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칠면조가 아니다
[朝鮮칼럼]
사면권 제대로 사용 안 하면 추수감사절 칠면조 사면 같은 행사용 촌극과 다를 바 없어
사면을 대선에 이용하려 하고 정략적 도구로 쓰는 행태.. 국민으로서 모욕감 느낀다
매년 11월 추수감사절을 앞둔 백악관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미국 대통령과 칠면조가 주인공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에 쓸 칠면조 중 한두 마리를 골라 대통령이 몸소 ‘사면’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이다. 사면받은 칠면조는 그해에 잡아먹히지 않고, 운이 좋으면 동물원이나 어린이 농장 같은 곳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내기도 한다.
이런 외국 행사를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사면권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면이란 왕의 말이 곧 법이던 전제군주정 시절의 산물이다. 이는 서양에만 국한되는 일도 아니다. 조선이나 그 이전 시대를 떠올려보자. 임금은 자신이 내린 사형선고를 말 한마디로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 처벌권, 생살여탈권을 왕이 독점하는 것. 그러므로 누군가를 살려줄 권리 또한 왕이 일신전속권으로 제약 없이 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면의 본질이다.
사면권은 근대 국가의 기본적 작동 원리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입법부가 만든 법에 따라 사법부가 내린 재판 결과를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뒤집어버리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대통령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미국, ‘왕의 목을 자른 나라’ 프랑스 등 선진국 대부분은 논란을 감수하면서 사면제를 존속시키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때로는 법을 뛰어넘는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잠시 시계를 되돌려보자. 칠면조 사면이라는 희한한 전통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폴리티코에 따르면 “링컨이 처음 칠면조를 사면했다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그럴 법도 하다.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적극적으로 사면권을 행사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남쪽의 11주가 미 연방에서 탈퇴하자 링컨은 전쟁을 선포했다. 혈투를 치르기 위해 미국은 사상 최초로 징집을 했다. 잘못 끌려간 사람이 많았고 탈영도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법적 절차를 원칙적으로 따르면 모두 처벌받아 마땅했겠으나, 따지고 보면 국가의 실수로 저질러진 과오였다. 링컨은 그런 경우를 접할 때마다 대통령의 권한으로 사면했다.
의회는 끝없이 평화 협상론을 제기하며 링컨의 발목을 잡았다. 링컨은 전쟁광이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뚝심 있게 싸웠고,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항복한 남부를 대상으로 대대적 사면을 선포했다. 전쟁이 끝났으니 최대한 빨리 상처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뜻이었다. 막상 전쟁이 한창일 때는 평화를 외치던 정치인들이 전쟁이 끝나자 사면을 반대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북부의 여론도 찬반 양론이 대립했다. 그 와중에 링컨은 종전 후 5일 만에 암살당했고, 그의 뒤를 이어받은 앤드루 존슨이 186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그 사면 대상자 중에는 남부연합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이렇게 쓰라고 있는 것이다. 형식적 법 논리를 따르는 것만으로는 정의롭지 않을 때, 죽 끓듯 변덕을 부리는 여론이 보지 못하는 역사의 흐름이 있을 때, 온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한발 내딛게 해주는 결단의 힘이 바로 사면권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면권은 현대 민주국가 시스템에 어긋나지 않는다. 반면 대통령이 마치 전제군주라도 되는 양 사면권을 엉터리로 휘둘러댄다면, 그것은 미국 대통령의 칠면조 사면 행사와 다를 바 없는 촌극이 되고 마는 것이다.
지난 12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 그 의도야 누가 봐도 뻔하다. 야당 대선 후보의 발목을 잡는 데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사면권이라는 봉건 왕조 시대의 유산을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행태다. 폭우 쏟아지는 날 폐수 방류하듯 한명숙 전 총리를 복권시키고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가석방한 것도 그렇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을 이번 사면에서 제외한 것 역시 정략적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를 사면할 때 여론 무마용으로 쓰기 위해 남겨두었다는 해석을 제기한다. 정상적 민주주의 국가라면 떠올리기 힘든 발상이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은 고령의 몸으로 수술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여권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사면한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사면권을 정략적 농간의 도구로 삼는 행태를 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다. 우리는 대통령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칠면조가 아니다. 정권의 오만과 독선은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조선일보(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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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임기 말까지도 속 보이는 ‘정치 사면’
[박제균 칼럼]
全·盧 두 배 넘는 수형, 心身 망가진 朴
文, ‘네 편’ 아픔엔 공감능력 없는 듯
한명숙 이석기 끼워 넣고 MB는 제외
‘통합’을 말해도 ‘편 가르기’로 들려

23일이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특별사면 사실이 동아일보 취재진에 포착된 날이. 공교롭게도 그 날짜 신문들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 사진이 실렸다. 대지 800평에 신축 중인 사저가 내년 4월 준공되면 5월 퇴임하는 대통령이 내려가 살게 된다.
바로 그 대지를 두고 ‘9개월 만에 농지→대지’ 형질 변경 논란이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퇴임 후 사저 대지를 두고 형질 변경 논란을 벌인 것은 문 대통령 표현대로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다. 다만 대통령 자신이 분을 못 참고 기어이 그런 논평을 한 것 자체가 더 민망하다. 어쨌거나 공사 가림막 뒤로 보이는 파스텔 톤의 사저 외관은 꽤 아늑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31일 풀려날 박 전 대통령은 돌아갈 사저가 없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들어가 살 집이야 동생 지만 씨가 여유도 있고 해서 어떻게든 마련될 것이다. 하지만 4년 9개월 수형 생활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70세 여성 전직 대통령이 돌아갈 사저조차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짠하다.
그래도 문 대통령의 박근혜 사면은 안 한 것보다는 낫다. 다만 “과거에 매몰돼 서로 다투기보다는 미래를 향해 담대하게 힘을 합쳐야 할 때다. 이번 사면이 생각의 차이나 찬반을 넘어 통합과 화합, 새 시대 개막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입장 발표가 없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박근혜 수형 기간에 맞먹는 4년 7개월여 임기 내내 과거에 매몰돼 ‘적폐청산’ 친일몰이 역사바꾸기 등을 밀어붙이고, 통합과 화합은커녕 민주화 이후 최악의 편 가르기를 한 정권의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니었다.
청와대는 박근혜 사면을 대통령의 결단처럼 포장했지만, 그렇게 훌륭한 일이라면 왜 진작 못 했나. 박 전 대통령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하고 천문학적 비자금을 챙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보다 두 배도 넘는 기간을 감방에 놔둔 건 도무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국격(國格)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문 대통령을 두고 내 편에는 한없이 따뜻해도 ‘네 편’의 아픔이나 고통에는 공감능력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번 사면 배경에 대해서도 ‘박 전 대통령 건강이 심각해 자칫 수감 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보고가 올라가 그에 따른 정치적 파장을 우려한 대통령이 결심을 하게 됐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박 전 대통령만 사면했다면 만시지탄(晩時之歎)은 있지만, 나도 박수를 쳤을 것이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 복권, 이석기 가석방 끼워 넣기는 뭔가. 더구나 제주 해군기지와 성주 사드기지 반대 시위, 불법 노동 집회를 주도한 민노총 지도부와 시민단체 관련자들도 대거 사면·복권해 줬다.
이러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동계의 환심을 사고, 진보좌파를 결집시키며, 박근혜 사면 카드로 보수우파를 흔들려는 선거용 정치 사면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문 대통령이 아무리 이번 사면의 정신을 ‘통합과 화합’이라고 말해도 많은 국민에겐 ‘편 가르기와 내 편 봐주기’로 들리는 것이다.
그나마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상에서도 빠졌다. 그의 사면 제외를 보고 문 대통령의 ‘분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명박은 2018년 1월 자신을 향한 사법의 올가미가 조여 오자 ‘노무현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을 입에 올렸다. 이에 문 대통령은 최고 권력자답지 않게 “분노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개인감정을 드러냈다.
이 전 대통령은 이미 군사반란죄 내란죄를 범하고 수천억 원대 비자금을 챙긴 전·노 씨보다 오래 형을 살고 있다. 형평성 차원에서든, 국격 차원에서든 풀어줘야 마땅하다. 4개월여 남은 대통령의 임기, 국민은 주시할 것이다. 문재인의 ‘아픈 손가락’ 김경수 전 경남지사를 사면할지, 이명박 사면을 김경수 사면의 물타기용으로 쓸지, 이명박만 사면할지를.
닷새 뒤면 임인(壬寅)년 새해가 밝는다. 그 67일 뒤엔 대한민국 20대 대통령 선거다. 그 선거를 앞두고 이 나라가 얼마나 두 동강 나 분열의 굿판을 벌일지 벌써부터 아스라하다. 그러니 이재명 윤석열 후보 진영은 치열하게 경쟁하되, 모질게 상대를 적으로 돌리는 문 정권의 우(愚)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문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사의 약속을 마지막에라도 지키는 모습을 보이기 바란다.
-박제균 논설주간, 동아일보(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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