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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에겐 처칠이 필요하다] [‘종전선언’ 미몽에 빠진 靑] [주적을 주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뚝섬 2020. 10. 14. 06:24

[지금 우리에겐 처칠이 필요하다]

[‘종전선언’ 미몽에 빠진 靑]

[주적을 주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지금 우리에겐 처칠이 필요하다

 

남녘의 누구라도 사살할 수 있고 남한 전역 타격할 방사포 구축한 채 그 입에서 나오는 ‘사랑… 남녘 동포’ 그 말을 믿는가?

 

# 지금 대한민국은 제정신이 아니다. 코로나 때문도, 추미애 때문만도 아니다. 자국의 국민이 피살되고 소각당해도 멀뚱하니 쳐다만 보고 손 놓고 있다가 제대로 된 항의는커녕 그 진위조차 알 길 없는 낱장 통지문 한 통에 그나마 간접화법으로 담긴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계몽 군주’ 운운하며 감읍해 하지 않았던가. 어디 그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자국민 피살, 소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과 항의 성명은커녕 피살자 아들의 애절한 공개 편지에 대해서마저 “해경의 조사 및 수색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메시지만 던져놓고서 또다시 종전 선언을 입에 올렸다. 그러자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 북한은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자정에서 새벽 3시까지 펼쳐진 퍼레이드를 통해 막대한 무력을 과시하며 종전 선언 운운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청와대를 옹색하게 만들었다.

 

/일러스트=김성규

 

# 비록 그들은 자위용이라 말하지만 공화국의 존재를 위협하면 언제든 선방을 날릴 수 있다고 분명하게 언명하는 것을 보고도 대한민국의 안위를 떠맡아야 할 대통령으로서 그토록 섣부르게 ‘종전 선언’을 입에 담았던 것이 부끄럽고 민망하지 않았는지 되묻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30분 가까운 연설 중에서 채 30초도 안 되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라는 한마디에 청와대와 여당은 또다시 고무되어 흥분하지 않았던가. 보기만 해도 지릴 만한, 대륙간탄도미사일 탄두에 장착된 핵을 머리에 이고 남한 전역을 타격하고도 남을 그 막대한 사거리의 수많은 방사포의 포구가 우리를 향해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은 외면한 채 남북 간의 새 물꼬 트는 것에 대한 기대로만 부풀어 있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 나치는 극적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야간에 집회를 갖곤 했다.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렸던 나치스 당대회가 신호탄이었다. 지난 10일 새벽의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를 보면서 나치와 히틀러가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히틀러의 신들린 듯한 장광설과 김정은의 만연체 연설도 어딘가 닮았다. 특히나 나치당원들의 감격에 벅찬 표정과 평양 시민들(그들은 물론 전부 노동당원일 게다)과 인민군대 군인들의 경외감에 사로잡힌 듯한 흐느낌은 거의 판박이 수준이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북한 노동당 창건일 퍼레이드를 편집도 없이 통째로 시청하게 되는 나라가 되었나? 도대체 여기가 대한민국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가? 문재인이 대통령인지 김정은이 최고 영도자인지 구분도 안 될 지경이다.

 

# 지금부터 80여 년 전인 1937년부터 1940년 당시 영국 수상이었던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1938년 9월 30일 체임벌린은 히틀러와 뮌헨 협정을 맺고 귀국해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의 친필 서명이 담긴 협정 서약서를 흔들며 “여기 우리 시대를 위한 평화가 있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탄하며 이 협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그 후 다시 6개월이 지나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마침내 전쟁 위기 속에서 평화를 지켜냈다던 체임벌린은 속수무책으로 1940년 5월에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 뒤를 처칠이 이었다. 체임벌린이 히틀러와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본 유화론자였다면, 처칠은 그런 위장 평화의 허울을 직시하고 히틀러와는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꿰뚫고 있는 인물이었다. 솔직히 문재인 대통령은 히틀러를 믿었던 체임벌린을 닮았다. 역으로 김정은 위원장은 이런 그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공 굴리듯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겐 처칠 같은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 영국 출신 배우 게리 올드먼에게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에서 올드먼이 분한 처칠은 이런 말을 남긴다. “우린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승리가 없으면 생존도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처칠은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에 고립된 영국군 40만명을 나치의 포위망을 뚫고 극적으로 탈출시킨다. 그리고 그는 영국 국민에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고 마침내 이긴다. 윈스턴 처칠이 말하지 않았던가. “계속 싸워 나가는 나라는 다시 일어서고, 소리 없이 항복한 나라는 그것으로 끝장이다.”

 

# 어쩌면 우리는 지금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단 한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지켜낼 수 있는 한 지켜냈어야 마땅하거늘 무자비하게 피격당하는 것을 빤히 보면서도 손 놓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로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면 과장된 것일까? 아니다.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의 존립 가치는 북한이 자신들의 보건적 차원에서의 존립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피격하고 소각했던 그 한 생명을 지켜내는 데 있었다.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남녘의 누구라도 조준 사살하고 소각할 수 있는 이들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있고, 우리 모두를 공멸시키고도 남을 핵을 우리 머리 위에 얹어놓은 채 남한 전역을 언제라도 타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방사포를 곳곳에 깔아놓은 자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이란 말은 입에 발린 말일 뿐이다. 역사는 반복하진 않지만 분명한 교훈이 있다. 히틀러와의 협정서가 휴지 조각이 되었듯이, 김정은과의 그 어떤 약속도 그의 핵미사일과 방사포 앞에서는 의미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겐 더욱더 히틀러와 손잡으려 했던 체임벌린이 아니라 그에 맞섰던 처칠 같은 인물이 절실한 것이다. 아, 우리의 처칠은 어디에 있는가!

 

-정진홍 컬처엔지니어, 조선일보(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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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미몽에 빠진 靑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23일 새벽 화상으로 진행된 유엔 총회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의 시작은 종전(終戰) 선언"이라며 미·북에 종전 선언을 제안했다. 북한군이 서해에 표류 중이던 우리 국민을 총살한 뒤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지 몇 시간 뒤였다. 당시 안보실장이 주재하는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지만 이 연설은 그대로 방송됐다. 청와대는 “미리 녹화해 보낸 영상이고, 순서를 조정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며칠 뒤 한·미 친선단체 화상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다시 미국에 종전 선언을 제안했다.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조야에서도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청와대는 “지도자가 평화를 얘기하는 것이 잘못이냐”며 “소모적 논란”이라고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피살된 국민의 아들이 보낸 편지에 “나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지만 북에 대한 구체적 조치는 없었다. 국민 피살 사태는 종전 선언보다 한참 후순위라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었다.

 

지난 10일 북 열병식에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공개되자 민주당은 “다시금 종전 선언의 필요성이 확인된 것”이라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했다. 또 “종전 선언은 피격 사건 같은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강력 수단”이라고 했다. 통일부는 국정감사에서 ‘선(先) 종전 선언, 후(後) 비핵화’를 추진하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종전 선언을 추진했었다. 하지만 미국이 동맹 약화를 우려하면서 백지화됐다. 그 후 13년이 흘렀지만 문 대통령은 여전히 종전 선언이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줄 ‘요술방망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종전 선언은 ‘사실상의 종전’을 ‘법적 종전’으로 전환할 평화협정의 전 단계다. 하지만 북한이 ‘제재·코로나·수해’라는 삼중고(三重苦) 속에서도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무리한 종전 선언을 추진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경계 목소리가 크다. ‘전쟁 종결’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 또는 유엔군사령부를 없애자는 주장이 나와 우리 안보에 큰 구멍이 날 수 있다.

 

“전쟁이 종결됐다”며 상호 의지를 말로 확인하는 ‘사실상의 종전 선언’은 그간 충분히 많았다. 노무현 정부 때 남북은 9·19 공동성명(2005년), 남북정상선언문(2007년) 등을 통해 정전 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쓰자고 약속했다. 재작년 싱가포르에서도 미·북 정상이 비슷한 합의를 했다. 하지만 북한이 도발을 자행하고 핵 개발에 매달리면서 그때마다 휴지 조각이 됐다.

 

북한은 우리 국민을 불태워 죽였고 열병식에선 남한을 겨냥한 ‘신무기 4종 세트’도 공개했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여권은 ‘종전 선언’만 하면 북핵과 ICBM이 사라지고 죽은 국민이 되살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호도하며 자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은중 정치부 기자, 조선일보(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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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적을 주군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 하나 그녀를 쳐다보거나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희생시키고 나서 더럽고 쓸모없는 물건처럼 내던진 무리들이 그녀를 멸시하고 있었다. 굶주린 이리 떼같이 그들이 먹어 치운 음식이 가득 담겨 있던 커다란 바구니가 떠올랐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 애썼으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란을 다 먹은 민주주의자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기 드 모파상 ‘비곗덩어리’ 중에서

 

지난 10월 10일, 북한이 노동당 창당 기념식을 했다며 뉴스마다 요란하다. 불과 며칠 전 우리 국민을 사살·소각한 김정은이 ‘사랑하는 남녘 동포’라고 했단다. 그게 감동이었을까,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없어 아쉬웠던 탓일까? 몇몇 방송사는 김일성 광장에서 야밤에 벌어진 괴이한 행사를 중계했다. 적에게 자국민이 총살당했는데도 종전 선언을 하자는 권력자 치하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1880년에 발표한 소설 ‘비곗덩어리’는 공짜로 누린 행운일수록 그 쓸모가 다했을 때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인간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전쟁 지역을 벗어나려고 마차에 탄 승객들은 엘리자베스가 비곗덩어리 소리를 듣는 매춘부임을 알고 껄끄러워하지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다.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 싫다는 그녀를 적군 장교의 침실에 들여보낸다. 그 대가로 자유를 보장받게 되자 고마워하기는커녕 불결하다는 듯 그녀에게 모멸감을 주고 음식조차 나눠 주지 않는다. 엘리자베스를 원한 건 장교가 귀부인들을 존중하는 신사이기 때문이라며, 자기들을 인질 삼은 적군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들이었다. 민주주의 투사라는 사내야말로 휘파람을 불며 그녀의 희생과 눈물을 한껏 비웃는다.

 

언제부터였을까? 주적을 주군 모시듯 한다. 품 팔고 머리카락 팔아서, 사막과 전쟁터를 뛰어다니며 피와 땀으로 지켜낸 풍요와 자유를 누린 자들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진 인질들처럼, 몸과 마음을 바쳐 북한을 흠모한다. 헬조선이라는 조롱과 함께 내팽개쳐진 대한민국, 승객들을 살렸지만 경멸당한 엘리자베스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김규나 소설가, 조선일보(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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