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전쟁 끝나자 美 곡물 특수도 끝… ‘월가 위대한 곰’도 도미노 파산]
[평양의 러시아 정교회]
[부다페스트 메모랜덤]
[동방정교회]
[크림전쟁]
유럽 전쟁 끝나자 美 곡물 특수도 끝… ‘월가 위대한 곰’도 도미노 파산
[권오상의 전쟁으로 읽는 경제]
크림 전쟁의 경제적 파급효과
‘황제’ 나폴레옹 3세 외교 압박에…튀르키예, 1853년 러에 전쟁 선포
英, 佛 가세하며 국제적 분쟁 확대…
러 해상길 막혀 美 곡물-철도 호황 3년 만에 종전하자 美기업 줄파산…
1857년 세계 첫 금융위기 불러와
《1853년 11월 23일, 러시아 해군 중장 파벨 나히모프는 전열선 세 척, 프리깃 한 척, 증기선 한 척과 함께 흑해의 항구도시 시노프의 외해에 자리 잡았다. 당시 시노프에는 튀르키예 해군의 프리깃 일곱 척, 코르벳 세 척, 증기선 두 척이 정박해 있었다. 튀르키예는 약 한 달 전인 10월 1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 상태였다. 1839년 16세의 나이로 튀르키예의 술탄이 된 압뒬메지트 1세는 전적으로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압뒬메지트는 자신의 아버지인 마흐무트 2세가 시작한 개혁을 지속해 나갔다. 가령 세금을 공평하게 매기는 한편 차별 없는 징병제를 수립하고 새로운 화폐인 오스만 리라를 제정했다.》
압뒬메지트는 1845년에 시작된 아일랜드 대기근 때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아일랜드인들을 살리라며 1만 파운드를 기부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시기 평범한 영국인이 주급으로 받는 돈의 약 2만500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영국 여왕 빅토리아와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각각 2000파운드와 10파운드를 내놓았다. 영국은 여왕의 체면이 깎인다는 이유로 1만 파운드 중 1000파운드만 받았다.
튀르키예, 영국-프랑스 연합군과 러시아 간 크림 전쟁(1853∼1856년)의 계기를 만든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초상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프랑스어가 유창했던 압뒬메지트는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진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된 뒤 1851년 12월 군대의 힘으로 공화국을 뒤엎고 스스로 황제로 칭한 나폴레옹 3세, 즉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샤를 루이는 유럽을 지배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친조카였다.
작은 아버지와 닮은 점이라곤 이름이 전부인 샤를 루이는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기를 꿈꿨다. 이를 위해 그가 내놓은 구체적 방안은 튀르키예의 동방정교회 교인에 대해 프랑스 주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방정교회의 후견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1세로선 눈감아 줄 수 없는 도발이었다. 러시아를 상대로 함께 싸워주겠다는 영국과 프랑스의 꼬드김에 넘어간 압뒬메지트는 결국 전쟁을 선포했고, 크림 전쟁이 시작됐다.
수적으로 불리했던 나히모프 중장은 원군을 요청했다. 11월 27일 원군을 구하러 갔던 프리깃이 전열선 세 척, 프리깃 한 척, 증기선 두 척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사흘 뒤 나히모프는 휘하의 열한 척에 시노프 항구에 돌입하라는 명령을 했다.
겉보기엔 튀르키예 함대가 기댈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시노프의 해안 포대가 전투에 호응할 수 있었다. 또 이스탄불에는 마흐무디예 같은 전열선이 있었다. 128문의 포를 장비한 마흐무디예는 진수된 1828년부터 당시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군함이었다.
중요한 건 외견이 아니라 내실이었다. 러시아 군함의 포는 앙리조제프 펙상이 만든 거였다. 펙상은 프랑스의 공병 및 포병 사관학교로 세워진 에콜폴리테크니크를 졸업한 프랑스 해군 장교였다. 펙상 포의 포탄은 발사된 지 일정한 시간 후에 터졌다. 이는 포탄이 나무로 만든 적선의 안쪽으로 뚫고 들어간 뒤에 폭발한다는 의미였다. 반면 튀르키예 군함은 볼링공이나 다름없는 기존의 공 모양 포탄을 쐈다.
시노프 해전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열두 척의 튀르키예 함대 가운데 두 척이 침몰됐고 아홉 척이 좌초됐다. 증기선 한 척만 나포를 피해 겨우 이스탄불로 도망쳤다. 반면 러시아 함대는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튀르키예의 전황이 어둡자 1854년 3월 27일 과대망상에 빠져 있던 샤를 루이는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치어리더로만 남고 싶었던 영국도 다음 날 마지못해 참전했다. 물론 영국은 그해 8월부터 압뒬메지트에게 거액의 돈을 차례로 빌려줘 전쟁을 치를 무기를 사게 했다.
크림 전쟁이 시작되자 러시아의 해상 무역이 중단됐다.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봉쇄 때문이었다. 크림 전쟁 직전까지 러시아는 주로 곡물을 수출하고 소비재를 수입했다. 이는 러시아가 필요한 물품을 구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는 의미였다.
러시아에 희망이 없지는 않았다.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은 자신의 뿌리인 영국의 승전을 경계했다. 대외적으로 미국 정부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러시아를 돕겠다는 물밑의 움직임이 있었다. 가령 수십 명 이상의 미국인 외과의가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했고 미국 육군은 러시아군에 참관인 자격으로 장교를 파견했다.
크림 전쟁 동안 튀르키예, 러시아 양쪽에 리볼버 권총을 판 새뮤얼 콜트가 튀르키예 술탄 압뒬메지트 1세에게 선물한 금박 권총.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크림 전쟁은 일부 미국인에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일례로 새뮤얼 콜트는 전쟁 동안 러시아군에 대량의 리볼버 권총을 팔았다. 이미 두 차례 파산했던 콜트의 회사는 크림 전쟁 동안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콜트는 후대의 무기상에게 교본 같은 인물이었다. 일례로 1854년 콜트는 술탄의 이름이 새겨진 금박 권총을 압뒬메지트 1세에게 선물했다. 이어 흡족해 하는 압뒬메지트에게 러시아가 자기에게 권총을 대량으로 주문했다고 귀띔했다. 불안해진 압뒬메지트는 5000정의 콜트 권총을 주문했다. 콜트는 같은 수법으로 러시아로부터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고, 콜트 대령이 인간을 평등하게 만들었다’가 콜트의 마케팅 슬로건이었다.
크림 전쟁의 영향은 또 있었다. 미국의 증권시장이었다. 특히 곡물과 관련된 주가가 올랐다. 영국 때문이다. 전쟁 전에는 러시아 수출의 37%가 영국으로 갔다. 하지만 영국의 봉쇄로 러시아의 해상 무역이 중단되면서 영국은 곡물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야 했다.
한 수 앞을 내다보는 투자자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생산된 곡물을 수출하려면 일단 항구까지 실어 날라야 했는데, 그러려면 기존 철도의 가동률이 올라가고 운임 수입이 증가하기 마련이었다. 즉, 철도 회사가 곡물 회사 이상으로 유망해 보였다.
1837년 미국 금융 공황 당시 공매도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며 ‘월가의 위대한 곰’으로 불렸지만 크림 전쟁이 부른 1857년 세계 공황으로 파산한 제이컵 리틀.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러한 견해를 대표하는 사람이 제이컵 리틀이었다. 마흔 살 때인 1834년 자신의 증권 중개회사를 세운 리틀은 1835년 모리스 운하와 뉴욕 할렘 철도로 대박을 냈다. 가령 1834년 12월에 주당 10달러에 샀던 모리스 운하의 주가는 한 달 뒤 185달러로 뛰었다.
게다가 리틀은 1837년 미국에 금융 공황이 닥쳤을 때 공매도로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았다. 미국의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한 리틀의 별명은 바로 ‘거래소의 나폴레옹’, 그리고 ‘월가의 위대한 곰’이었다. ‘곰’이란 공매도로 돈을 불리는 증권 거래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855년까지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피해가 누적된 끝에 1856년 3월 돌연 크림 전쟁이 끝났다. 패배한 러시아는 약간의 영토를 잃었지만 승자가 얻은 건 미미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누리던 곡물 특수가 갑자기 사라졌다.
1857년 8월 미국의 가장 오래된 곡물 회사인 울프가 파산했다. 같은 달 오하이오생명보험신탁은 지급 불능에 빠졌다.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껍데기 철도 회사들에 오하이오생명보험신탁이 대출을 많이 해 준 탓이었다. 곧이어 일리노이센트럴, 이리 등의 철도 회사들이 도미노처럼 파산했다. 바로 1857년 금융 공황이다.
1857년 금융 공황이 이전보다 위기의 세기와 속도가 컸던 것은 바로 새뮤얼 모스가 1840년대에 설치한 전신 때문이었다. 미국 국내로 끝나지 않고 영국으로도 옮겨 붙은 1857년 금융 공황은 최초의 글로벌 금융 위기이기도 했다. 미국이 금융 위기를 빠져나온 건 1861년 남북 전쟁이 개시된 뒤였다.
남북 전쟁 개전 직후에 죽은 압뒬메지트가 남긴 빚은 결국 나중에 튀르키예가 영국에 더 많은 이권을 넘겨주는 지렛대가 되었다. 샤를 루이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세당에서 몸소 지휘한 12만 명과 함께 적군 포로가 돼 프랑스의 망신이 됐다. 철도 회사에 막대한 롱 포지션을 쌓았던 리틀은 1857년 금융 공황 때 전 재산을 잃고 1865년 남북 전쟁 종전 직전에 무일푼으로 죽었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전쟁의 경제학’ 저자, 동아일보(25-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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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러시아 정교회
로마 제국이 동, 서로 나뉘면서 종교도 조금 달라졌다. 동로마 제국이 믿었던 것이 정교회다. 이 정교회가 러시아로 퍼진 것은 키예프 공국 블라디미르 1세 때였다. 동로마 제국 황제가 반란 진압군 파병을 요청하자 블라디미르는 동로마 황족 여성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동로마 황녀 안나가 “정교회를 받아들이면 결혼하겠다”고 하자 통치를 위해 종교적 구심점이 필요했던 블라디미르가 흔쾌히 응했다. 동로마 제국이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자 러시아가 정교회의 주도권을 쥐었다. 지금도 전 세계 3억명 정교회 신자 중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1억명이다.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오래도록 한 식구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차별이 둘을 갈라서게 했다. 스탈린의 식량 수탈, 러시아의 2014년 크림반도 점령 등으로 사이가 벌어졌다. 2년 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이 결정타였다. 열렬한 푸틴 추종자인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명명하고 우크라이나로 진격하는 탱크에 성수(聖水)를 뿌리자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들끓었다. 다른 정교회 국가들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인정했다.
▶러시아인들의 신앙심은 깊다. 종교를 아편이나 마약이라고 치부하는 소련 공산당도 정교회를 없애지 못했다. 여기엔 정치 권력에 굴종해온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도 한몫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18세기 표트르 대제는 세속화된 서방 교회와 달리 정교회가 여전히 백성을 정신적으로 지배하자 총대주교를 없애고 황실에 신성통치종무원을 설치해 교회를 장악했다. 표트르를 롤모델 삼아 종신 집권 길을 연 푸틴도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력을 통치에 활용한다. 독실한 신자를 자임하며 종교 행사에도 열심히 참석한다.
▶세계에서 종교를 가장 적대하는 나라는 북한일 것이다. 성경을 보기만 해도 살아남기 힘들다. 다른 탈북자는 노동교화형이지만 중국에서 목사를 만난 사실이 드러나면 정치범 수용소나 처형이다. 그런 북한의 평양에 성당·절·교회가 있다. 외국에 보여주기 위한 연극의 무대다.
▶지난주 북한을 방문한 푸틴이 과거 김정일이 설립한 평양 정교회 성당을 찾아가 종교 그림을 선물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 수많은 여성, 어린이를 죽인 독재자가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 있는 가짜 ‘성당’을 찾았다니 기괴하다. 이번 일로 러시아 정교회가 남북한을 동시에 관장하는 교구장을 5년 전에 임명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그 교구장은 북한 정권에 최소한의 ‘종교의 자유’를 요구했는지 궁금하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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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메모랜덤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미국 러시아 영국 대표가 모였다. 이들은 옛 소련의 핵무기를 분산해 갖고 있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등 세 나라를 핵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시키기 위한 문서에 서명했다. NPT 가입의 대가로 이 나라들이 무력침공을 받을 경우 안보를 보장한다는 약속이 들어갔다. 서명 직후 유엔에 제출된 이 문서가 바로 부다페스트 메모랜덤(memorandum)이다.
▷당시만 해도 우크라이나는 미국 소련 다음으로 핵무기를 많이 보유한 나라였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갖고만 있었을 뿐 핵무기 발사를 위한 코드 등은 러시아가 통제하고 있었으니 온전한 의미에서의 핵무기 보유국은 아니었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을 믿고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우크라이나가 자국의 안보를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할 움직임을 보이자 러시아가 10만 명에 가까운 군 병력을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집결시켰다. 러시아가 내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러시아를 향해 강력한 경제제재를 경고했지만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파병하는 데는 선을 그었다. 러시아가 2014년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병합했을 때에 이어 다시 한번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종잇조각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메모랜덤의 약자가 흔히 말하는 메모다. 물론 외교적 메모랜덤은 메모이긴 해도 개인이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쓰는 메모와는 다르다. 거기에는 서명한 국가들의 약속이 들어있다. 다만 메모랜덤은 의회의 비준을 필요로 하는 조약(treaty)이나 협정(agreement)과는 달리 법적 구속력을 피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형식이다.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양해각서)처럼 조약이나 협정으로 가기 위한 전(前) 단계로서 작성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와 관련된 주요 메모랜덤으로는 구한말의 가쓰라-태프트 메모랜덤이 있다.
▷국가 간의 조약이나 협정은 당사국의 의회가 비준했기 때문에 조약이나 협정의 불이행은 의회의 의사를 존중하는 국내 세력에 의한 반발에 직면할 수 있다. 그러나 메모랜덤은 그런 것도 기대하기 어렵다. 메모랜덤은 약속을 불이행하는 국가가 불이익을 받게 할 만한 지렛대가 있을 때는 실효성을 갖는다.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넘겨주는 순간 그 지렛대를 잃어버렸다. 따져보면 조약이나 협정조차도 그것을 강제할 기관이 없는 국제사회에서는 무시될 리스크를 안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처한 곤경은 국제 질서의 냉엄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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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
2014년 크림위기:
2014년 2월부터 크림 반도를 러시아가 자국 영토로 편입한 사건. 2014년 2월 이전에는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였으며, 러시아 측 명분은 우크라이나 정권 교체 과정에서 러시아인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평화를 상징하는 올림픽인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이 러시아에서 개최되어 진행 중인 가운데 일어난 사건이어서 세계적인 파장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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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가 지난 15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과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발표했어요. 콘스탄티노플은 터키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에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는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를 대표하는 교구이지요. 로마 교구가 가톨릭 전체를 대표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는 정확히 어떤 종교일까요? 또 러시아 정교회는 왜 동방정교회에서 갈라져 나오겠다고 선언한 걸까요?
◇기독교의 동서 분열
기독교는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어요. 그중에서도 가톨릭, 개신교, 동방정교회가 3대 종파로 꼽힌답니다. 신도 수를 살펴보면 가톨릭은 12억명, 개신교는 9억명, 동방정교회는 2억명 이상이 믿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11세기까지는 이들 모두가 하나의 종교였어요. 4세기 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면서 첫 번째 대분열이 시작됐지요.
당시 서로마 제국은 로마를 중심으로,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두 도시는 각각 두 제국의 중심일 뿐 아니라 종교의 중심이기도 했어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둘 다 기독교 5대 교구에 들어가는 중요한 곳이었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두 도시 사이에는 언어적·문화적 차이가 점점 벌어졌어요.
러시아 정교회 수장인 키릴(왼쪽) 총대주교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나란히 서 있어요. 현재 러시아 국민 대다수는 러시아 정교회 신자예요. 4세기 말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돼 각각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으로 돌아갔어요. 지도에 표시된 두 도시는 기독교 5대 교구에 들어가는 중요한 곳이었죠. /게티이미지코리아
476년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고대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국가는 비잔티움 제국 하나만 남게 됐어요. 그래서 비잔티움 제국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는 '로마 교구보다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더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어요. 하지만 로마 교황의 생각은 달랐어요. 로마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순교했던 의미 깊은 교구니까, 역시 로마가 위라고 여겼어요.
로마 교구와 콘스탄티노플 교구는 서기 726년 '성상 파괴령'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는 우상 숭배"라면서 제국 안의 모든 성상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어요. 로마 교황은 반발했어요. 로마 교구는 게르만족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와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성상(조각)을 사용하는 걸 공식 인정하고 있었거든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대립을 계속하다 서기 1054년에 정식으로 갈라섰어요. 지중해를 기준으로 서쪽 지역에는 로마 가톨릭이, 동쪽에는 동방정교회가 들어섰지요. 이처럼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나뉜 데 이어, 1517년에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온답니다.
◇키예프 공국의 개종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가 한참 갈등을 키울 때, 유럽의 정세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8~11세기 사이, 북유럽에 살고 있던 바이킹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유럽 곳곳에 새로운 나라를 세웠거든요. 9세기에 노르만족 올레그가 드네프르 강변에 세운 키예프 공국도 그중 하나였어요.
서기 980년 블라디미르 1세가 키예프 공국의 최고 지도자가 됐어요. 그는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종교를 통일하기로 마음먹었죠. 키예프 공국에서 국교를 어떻게 정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때마침 남쪽 비잔티움 제국에서 반역이 일어났어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북쪽 키예프 공국에 "반란을 다스릴 수 있게 군사를 빌려주면, 황제의 여동생 안나를 키예프 공국으로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어요. 블라디미르 1세에겐 권력을 강화시킬 좋은 기회였어요. 블라디미르 1세는 군사 약 6000명을 비잔티움 제국에 보내 반란군을 진압했어요.
바실리우스 2세는 위기에서 벗어나자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 했어요. 블라디미르 1세는 화가 나서 "약속대로 동생 안나를 아내로 주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가겠다"고 위협했어요. 바실리우스 2세는 "안나는 동방정교회 신자라, 이교도와 결혼할 수 없다"고 맞섰지요. 결국 블라디미르 1세는 동방정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녀와 결혼한 뒤 동방정교회를 키예프 공국의 국교로 정했어요.
이후 키예프 공국은 비잔티움 제국의 영향을 받아 문화를 발전시켜요. 키릴 문자로 쓰인 성서와 종교 관련 서적들도 들어왔어요. 키릴 문자는 동방정교회가 선교를 위해 만든 '그라고르 문자'를 발전시킨 것인데, 현재 러시아에서 쓰는 문자가 바로 이 키릴 문자의 영향을 받았어요. 동방정교회는 러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갔어요.
13세기에 몽골이 침략하면서 240년간 러시아 지역의 정교회 신앙은 잠시 쇠퇴했어요. 그래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정교회 신앙을 간직했어요. 몽골이 물러가고 비잔티움 제국이 쇠락한 뒤,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정교회의 기둥으로 우뚝 섰어요.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정권이 러시아 정교회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많은 러시아 국민이 신앙심을 갖고 있어요.
◇국제정치가 몰고 온 갈등
하지만 지금도 종교가 정치의 영향에서 아주 자유로울 순 없는가 봐요. 특히 최근의 국제 정세가 동방정교회 내부에 파란을 몰고 왔어요.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병합했어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독립하겠다고 했어요.
동방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가 이를 인정했지요. 그러자 이번엔 러시아 정교회가 반발해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와 관계를 단절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러시아 정교회가 동방정교회와 갈라선다는 건 동방정교회가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죠.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온 거랍니다.
-윤서원 이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조선일보(18-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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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전쟁
1853년 그리스 정교도 보호 구실로 오스만제국과 크림전쟁 벌인 러시아…
영국·프랑스 개입으로 결국 패배
전쟁에서 전염병으로 병사들 죽어갈 때 아군·적군 구분없이 간호한 나이팅게일…
생명 구하고 숭고한 희생정신 보여줘
세계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흑해 북쪽에 '크림(Krym) 반도'라는 달콤한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어요. 영어로는 '크리미아(Crimea) 반도'라고 부르지요.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에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케르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마주 보고 있어요. 크림반도는 구소련 시절에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었으나, 1991년 자치권을 얻어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 되었지요. 주민 대부분은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뉴스에서 많이 보았겠지만, 요즘 국제사회에서는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지난 16일, 이 문제를 놓고 주민투표가 이루어졌는데 '투표 주민의 약 97%가 러시아 귀속에 동의한다'는 결과가 나와 전 세계가 크림반도를 주목하고 있지요. 귀속을 찬성하는 크림반도 주민과 러시아,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서구 열강 사이의 갈등도 커지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이번에 처음 벌어진 게 아니에요. 역사적으로 이미 여러 차례 반복되었지요. 오늘은 19세기에 일어난 '크림전쟁'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크림반도는 주민 대부분이 러시아인으로 구성됐어요. 최근 크림반도의 러시아 귀속 문제로 국제사회에 분쟁이 일었지요. /Corbis 토픽이미지
16세기 이래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수립한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은 19세기에 들어서며 그 세력이 점차 약해졌어요. 외부에서는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강대국이 호시탐탐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차지하려는 야욕을 내비치고 있었지요. 특히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답니다. 내부에서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많은 민족이 독립을 요구하며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켰고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오스만제국은 서양식 군대를 만들고 탄지마트라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어요.
마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가톨릭교도들의 인기를 얻고자 오스만제국에 예루살렘 성지(聖地)에서 가톨릭교도에게 특권을 줄 것을 요구하면서 문제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갈 기회만 엿보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이것이 오스만제국 내에 거주하는 그리스 정교도에 대한 위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는 이 땅의 그리스 정교도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했지요. 그러자 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가 오스만제국의 편을 들어 러시아와 맞서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흑해와 크림반도를 둘러싸고 1853년부터 1856년까지 3년간 벌어진 이 전쟁을 '크림전쟁'이라고 불러요. 전쟁 당시 러시아는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항(港)에서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지요. 동유럽 일대를 크게 뒤흔든 크림전쟁은 이후 러시아에 근대화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어요. 오스만제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제국 영토가 점점 작아져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고요.
크림전쟁은 무엇보다도 간호위생학 발전에 큰 계기가 되었답니다. 당시 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콜레라까지 유행하여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갔어요. 다친 병사들은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배에 실려 이스탄불로 옮겨졌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간호사를 매우 천한 직업으로 여겼기에 누구도 선뜻 간호사로 나서지 않았습니다.
(왼쪽 위 사진)1853년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주변국 상황이에요. (왼쪽 아래 사진)크림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국제사회의 갈등은 과거에도 여러 번 있었어요. 1853년 일어난‘크림전쟁’도 그중 하나이지요. (오른쪽 사진)나이팅게일은 크림전쟁에서 활약하며 간호학 발전을 이끌었어요. /위키피디아
이때 용기 있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에요.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전문적인 간호 교육을 받은 나이팅게일은 넘치는 교양과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녀는 38명의 간호대를 조직하여 이스탄불에 있는 위스퀴다르 병원으로 갔지요. 당시 군 병원은 이름만 병원이었지, 응급치료를 마친 환자들이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했어요. 나이팅게일은 무엇보다도 환자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깨끗한 환자복을 입히고, 침대 시트를 청결하게 관리하며 합리적인 병원 체계를 갖춰 나갔습니다. 병원 운영에 잘못된 관습이 있다면 과감히 바꾸기도 했어요.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하며 환자들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기도 했지요. 밤에는 등불을 들고 병사 한 명 한 명의 상태를 돌보고 다녀 '등불을 든 천사'라는 별명도 얻었어요.
그녀의 활약상이 전해지자 뜻있는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훗날 전쟁이 끝난 후 런던에 간호학교를 세웠다고 해요. 또한 나이팅게일이 꾸준히 써 내려간 '병원에 관한 노트'와 '간호 노트' 등은 각 나라로 전해져 간호법이나 간호사 양성을 위한 기초 교재가 되었습니다. 나이팅게일을 통해 많은 여성이 간호 전문 인력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고요. 여성의 사회 참여와 함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큰 변화까지 가져왔답니다.
지금도 간호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나이팅게일 선서를 해요. 국제적십자를 만든 앙리 뒤낭은 "내가 적십자를 만들기 위해 나선 것은 크림전쟁에서 보여준 나이팅게일의 희생과 봉사정신 때문이었다. 적십자를 만든 건 내가 아니라 나이팅게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나이팅게일의 삶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 속에서도 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공미라 | 세계사 저술가, 조선일보(14-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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