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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 선언] [ .. 이스라엘 건국 지원 받아냈다] ....

뚝섬 2025. 5. 15. 06:20

[이스라엘 건국 선언]

[1차 대전 때 영국 구하고, 이스라엘 건국 지원 받아냈다] 

[금융 명문 로스차일드-세계가 그들 손에]

 

 

 

이스라엘 건국 선언

 

나는 1948년 5월 15일 갈릴래아 호수 앞에 서 있다. 어제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언이 있었고, 곧바로 아랍 국가들과 건국 전쟁에 빠져들었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과 이슬람 세계 간의 재앙은 2025년 5월 15일까지 이르는 동안 수억 겹 원한(怨恨)의 뒤죽박죽 ‘지옥 상태’가 돼버렸다. 향후 500년 안에 저 둘이 지속적 합의나 화해를 이뤄낼 거라고 믿기는 어렵다.

 

이스라엘 건국일을 이왕 언급한 마당에, 일반적이지만 너무 일반적이기에 ‘특히 우리가’ 망각해 왔는지도 모르는 국가, 특히 ’근대 국민국가(modern nationstate)’라는 것에 대한 진실을 ‘극도로’ 간단히 확인해 볼 수 있겠다 싶다.

 

유대인들은 대략 2000년간 나라 없이 떠돌았다. 돈과 재능이 있다고 해도 멸시받고 짓밟히고 몰살당하고 불태워졌다. 독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전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거의 다 그랬다. 유대인들이 그런 참혹에서 벗어난 것은 그들의 근대국가 ‘이스라엘국(구약성서의 이스라엘왕국과는 다른)’을 세운 뒤 그것을 지키고 발전시킨 다음부터다. ‘민족’만으로는 절대로 가질 수 없던 이 혜택(?)은 이스라엘 안에 사는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 유대인들이 함께 누리고 있다.

 

국가는 철저히 ‘인공물(人工物)’이다. TV나 자동차처럼 사람들이 공업적으로 만든 거라는 뜻이다. 당연하게 살다 보면 국가를 태고적부터 존속해 온 생물적 공동체처럼 착각하기 마련이다. 삼성전자보다 가난한 국가는 많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군대’가 없고 ‘국경(國境)’을 강요할 수가 없다. 3300만명가량의 쿠르드족이 지옥 같은 시련 속에서도 기어코 자신들의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려는 것도 유대인들이 그랬던 이유와 같다. 원래 안 그런 국가는 없다.

 

20세기에 생겨난 국가는 130국 이상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소멸한 국가는 50국가량이다.이게 비극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이해하는 ‘생기초’다. 국가에 대한 막말로 지식인인 척 멋부린들 이 팩트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이응준 시인·소설가, 조선일보(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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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 때 영국 구하고, 이스라엘 건국 지원 받아냈다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이스라엘의 國父,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

 

1차 대전 당시 거의 모든 나라가 화약 원료로 칠레산 초석을 수입해 사용했다. 그러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은 칠레로부터 초석을 들여오지 못하게 됐다. 영국에 비상이 걸렸다. 이제 화약과 포탄을 만들 수 없으니 꼼짝없이 전쟁에 지게 생긴 것이다. 초석 없이 화약을 만드는 방법이 있기는 했다. 아세톤이 있으면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아세톤은 쿠바에서 설탕을 만들고 난 사탕수수 찌꺼기를 발효시켜 만들었기 때문에 그 원료조차 얻기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영국은 밤나무 등을 밀폐 용기에 넣고 끓이면서 그 증기를 모아 아세톤을 만들었는데 이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아세톤 양이 너무 적었고 나무도 무한정 베어낼 수 없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때문에 목재 수입도 어려웠다.

 

이때 영국을 구한 이가 유대인 생화학자 차임 바이츠만이다. 1915년 군수부 장관 로이드 조지로부터 연구 의뢰를 받은 그는 산소 없이도 증식하는 미생물을 이용해 녹말로부터 아세톤과 부탄올을 대량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 3만t의 아세톤을 생산함으로써 영국을 위기에서 구했다. 이 공로로 로이드 조지는 이듬해 수상 자리에 올랐으며 바이츠만은 일약 영국인들의 영웅이 되었다.

1921년 4월 시오니스트 운동 기금 마련 활동을 위해 뉴욕에 도착한 차임 바이츠만(오른쪽에서 둘째)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왼쪽에서 둘째), 벤-시온 모신슨(왼쪽), 메나켐 유시슈킨 등 동지들과 함께 카메라 앞에 섰다. 1차 대전에 휘말린 영국에 결정적 도움을 주며 밸푸어 선언의 초석을 다진 바이츠만은 1948년 건국한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지금까지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러시아서 15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1874년 러시아 서부의 촌락에서 15명 중 셋째로 태어난 차임 바이츠만은 고등학교 졸업 후 독일로 떠나 베를린 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그의 지도교수가 1897년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으로 옮겨가자 그를 따라가 유기화학 박사 과정을 계속했다. 바이츠만은 이듬해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제2차 시오니즘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기 전에 교육기관부터 설립하는 게 순서라고 생각했다. 바이츠만은 1901년 스물일곱 살에 스위스 제네바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그해에 열린 제5차 시오니즘 회의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에 고등교육기관을 먼저 설립하자며 특히 이공계 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서를 제출했다. 바이츠만의 아이디어가 나중에 테크니온 공대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1904년에 영국으로 건너와 맨체스터대학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후 바이츠만은 110개에 달하는 특허를 취득할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1910년 바이츠만은 설탕을 인조고무의 원료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박테리아를 찾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우연히 설탕을 아세톤으로 바꾸어주는 박테리아 ‘클로스트리듐 아세토부틸리쿰’을 발견했다. 그는 박테리아 발효를 통해 아세톤, 부탄올, 에탄올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바이츠만 공정’ 기술이 아미노산, 비타민, 항생제 등을 대량생산하는 발효 산업 성장을 가져왔다. 이는 기존 화학적 합성에 의해 생산되었던 물질을 생물학적 방법으로 생산하는 합성 생물학 시대를 열었다. 이후 유전자의 유전정보를 바탕으로 생명 현상 자체를 인간의 힘으로 합성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발전했다. 바이츠만이 생명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로이드 조지 총리는 바이츠만에게 적절한 보상으로 보답하려 했다. 그러나 바이츠만은 개인적 보상 대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수상은 바이츠만이 제안한 문제를 외무부 장관 아서 밸푸어와 의논했다. 마침 밸푸어도 라이어널 로스차일드로부터 이 문제를 집요하게 요청받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1917년 ‘밸푸어선언’을 이끌어냈다. 영국 외무장관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1930년 함께한 바이츠만(오른쪽)과 밸푸어 전 영국 외무장관. /게티이미지코리아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 나오자마자 유대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과 하이파에 각각 대학을 세운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 전쟁의 폐허로 인구도 몇 안 되는 황량한 예루살렘과 하이파에 미래를 내다보고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를 세운 것이다. 당시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인구는 고작 5만6000명이었다. 유대인들은 대학이 먼저 만들어져야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고 그래야 국가도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히브리 대학과 테크니온 공대를 세움으로써 그들의 국가 건설 의지를 만천하에 공표했다. 이는 세계 각국의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가 건설되어야 한다는 시오니즘 운동의 강렬한 불씨가 되었다.

 

1920년 시온주의기구 의장이 된 바이츠만은 아인슈타인과 함께 전 세계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돌며 대학 설립 기금을 모금했다. 히브리 대학은 처음에는 연구기관으로 시작해 1923년부터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등이 이곳에서 가르쳤다. 아인슈타인은 최초로 히브리어로 강의했다. 1925년 캠퍼스가 완공되어 화학, 미생물학, 유대민족을 연구하는 3개 연구기관으로 정식 개교했다. 개교식에는 밸푸어 외무장관 등 영국의 고위 인사들도 참석했다. 그 뒤 히브리 대학은 4곳에 캠퍼스를 두고 아인슈타인을 포함해 노벨상 수상자 8명과 총리 4명을 배출한 명문으로 성장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설립을 주도한 테크니온 공대는 1924년에 개교해, 4차례 중동전쟁 기간 무기 개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창업 국가로 발전하는 데도 크게 공헌했을 뿐 아니라 하이테크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바이츠만은 과학이야말로 장래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수단으로 보았다. “나는 과학이 평화와 젊음의 갱신을 모두 이 땅에 가져와서 새로운 영적, 물질적 삶의 샘을 만들어 낼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과학 연구에 헌신하기 위해 1934년 예루살렘에서 53㎞ 떨어진 르호보트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주로 유기화학 분야를 연구했다. 이후 연구 분야를 넓혀 1954년에는 세계 최초 컴퓨터 중 하나인 ‘WEIZAC’을 제작했으며, 1958년에는 연구소 내에 파인버그 대학원을 설립해 이스라엘 최초로 컴퓨터 과학을 가르쳤다. 컴퓨터와 위성으로 제어되는 무인항공기와 미사일방어체제 아이언돔 개발의 토대가 이때부터 마련됐다. 오늘날 바이츠만 연구소는 화학, 물리, 컴퓨터사이언스, 생물학, 수학 등 5개 기초과학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바이오산업 분야에 강하다.

 

이스라엘 국기를 배경으로 서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 차임 바이츠만. 그는 건국 이듬해인 1949년 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됐으며 취임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박테리아 이용한 생명공학의 아버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되었고 바이츠만은 이듬해 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2년 73세의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답신에서 “내 조국 이스라엘로부터 이 제안을 받고 나는 깊은 감동을 느낌과 동시에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나는 지금까지 줄곧 객관적인 문제만을 다루어 왔습니다. 따라서 사람을 적절히 다루고 공적인 직무를 수행해나갈 타고난 재능과 경험이 모두 부족합니다”라며 사양했다. 이스라엘 대통령 자리가 공석이 된 건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이 재임 3년 만에 78세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과학이야말로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바이츠만의 믿음이 오늘날의 과학 강국 이스라엘을 만들었다.

 

[유대인 박해가 시온주의로] 유럽서 설 자리 좁아져 “유대인 국가만이 살 길”

 

1880년대 러시아에는 전 세계 유대인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50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1881년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후 매년 5만여 명의 유대인이 러시아를 탈출해 프랑스, 독일, 미국 등으로 향했다. 특히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는 프랑스에는 12만 명의 유대인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이 발생했다. 무고한 유대인을 상대로 한 간첩 조작 사건이었다.

 

당시 헝가리 태생 유대인 헤르츨이 빈 ‘신자유신문’ 파리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때 그는 유대인은 기독교로 개종하여 유럽 사회에 완전히 동화 흡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1894년의 드레퓌스 사건을 목도한 헤르츨은 1896년 ‘유대인 국가’라는 책을 발간해, 유대인 문제는 오직 유대민족 국가 창건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시온주의의 태동이었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즘 대회가 열렸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2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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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명문 로스차일드-세계가 그들 손에

 

미국 움직여 1차대전 참전시키고… 이스라엘 세울 땅 80%를 샀다 

궁전 같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국 여름별장-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의 전쟁통에 한발 앞선 정보력으로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이후 유럽 각국의 공채 발행을 맡으면서 국제 채권시장을 창출했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를 만들었다. 영국 버킹엄셔의 워데스던 저택(Waddesdon Manor·사진)은 세계 금융을 호령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위세를 보여주는 유산으로, 지금도 매년 40만명 안팎의 관광객이 찾는다. 내부엔 냉·온수 수도와 전기 등 당대 최고 기술이 적용됐는데, 1890년 저택을 방문한 빅토리아 여왕이 전구 샹들리에에 감명받아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면서 10여 분을 보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위키피디아

 

1815년 워털루전쟁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의 셋째 아들 네이선은 영국 정부에 대한 최고 채권자이자 영란은행의 최대 주주가 되어 공채 발행 실권을 장악했다. 이는 곧 영국의 통화 공급량과 채권 금리를 로스차일드가 좌우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1817년 프로이센은 런던 로스차일드가 프로이센 공채 발행의 주간사 은행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유럽 각국이 로스차일드에게 공채 발행을 의뢰했다. 이로써 런던 채권시장이 글로벌화에 성공했다. 그 무렵 프랑스 혁명 이후 폐위됐던 왕들이 복귀하는 과정에서 많은 전쟁이 일어나 각국에서 전쟁 채권이 대량 발행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런던의 유대 금융인들이 이를 사들이며 채권 가격이 오르자 시중금리는 떨어졌다. 이렇게 채권시장이 활성화되어 유럽 전역과 러시아가 하나의 채권시장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제사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 국제 채권시장의 창출이다. 이는 저금리 환경으로 이어져 영국의 산업혁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토대가 되었다. 

 

투자자로 가득한 19세기 런던 주식시장-19세기 초 런던 증시를 묘사한 판화. 로스차일드가 영국을 사들였다’는 말을 듣게 되는 시기다. /위키피디아 

 

세계 자본시장을 금본위제로 견인

 

유럽 주요국에 진출한 로스차일드 다섯 형제는 한 몸처럼 움직였다. 이 점이 유럽 전체를 묶는 글로벌은행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금융의 역사를 보면, 워털루 전쟁이 끝난 1815년부터 금융시장이 세계화되었고 주식시장이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로스차일드 상사의 글로벌화는 많은 것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대인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로스차일드가 아예 게임의 룰을 바꿨다고 했다. 금융 중개 업무 수준의 은행이 아니라 외환시장의 국가 간 장벽을 허물어 금융시장의 성격을 글로벌하게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이후 로스차일드는 세계의 금광들을 사들여 국제 금 가격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영국을 1819년 세계 최초의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서구 전체를 금본위제로 끌어들였다. 1872년 독일을 필두로 1878년 프랑스, 1879년 미국, 1881년 이탈리아, 1897년 러시아를 금본위제에 합류시켜 세계 주요국들을 모두 금본위제 국가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화폐 발행과 금 가격 등 중요 결정권을 그들이 주도했다. 이후 로스차일드 가문은 각국 통화를 상품으로 보고 형제들 간 네트워크를 활용해 무위험 차익거래로 꾸준히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외환 시세를 주물러 환차익을 얻는 투기에도 열을 올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산업혁명 전파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폴레옹전쟁이 끝난 후 10년간 전후 복구 사업과 산업혁명에 필요한 자본 조달을 위해 이전 100년 동안의 유가증권보다도 더 많은 양의 유가증권이 발행됐다. 자본시장이 발달하자 저금리가 정착됐고, 투자가 활발해지며 산업혁명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후 그들은 대규모 자금이 드는 철도의 유럽 대륙 전파에 앞장섰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유럽 대륙 최초의 철도를 깔았다.

 

◇ J P 모건 가문과 美 연준 설립 참여

 

미국이 산업혁명 초기에 빨리 진입할 수 있었던 데에도 유럽 자본, 특히 로스차일드 자본의 덕이 컸다. 당시 미 정부 국공채는 물론 제2 미합중국은행 주식의 많은 양을 그들이 샀다. 이렇게 많은 양의 미국 채권과 주식을 사들이자 1837년 미국 피바디 은행이 미국 상업은행 최초로 런던에 문을 열고 거래를 중개했다. 훗날 이 은행의 공동 경영자로 참여했다가 런던 피바디 은행을 인수한 사람이 J P 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모건이다. 이렇게 로스차일드 가문과 JP 모건 가문의 관계가 시작됐다. 그 뒤 런 던 로스차일드가 JP 모건과 합작 설립한 지주회사 노던증권이 미국 산업과 금융의 돈줄이 되었다. 1913년 JP 모건이 주도한 미국 연준 설립에도 로스차일드계 은행들이 대거 참여했다. 

 

건국의 주역, 에드몽과 라이어널-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이 정착할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에드몽 로스차일드(왼쪽)와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건국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을 이끌어낸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오른쪽). /위키피디아 

 

1881년 러시아 국왕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했다. 조사 결과 암살범이 유대인 처녀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음이 알려지자 유대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이때 23만 명의 유대인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이후에도 유대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1882년 프랑스의 대랍비 사독 칸은 러시아 랍비 사무엘 모히레버를 데리고 에드몽 로스차일드를 찾아와 러시아의 참상을 전하며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해달라고 요청했다. 에드몽은 두말 않고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마이어 암셸의 아들 중 프랑스를 맡았던 막내 제임스의 아들이었다. 그 뒤 그는 은행 일은 형들에게 맡기고 본격적으로 시오니즘 운동에 뛰어들어, 팔레스타인에 모여든 유대인들을 뒤에서 도왔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66년 전인 1882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농장용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콜롬비아대학 사이먼 샤머 교수가 쓴 ‘두 명의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에 따르면, 이스라엘 영토의 80% 이상이 에드몽이 사준 땅이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벤구리온은 에드몽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유대인이 유랑민으로 지낸 2000년의 세월 동안, 에드몽 로스차일드에 버금가는, 또는 그와 견줄 만한 인물을 발견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의 카이사레아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에드몽의 무덤에는 이런 묘비명이 쓰여 있다. “이 땅의 아버지 에드몽 로스차일드 남작과 그의 부인, 하느님을 높이 받든 여인 아델하이드 남작 부인 여기 잠들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항복을 고려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 정가를 움직이는 미국 내 유대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영국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 라이어널 로스차일드와 비밀리에 회동,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했다. 그 결과 1917년 4월 2일 미국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에 이르고, 그로부터 불과 4일 만에 특별한 사유도 없이 미국은 1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 뒤 11월, 영국 외무장관 아서 벨푸어가 월터 로스차일드 경에게 편지를 보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정착지를 마련할 것을 호의적으로 숙고하며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이른바 ‘벨푸어 선언’이다. 하지만 이는 다급한 영국의 상충된 약속이었다. 영국은 1차 대전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맥마흔 서한’을 이미 1915년 아랍권에 전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비극은 이로부터 잉태되었다.

 

은행·본사 외부엔 명패도 안 달아

 

히틀러의 정치적 부상은 로스차일드 일가에 치명적이었다. 히틀러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빈의 로스차일드는 감옥에 갇혔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추방되었다. 프랑스 로스차일드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에드몽, 로벨, 앙리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국적을 박탈당하고 맨몸으로 추방당했다. 희생자도 나왔다. 프랑스 로스차일드 어머니 쪽 가문은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았고, 필립 남작의 아내는 유대인이 아님에도 수용소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렇게 나치에게 혼이 났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2차 대전 이후 철저히 베일 뒤로 숨었다. 그들의 은행과 본사 건물 외부에는 명패조차 달지 않는다. 이후 가문의 자산은 비밀주의에 가려져 아무도 그 실체를 모른다.

 

로스차일드 5형제의 대활약 

 

장남은 통일독일 재무장관

차남은 오스트리아 고위직

셋째는 세계 금융계 거물로

넷째는 이탈리아 금융 접수

막내는 프랑스 돈줄 흔들어 

 

마이어는 헤센-카셀 공국 군주 빌헬름 9세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자 다섯 아들들을 활용해 다국적 금융업을 운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다섯 아들을 유럽의 중요한 다섯 도시에 단계적으로 파견했다. 첫째 암셸은 프랑크푸르트 본가에 남겨두고 둘째 솔로몬을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으로 궁정에 집어넣었다. 셋째 네이선은 섬유 비즈니스를 위해 영국 맨체스터로 보내졌다. 다섯째 제임스는 파리로 보냈다. 그리고 로스차일드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빌헬름 9세의 재정자문관이었던 차남은 빈, 넷째 칼만은 나폴리로 가서 은행을 개설했다. 이것이 로스차일드 가문이 다국적 금융기업으로 탄생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다.

 

큰아들 암셸은 나중에 통일 독일의 초대 재무장관이 되었다. 차남 솔로몬은 빈에서 최고의 직위에 올랐고, 셋째 네이선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금융인이 되었다. 넷째 칼만은 이탈리아 금융을 장악했고 막내 제임스는 프랑스에서 공화정과 왕정에 걸쳐 금융계에 군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좌우명은 ‘화합(Condordia), 진실(Integritas), 근면(Industria)’이었다. 이는 유대교 경전 ‘토라’와 ‘탈무드’가 디아스포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가르치는 핵심 내용이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21-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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