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 월급 200만원?]
[사병 월급 100만원]
[병사 월급 100만원 시대]
[요즘 軍에서 연발하는 황당한 일들, 붕괴 수준 아닌가]
[당나라 군대]
[이순신과 위기의 ‘4종 세트’]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페이스북에 '병사 봉급 월 200만원'을 약속하는 글을 올렸다. /윤 후보 페이스북
카투사 시절 병장 계급장을 달고 미군 상병을 지휘한 적이 있었다. 군 생활 2년 미만 해놓고 실전 경험까지 있는 5년 차 미군 상병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했다. 미군 상병은 속이 뒤틀렸는지 뜬금없이 ‘너 월급 얼마냐’고 물어왔다. 20여 년 전 한국군 병장 월급이 약 2만원, 미군 상병은 1200달러쯤으로 기억한다. 60배 차이였다. 당시 ‘징병제와 모병제 차이’라고 설명했다. 모병제인 미군은 모두 직업군인이다.
▶2차 대전 후 일찌감치 모병제로 바꾼 영국과 프랑스 병사 초봉이 200만원 남짓이다. 2년 이상 복무한 일본 자위대 부사관도 그쯤 받는다. 전부 한국보다 잘사는 나라들이다. 우리와 1인당 GDP가 비슷한 대만은 2014년 모병제를 본격화하면서 이병 월급을 120만원으로 올렸다. 하지만 징병제 국가에선 ‘월 100만원′도 찾기 어렵다. 한국처럼 전쟁 위험에 놓인 이스라엘의 전투병 월급이 50만원 수준이다. 독일도 징병제일 때는 병사 월급이 30만~40만원이었다. 지금 한국군 병장은 월 68만원을 받는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그제 “병사 월급 200만원”을 공약했다. 그러자 민주당 이재명 후보 측도 “환영한다”며 작년 말 이미 ‘월 200′을 약속했다고 맞섰다. 작년 국방부가 병장 월급을 2026년까지 100만원으로 올리겠다고 했는데 대선 한 번 거치면서 ‘따블’로 뛸 판이다. 미군 2년 차 미만 상병이 2100달러 수준이다. 군 생활 1년에 월 200만원이면 세계 최강군 미군 못지않을 것이다.
▶징병제는 상시적 안보 위기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병역 의무를 지운 것이다. 국방은 대가보다 의무가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대선 후보들이 말하는 ‘병사의 최저임금 보장’은 징병제를 끝내고 모병제로 전환할 때 제기될 문제들이다. 징병제 국가 중에도 태국·이집트는 최저임금의 100%를 지급한다고 하지만 월급 50만원 미만이다. 징병제에서 모병제 전환은 기존 군사·안보 체제를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일인데도 진지한 고민이나 토론은 안 보인다. 그저 20대 남성 표 얻을 생각뿐이다.
▶현재 한국군 하사 초봉이 170만원쯤이다. 병장 월급이 200만원이면 부사관과 장교는 얼마를 받아야 하나. 월급을 연쇄적으로 올리려면 1년에 10조원 가까이 더 들 것이란 추산도 있다. F-35A 스텔스 전투기 40대 도입 예산이 8조원이다. 최첨단 사드 1개 포대도 1조원이면 산다. 무엇이 우선돼야 하나. 조금 있으면 후보들이 군 복무 기간 단축을 들고 나올 차례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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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 월급 100만원
1988년 가을 사병으로 입대해 초봉 5500원을 받았다. 당시 88 담배 한 갑이 600원이었다. 공짜로 지급받는 한산도와 은하수는 맛이 써 인기가 없었다. PX에서 주전부리 빵이라도 사먹으려면 집에서 용돈을 받아야 했다. 병장 월급 1만원도 외식 한 번 하면 끝이었다. 직업란에 군인이라 적을 때면 쓴웃음이 나왔다. 30년 뒤 아들이 입대했다. 옛날 쪼들리던 생각이 나서 용돈을 보내주려 했는데 “넉넉히 받으니 필요 없다”고 했다. “병장 월급은 50만원 넘는다”며 알바보다 낫다고도 했다.

▶2000년까지 이병 월급은 1만원을 넘지 않았다. 병장 기준으로 10만원을 돌파한 게 2011년이고, 20만원에 도달한 건 2016년이다. 그런데 현 정부 들어 “사병 급여를 최저임금의 절반 수준까지 올리겠다”며 뜀박질을 시작했다. 2017년 단숨에 100% 올려 40만원을 돌파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12.5% 오른 60만원으로 정했다.
▶요즘 군부대엔 ‘군 테크’라는 말이 유행한다. 사격이나 각개전투처럼 제대로 군인 노릇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주머니 두둑해진 사병을 위한 재테크를 뜻한다. 은행들은 사병 복무 기간에 맞춘 저축 상품을 내놓는다. 유튜브엔 소액 활용 주식 투자 비법이 올라온다. 소비 성향도 바뀌어 PX에선 남성용 화장품 판매가 늘었다. 훈련으로 지친 피부를 진정시키는 수딩 크림이나 마스크 팩, 달팽이 크림이 인기라고 한다.
▶국방부가 사병 급여를 2026년까지 병장 기준 100만원대로 올리는 안을 내놓았다. 직업군인인 부사관 초봉의 절반 수준이다. 여기에 내년 대선을 앞두고 청년 표심을 노리는 후보들의 선심 공약까지 가세하고 있다. 한 후보는 전역 후 사회출발자금 명목으로 3000만원을 주겠다고 했고, 또 다른 후보는 사병 급여를 최저임금 수준으로 인상하겠다고 했다.
▶월급 더 준다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보상 없는 충성을 뜻하는 ‘애국 페이’를 청년에게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란 지적도 있다. 군 가산점 혜택이 없어진 마당에 급여 인센티브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청년에게 군대 급여 인상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 이후 펼쳐질 미래다. 한 세대 전엔 비록 빈손 제대를 해도 크게 억울해하지 않았다. 일자리는 풍족했고 결혼하면 몇 해 안에 내 집이 생겼다. 많은 20대가 정권을 성토하는 건 사병 월급이 적어서가 아니다. 아버지가 청년일 때 꿈꾸던 미래를 자기는 꿀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1-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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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 월급 100만원 시대
1995년 병장 월급으로 1만2000원쯤 받았다. 3000원짜리 자장면 네 그릇 사 먹으면 없어졌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대였지만 늘 쪼들렸다. 한 동기가 "월급이 20만원만 돼도 살맛 나겠다"고 하자 다른 동기가 "우리 같은 징병제 국가에선 꿈같은 얘기"라고 했다. 2003년에도 병장 월급은 2만5000원 남짓이었다.
▶징병제를 운용하는 나라는 15국 안팎이다. 그중 1인당 GDP가 6만3000달러인 싱가포르의 병장 월급은 50만원을 웃돈다. 이집트와 태국, 브라질 사병은 최저임금의 80% 이상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징병제 국가마다 안보 상황과 병력 운영 방식이 크게 달라서 월급 수준을 일률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한국과 가장 유사한 처지의 국가라면 이스라엘일 것이다. 실제 전쟁 위험에 놓인 것도, 1인당 GDP 수준도 엇비슷하다. 이스라엘의 전투병 월급이 50만원 수준이다. 올해 한국군 병장 월급 54만원과 큰 차이가 없다.

▶어제 국방부가 '국방 중기계획'에서 "2025년 병장 월급을 96만3000원으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병사 월급 현실화"라며 100만원 시대를 열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올해 2조원인 병사 월급 예산을 3조원으로 늘려야 한다. 1조원이 작은 돈인가. 병사 월급 대폭 인상은 문재인 대통령의 2017년 대선 공약이었다. 2016년만 해도 19만7000원이던 병장 월급이 2018년 40만5000원으로 두 배로 뛰었다. 그걸 또 두 배로 올린다는 것이다. '따따블'이다.
▶문 대통령은 2018년 '국방 개혁' 보고를 통해 21개월이던 군 복무 기간을 2021년 18개월로 줄인다고 했다. 그 결과 62만명이던 국군은 2022년까지 50만명으로 감축된다. 저출산으로 병력은 그냥 있어도 줄어든다. 아무리 무기를 현대화해도 병력은 군 작전의 기본 요소다. 북한 급변 시 안정화 작전에만 26만~40만 병력이 필요할 것이란 연구도 있다. 병력을 유지하려면 복무 기간을 늘려야 하는데도 이 정권은 거꾸로 줄이는 실험을 한다.
▶지난달 탈북민 월북 과정이 우리 군 감시 장비에 7차례나 포착됐는데도 군은 북한이 방송할 때까지 까맣게 몰랐다. 복무 기간 단축에 따른 병력 감소를 첨단 장비로만 메울 수 없다는 뜻이다. 군대 가야 하는 20대와 부모 입장에서 월급 100만원 주고 복무 기간도 줄여준다는 공약은 솔깃할 수밖에 없다. 표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우리 국방에 무슨 도움이 될지는 아무리 계산해봐도 답이 안 나온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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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軍에서 연발하는 황당한 일들, 붕괴 수준 아닌가
최근 군(軍) 내에서 충격적인 사건·사고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있다. 경기도 한 육군 부대에서는 상병이 야전삽으로 여성 대위를 폭행해 수사를 받고 있다. 사격장 내 수풀 제거 작업에 불만을 가진 병사를 대위가 불러 면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대위가 쓰러지자 목까지 졸랐다고 한다. 다른 육군 부대에서는 대위가 만취 상태로 옷을 벗은 채 누워 잠을 자다가 주민에게 발견되는가 하면, 같은 부대 소속 중위는 노래방에서 민간인 여성을 추행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또 다른 육군 부대 대위는 회식 후 음주 운전을 하다 차 안에서 잠들었다. 모두 코로나 사태로 회식이 금지된 상태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들의 부대가 전투를 할 수 있겠나. 모두 도망가거나 전멸할 것이다.
충청도 육군 부대에서는 남성 부사관들이 상관인 남성 장교를 집단으로 성추행하는 황당한 일이 있었다. 현역 육군 일병은 성(性) 착취물을 공유해온 텔레그램방의 핵심 관리자로 지목돼 구속됐다. 해군 함장이 부하 여군을 성추행하다 해임됐다. 몇 주 새 벌어진 일만 해도 일일이 열거가 어려울 정도다.
군에서 크고 작은 일탈은 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수준이 아니다. 국방장관이 엊그제 지휘 서신을 통해 "군 기강 문란행위에 대해 엄격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했다는데 최근 1년간 이런 공식 질책과 반성만 5차례 있었다. 그럼에도 이를 비웃듯 사건·사고가 잇따른다면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군은 평일 일과 이후 병사들 부대 밖 외출과 휴대전화 사용을 허가해 주는 등 병영 문화 개선에 집중한다면서 정작 군의 존립 기반인 기강과 규율 확립은 소홀히 했다. 군 수뇌부부터 "군사력 아닌 대화로 나라를 지킨다"며 평화 무드에 취한 모습을 보였다. 일선 부대가 취객과 치매 노인, 시위대 등에게 속수무책으로 뚫리는 경계 실패 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도 군기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본분을 잊고 있는데 밑에서 나사가 풀리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최근 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붕괴 직전의 집단처럼 위태롭게 느껴진다.
-조선일보(20-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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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군대
북한 배가 멀쩡히 삼척항에 들어왔다. 북방한계선 넘은 지 57시간 동안 군(軍)은 몰랐단다. 국방부 장관이 머리 조아린 다음 날, 땅덩이 가로질러 평택 해군 2함대 사령부에서 괴한(怪漢) 소동이 났다. 일이 커질까 봐 장교가 엉뚱한 병사를 자수시켰다. 장본인은 다른 초소 근무병이었다.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기강 흐트러진 군을 왜 그리 이를까. 당이 고구려에 깨진 뒤로 생겨난 표현이라는 둥 말은 많은데 명쾌한 답은 없다. '당나라 당(唐)' 자 들어간 낱말 숱해도 실마리가 안 잡힌다. 당개나리, 당나귀, 당면(麵), 당모시, 당백사(白絲), 당선(船), 당오동(梧桐), 당침(針), 당혜(鞋)…. 본고장이든 거쳐 왔든, 대체로 중국에서 전했을 법한 것을 가리킨다. 唐은 아무튼 중국의 대명사 격이다. '당나라 군대'가 모욕이라며 저들이 눈 부라리면? 못 이기는 척 돌려 말하면 된다. 개판 5분 전.
씨름이 무승부 나서 다시 벌이는 판이 '개(改)판'이다. '개판 5분 전'은 그러기까지 옥신각신하며 어수선한 상황을 말한다는 설이 있다. 6·25 피란민 무료 배식 때 밥솥 판 여는 '개판(開板)' 직전 소란스러움을 가리킨다고도 한다. '무질서하고 난잡함'을 뜻하는 '개판'이 이런 표현의 축약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접두사 '개'에 엉망진창이라는 뜻이 있어 '개판' 스스로 낱말 구실을 한다고 봐야겠다.
아무튼 이때 '개'는 집짐승 개[犬]가 아니다. 개꿈(황당한), 개떡(되는 대로 만든), 개살구(질 낮은), 개소리(당치 않은), 개죽음(허망한)처럼 여러모로 쓰는 접두사다. 애꿎은 견공 흉보다가는 개망신이다.
땅에서 개판이 벌어진 뒤 하늘에선 오싹한 일이 터졌다. 러시아가 공중조기경보기로 독도 영공(領空)을 넘나들었다. 중국 폭격기와 편먹고는 한국 방공식별구역을 휘저었고. 혹시 우리를 거시기로 아는 걸까. 唐 타령 하지 말라고 중국이 종주먹 들이댈지 모르겠다. 그런 꼴 안 보려면 안 되면 된다, 당나라 군대.
-양해원 글지기 대표, 조선일보(19-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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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위기의 ‘4종 세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연구했고, 일부 군인들이 군신(軍神)으로 존숭(尊崇)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진해에 주둔해 있던 일본 해군이 충무공을 모시는 사당인 통영 충렬사를 매년 정기적으로 찾아 제사를 올렸다는 사실을 최근 알게 됐다. 근현대 한일 관계사를 발굴하는 동아일보 기자 출신 저술가 이종각의 책 ‘일본인과 이순신’을 통해서다.
그보다 앞서 1905년 일본의 한 해군 장교는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일전을 앞두고 300여 년 전의 적장(敵將) 이순신의 혼령에 자신의 안전과 일본 해군의 승리를 빌기도 했다. 일본 중학교 검정교과서와 참고서 대부분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활약으로 자신들이 패퇴한 사실(史實)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아무리 이순신이 불세출의 명장이라고 해도 자국에 패배를 안긴 장수를 우리라면 그렇게 외경(畏敬)할 수 있을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면 일본인 특유의 사생관(死生觀)과 무사도 정신의 편린(片鱗)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봐도 이순신은 한국사의 특이한 존재다. 질투심으로 똘똘 뭉친 겁쟁이 왕과 당파싸움으로 지새우며 썩을 대로 썩은 지도층, 실정(失政)으로 도탄에 빠져 무기력한 백성…. 어느 한구석 예정된 패전을 뒤집을 동력은 없었다. 더구나 지원병으로 온 명군(明軍)은 군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당나라 군대’였다. 조선군에겐 군림하면서도 왜군과는 겉으로만 싸우는 양전음화(陽戰陰和)를 일삼았고 조선 백성 수탈은 왜군 못지않았다(안영배의 ‘정유재란―잊혀진 전쟁’). 임란(壬亂)은 이순신이 없었다면 강토(疆土)가 적에게 넘어가 이후 역사가 바뀌었을 ‘이순신의 전쟁’이었다.
역사처럼 확실한 건 없다. 임란 때든 구한말이든, 로마 패망기이든 청조(淸朝) 말이든 위기는 대개 비슷한 징후를 동반한다. 무능하고 안일한 지배세력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없이 제 배만 채우는 사회 지도층, 무사안일에 빠진 국민의 분열, 그리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외세(外勢). 위기의 ‘4종 세트’다.
지금이 위기냐, 아니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불과 넉 달 전까지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초유의 위기’라고 외쳤다. 하지만 위기의 징후라는 측면에선 지금도 달라진 것은 없다. 먼저 주적(主敵), 즉 북한의 선의(善意)에 기대어 ‘대화를 통한 평화’를 얻겠다는 청와대의 일관된 노선이 가장 불안하다. 평화를 위한 대화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적국의 악의(惡意)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토대 위에서 해야 한다. 우리가 평화를 바란다고 적도 평화를 바랄 것이란 편의적 낙관론에 빠져 ‘내가 먼저 무기를 버릴 테니, 너도 버려라’라는 식의 순진함이 불러온 실패를 우리는 숱한 역사의 페이지에서 본다.
지도층도 보수와 진보 할 것 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 사회를 9년 동안 지배하던 보수 정치세력은 국민의 버림을 받고도 왜 버림을 받았는지조차 모른다. 하다못해 국민을 속인 죄를 반성하며 이제부터 단 한 푼도 세비를 받지 않겠다는 사람조차 없다. 자기희생만이 살 길인 걸 왜 모르나.
그렇다고 새 지도층에 오른 진보세력도 다를 바 없다. 9년의 허기를 채우겠다는 듯, 무서운 속도로 제 배를 불려간다. 어떻게 하면 다시는 밥그릇을 놓치지 않을까 골몰하며 밥상까지 바꾸려 한다. 서민 듣기 좋은 말은 골라서 하면서 자기들은 불로소득 챙기며 좋은 동네 살고, 자식들은 좋은 학교 보낸다. 이런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좌우 할 것 없이 편 가르기를 일삼는 지도층에 점염(點染)된 국민들도 내 편, 네 편으로 갈렸다. 그러면서 어느새 굴종의 평화든 뭐든, 전쟁만 없으면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여기에 북한 김정은의 협박도 모자라 미국 대통령까지 한미 동맹을 엿 바꿔 먹을 수 있다는 태도로 우리 안보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 위기의 4종 세트에서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다.
류성룡은 임란이 끝난 후 징비록(懲毖錄)을 쓴 이유에 대해 시경을 인용해 “앞의 잘못을 징계하여 뒤의 환란을 조심한다”고 밝혔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역사는 반드시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게 만든다. 작금의 위기 징후들을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박제균 논설실장, 동아일보(18-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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