에 ‘좋아요’ 버튼을 만들고,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을 설계한 이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만든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대해 "독재자나 권위주의자 손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고 고백한다. 뭐든 ‘달님 덕분’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된 것 같다.
-신동흔 문화부 차장, 조선일보(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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