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 ....

뚝섬 2023. 1. 13. 10:30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경제 자립’이라는 환상]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대기근과 소련 경제 통제 탓에 500만명 이상 굶어 죽어 

 

우크라니아 곡창지대의 밀 수확 현장. /로이터 연합뉴스

 

러시아가 주요 밀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사실상 차단하면서 전 세계 식량난이 더욱 악화하고 있어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후 곡물 운반 선적이 이동하는 흑해 항로를 봉쇄하면서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의 수가 급감했죠. 전쟁이 계속되고 세계 식량 위기가 가중되면서 기아·빈곤 및 조기 사망이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어요. 유엔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현재 2019년보다 2배 이상 많은 3억4500만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며 '홀로도모르'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홀로도모르란, 우크라이나어로 굶주림을 뜻하는 '홀로도'와 죽음을 뜻하는 '모르'가 합쳐진 단어예요. 90년 전 스탈린 치하의 소련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명이 숨진 대기근을 뜻하는 말이죠. 당시 소련은 이를 단순히 '심각한 식량 위기'라고 표현하며 덮으려고 했지만, 소련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얼마 전 EU 의회는 이 사건을 집단학살, 즉 '제노사이드'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당시 우크라이나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대기근의 서막, 스탈린식 집단농장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최대의 곡창지대입니다. 이는 풍요로운 금빛 밀밭과 푸른 하늘을 상징하는 국기에서도 알 수 있죠. 우리나라 면적의 약 6배나 되는 비옥한 대평원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어마어마해요. 2020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옥수수 수출 4위, 밀 수출 5위를 기록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서 이러한 경제적 풍족함이 늘 국가의 부강함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어요.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제대로 독립된 나라를 갖지 못했거든요. 1922년에는 소련에 강제 합병당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었던 레닌이 1924년 사망하고 난 후, 스탈린이 그 뒤를 이었어요. 소련은 연이은 내전과 혁명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됐고 경제는 밑바닥까지 추락한 상태였죠. 스탈린은 경제를 일으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가졌어요. 그리하여 1928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 근대적 공업화와 산업화를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이와 함께 낙후된 농촌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미명 아래 '집단농장 체제'를 강제로 시행했어요. 실제 목적은 이를 통해 식량 생산을 늘려 공출량을 높이고자 한 것이었죠. 원래 가족 위주의 소규모 농장 형태로 농업을 하던 사람들은 스탈린식 경제체제에 저항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이를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습니다.

이때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 바로 우크라이나였어요. 우크라이나는 당시 전체 소련 식량 생산의 25% 정도를 차지할 정도의 주요 식량 공급처였어요. 이 지역은 원래부터 개인이 농지를 소유하는 전통이 강해 '쿨라크'라고 불리는 부농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집단농장 체제로 전환하며 곡물 생산이 감소하기 시작했어요. 집단농장은 농민들이 공공 토지에서 공동으로 일하고 수확물을 나누어 갖는 형태였는데 오히려 생산의욕을 떨어뜨리는 등 비효율적이어서 수확량마저 줄어들었어요.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당 대회에서 정부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이 상태라면 대기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단농장 체제와 대량 공출을 이어갔습니다. 그러자 농민들은 수확한 공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마을 밖 비밀 창고에 숨기는 등의 저항을 시작했죠.

굶어 죽는 우크라이나… 벌레 먹기도

문제는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의 저항을 순수한 농민의 목소리가 아니라 독립을 위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바라봤다는 거예요. 소련 각지에서 분리주의 민족운동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던 그는 우크라이나를 더욱 가혹하고 강력하게 통치했어요. 수색과 심문, 압수 조치가 이어졌습니다. 개를 이용해 숨겨둔 식량과 고기들을 모두 찾아냈고 식량을 숨긴 것이 발각되면 원래 내야 하는 양의 15배를 물도록 했어요. 또한 공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집단은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 놓은 종자까지 모두 압수당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공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고, 집단화 조치에 반대하는 정치인과 비협조적인 관리, 비판하는 지식인·언론인들까지도 모두 찾아내 처형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농민들은 자신들이 기르던 가축을 도살하기 시작하였어요. 어차피 빼앗길 것이라면 내가, 혹은 우리 가족이 다 먹어버리는 것이 나았거든요. 하지만 이럴수록 스탈린의 탄압은 더욱 강해졌지요. 농민들이 수확 뒤 들판에 나가 이삭줍기를 하거나 미처 못 캔 감자를 캐와도 잡아들여 죽이거나 감금해버렸어요.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먹을 식량이 더욱 부족해졌고 1932년 가을부터는 아사(餓死)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가축들이 없으니 농업 생산량은 늘어날 수 없었는데, 당이 정한 공출량은 줄어들지 않았거든요. 우크라이나 전 지역이 대기근의 고통으로 몸부림칠 때 스탈린과 당은 구호 식량을 주기는커녕 다른 지역에서 곡물이 들어오는 것조차 막아버렸어요. 먹을 것이 없어진 사람들은 흙, 벌레, 심지어 인육을 먹는 끔찍한 행위까지 했어요. 외국으로 도망치려는 이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스탈린은 본인의 선전 정책과 사회주의식 경제체제에 흠이 갈까 이마저도 모두 통제해버렸죠.

1932년 가을부터 1933년까지 약 8개월간, 하루 평균 1만5000명씩 아사자가 나오는 비극이 계속됐습니다. 우크라이나가 가장 큰 피해를 당했지만 카자흐스탄 등 다른 지역들도 피해를 당했어요. 이 기간 대기근으로 굶어 죽거나 질병에 걸려 사라진 인구가 약 500만~1000만명에 이를 수도 있다는 통계도 있어요. 자연재해가 아닌 가혹한 통치로 100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한 것은 인류 역사상 큰 비극이었어요. 우크라이나 정부는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 기념일로 지정해 기리고 있답니다.

(위 좌)1932~1933년 소비에트 연방의 기근 지도. 기근이 심한 곳일수록 진한 색으로 표시돼 있어요. /위키피디아/(위 우)1933년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거리에 굶주린 농민들이 쓰려져 있어요./(아래 좌) 홀로도모르를 보도한 1934년 8월 6일 자 영국 일간지 데일리 익스프레스 1면. /위키피디아/(아래 우) 1933년 홀로도모르를 기리는 엠블럼(상징 표시)을 정중앙에 배치한 1993년 우크라이나 우표. /위키피디아

 

-서민영 함현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안영 기자, 조선일보(23-01-11)-

________________



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국영 농장에 농민들을 강제 편입시킨 데 이어 대량 공출로 곡물을 수탈하면서 굶주림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1933년에는 굶어 죽는 이가 하루 평균 1만5000명 규모로 늘어날 정도였다. 사진은 1933년 도네츠크의 한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이 얼어붙은 감자를 캐는 장면이다. /위키피디아

 

1930년대 초반 소련은 극심한 기근으로 대량 아사(餓死) 사태가 벌어졌다. 현재 학계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 350만 명, 카자흐스탄에서 150만 명, 그리고 볼가강 유역, 서부 시베리아 지역, 우랄 남부 지역 등지에서 100만 명, 도합 약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본다. 그동안 소련에서는 이 사실을 감추고 ‘심각한 식량 문제’ 정도로만 표현할 뿐 제대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고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해 기존과 다른 학설이 나온 것은 소련이 몰락한 1990년대 이후다. 이에 따르면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농촌 사회를 공격하고 곡물을 빼앗아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사태의 발단은 농업의 강제 집단화다.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한 소련 당국은 낙후한 농촌 지역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겠다며 1929년부터 집단농장(콜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콜호스프) 혹은 국영농장(솝호스·우크라이나어로는 라도호스프) 속에 대다수 농민들을 강제로 편입시켰다.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은 생산 수단의 ‘공유’냐 ‘국유’냐의 차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같은 성격이다. 농민들은 이 체제를 ‘새로운 농노제’라고 부르며 저항했다. 이전의 지주 자리를 국가가 꿰차고 농민을 착취한다는 의미다.

 

스탈린은 대다수 농민들의 저항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2년 내에 90% 이상의 농가를 집단화했다. 그는 ‘봉건적인’ 농촌을 사회주의 방식으로 ‘진보’시키면 생산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오히려 곡물 생산이 15~20% 감소했고, 가축 수도 40% 감소했다. 애초에 집단농장 방식은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의 것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닌 법, 농민들은 논밭에서 설렁설렁 일했고, 더 이상 자기 소유가 아닌 가축들을 애써 돌보려 하지 않았으며, 처음 사용해 보는 트랙터들은 대개 고장 나기 마련이었다. 생산이 급격히 감소하자 당연히 농민들에게 돌아가는 몫도 크게 줄었다. 집단화 이전에는 일 년에 1인당 평균 300㎏을 수확했었는데, 이제는 많은 가구가 100㎏이 안 되는 배급을 받았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대량 공출이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도시와 산업 부문, 군대를 먹여 살리고 수출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화 이전인 1920년대만 해도 정부는 시장가격으로 곡물을 수매하여 1000만 톤 정도를 조달했으나, 1931년에는 거의 무상으로 2300만 톤을 공출했고, 그중 500만 톤을 해외로 수출했다. 1932년의 경우 정부는 수확량을 9000만 톤으로 예상하고 2900만 톤을 공출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수확량이 6700만 톤에 불과했지만 공출은 크게 줄지 않은 2200만 톤으로, 수확의 약 3분의 1에 해당했다.

 

특히 수확의 43%를 빼앗긴 우크라이나의 피해가 극심하여 농민들의 반발이 거셌다. 수도 하르키우(러시아 명 하르코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정부 정책이 비현실적이며 이 상태라면 대기근이 불가피하다고 비판했다. 농민들은 조직적으로 수탈에 저항했다. 때로 콜호스 관리들의 공모하에 수확한 곡물을 구덩이에 묻거나 마을 밖 비밀 창고에 숨기고, 공출을 피하기 위해 급히 맷돌로 밀을 빻았다. 잡히더라도 당국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하리라 기대하고 아이, 노인, 여성들이 야밤에 몰래 들판에 나가 밀을 거두어왔다.

 

스탈린은 보고를 통해 이런 사태에 대해 알고 있었다. 1932년 10월, 측근인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를 우크라이나에 파견했다. 이들이 스탈린 및 공산당 고위 관리들과 주고받은 기록들을 보면 당시 우크라이나 상황이 어떻게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수색과 심문, 압수 조치가 이어졌다. 식량을 숨긴 것이 발각되면 원래 내야 하는 양의 15배에 해당하는 감자와 육류를 물어야 했다. 이 경우 그야말로 마지막 남은 식량과 가축을 빼앗겨서 죽음으로 내몰렸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콜호스는 5일의 시간 여유를 주고 이 기간이 지나면 다음 해 농사를 위해 남겨 놓은 종자까지 압수했다. 압수 조치를 수행하는 말단 관리들은 닭, 토끼, 밀가루, 메밀, 심지어 절인 배추까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앗아갔다. 공출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가혹한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32년 11월에 5만 명이 체포되고 이 중 500명이 처형되었다. 저항하는 마을 주민 전체를 시베리아로 유형 보내기도 했다.

 

스탈린은 1933년 1월 1일 자로 우크라이나 공산당에 수색을 더 빠르게 진행하고, 만일 곡물을 숨겨놓은 농민들을 찾아내면 사회주의 재산을 훔친 절도범으로 강력 처벌하라는 전신을 보냈다. 법령에 따르면 10년 강제노동과 사형이 가능했다. 굶주림에 시달리다 못해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탈출하려 했다. 당국은 이들을 ‘소비에트의 적’으로 규정하고 기차역에 특수부대원을 배치하여 체포했다. 고향 마을로 돌려보내는 정도면 다행이지만 잘못 걸리면 쿨라크(원래 부농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당국의 방침에 저항하는 모든 농민들을 그렇게 불렀다), 반혁명 반동분자로 몰려 강제 노역을 하는 특수 지역으로 끌려갔다. 

 

홀로도모르 추모광장의 소녀상-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의 홀로도모르 추모 광장. 우크라이나는 매년 11월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 추모일로 정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본격적으로 기근과 아사가 시작되었다. 죽은 말 사체를 놓고 마을 사람들이 싸워서 힘센 사람이 고기를 얻어 집으로 갔다. 개를 잡아먹은 다음에는 쥐 고기를 먹었다. 당대의 한 기록에 의하면 자그라도브카라는 지역에서 니콜라스라는 12세 소년이 죽었는데, 어머니가 이웃 주민과 함께 시체를 먹은 후 “머리, 발, 어깨, 척추골, 갈비뼈 일부만 남았다.” 당국은 이런 상태에 처한 사람들에게 노동을 강요했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고 가서 총살에 처하거나 굶어 죽게 만들었다. 하루 평균 1만5000명씩 아사자가 나오는 현상이 8개월 동안 계속됐다. 이 기간 중 우크라이나 인구의 12%가 사라졌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다. 카자흐스탄 또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전통적으로 이 지역 주민들은 목축을 하며 살아갔는데, 스탈린은 이 지역을 혁신한다며 생활 방식을 강제로 바꾸었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주민들을 정주하도록 하고, 목축 경제를 집단화했다.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정책은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1931~1933년 기간에 가축 수가 90%나 줄었다. 정부 정책에 격렬히 저항한 카자흐 주민들은 가축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도살한 후 시베리아나 중국의 신장 지역으로 도주하려 했다. 경제의 기반이 무너지자 심각한 기근 사태가 일어났다. 3년 동안 국민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0만 명이 굶어 죽었다. 그럼에도 소련 당국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정책이 사회주의적 진보라고 강변했다. 비슷한 사례로, 수십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19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대의 상황은 남이나 북이나 언급 자체를 피하지만 이 역시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들에 둘러싸여 오랜 기간 국가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다. 처음 제대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소련 몰락 이후인 1991년 이후다. 이제 독립과 자유가 무엇인지를 경험해 본 이상 또다시 타 민족의 지배하에 깔려 사는 것은 감내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는 과거 민족 말살에 가까운 착취를 했던 러시아가 아닌가. 러시아에 주권을 빼앗기느니 목숨 바쳐 싸우고자 하는 데에는 우크라이나 민족의 아픈 역사 경험이 깔려 있다.

 

[홀로도모르]

 

우크라 민족주의 말살하려 고의로 대기근 유발해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단어를 만든 폴란드 법학자 렘킨(Rafał Lemkin·1900~1959)은 1930년대 우크라이나의 기근 사태 또한 제노사이드에 속한다고 보았다. 스탈린 당국은 생존이 위협받으리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강압적인 방식으로 식량을 유출하여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연구자들은 이 사태를 홀로도모르(Holodomor)라고 부른다. 이 말은 굶주림을 뜻하는 ‘골로드(golod)’와 탈진시켜 죽인다는 뜻의 ‘모르(mor)’를 더해 만든 단어다. 이 단어를 사용하면 가혹한 수탈 정도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농촌은 장구한 세월 이어져온 전통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강압적 러시아화와 사회주의 경제 조치에 저항했다. 그 때문에 소비에트 당국은 기근을 유발하여 이 세계를 몰락시키려 한 것이다. 1930년 ‘프라우다’지는 “집단화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반을 파괴하는 특별 임무를 맡는다”고 명백하게 표명했다. 당시 곡물 징발만 없었다면 우크라이나의 수확량은 모든 사람이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정체성 확립에 홀로도모르는 핵심 요소다.

 

이 사태를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 20세기 초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사건과 같은 성격의 제노사이드라고 공식 인정한 나라는 미국, 캐나다, 폴란드, 바티칸, 브라질 등 24국에 달한다. 다만 유엔이나 유럽의회는 이 사건이 제노사이드는 아니되 ‘비인도적 범죄(crime against humanity)’라고 결정했다. 물론 러시아 학계는 우크라이나 기근 사태는 그 당시 소련 여러 지역을 덮친 식량 위기의 지역적 사례일 뿐이라며 제노사이드라는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2-03-15)-

________________

 

 

‘경제 자립’이라는 환상

 

무리한 전쟁으로 경제위기 자초한 푸틴
제재와 고립 길어지면 국민 고통만 늘뿐

 

요즘 러시아 경제 상황에 대한 소식을 듣다 보면 전쟁은 오직 우크라이나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웃나라를 무력 침공한 대가로 서방의 ‘제재 폭격’을 맞은 러시아는 지금 국민들의 일상 곳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다. 마트에서는 생필품 사재기가 벌어지고, 은행과 환전소는 현금을 확보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생긴다. 전자제품 등 수입품 가격은 일주일 사이에만 10% 넘게 치솟아 가격표를 매일 바꿔 달아야 할 지경이다.

제재는 러시아 산업의 자존심에도 깊은 상처를 냈다. 소련 시절부터 기술 자립의 상징이었던 ‘라다’ 자동차는 부품 수입이 막히자 지난주 공장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필요한 치료제가 동날까 봐 잔뜩 약을 챙겨다가 독일로 도망치듯 떠났다는 부부의 이야기도 화제가 됐다. 러시아는 당초 서방의 제재 위협이 쏟아질 때는 “할 테면 해보라”며 상당한 자신감을 과시했다. 미국 언론도 그동안 “러시아가 외환보유액을 넉넉히 쌓고 서방 의존도를 줄이는 ‘경제 요새화(fortification)’를 진행해 제재를 오래 견딜 것”이라는 식의 분석을 내놨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요새란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국민들만 상상을 초월한 고통에 내몰리고 있다.

이론적으로 한 나라가 오랫동안 고립을 버티려면 실로 완벽에 가까운 경제 구조가 필요하다. 농산물과 원자재는 자급자족에 충분해야 하고, 모든 핵심 첨단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과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탄탄한 내수시장이 있어야 한다. 또 어떤 충격에도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축통화 역시 필수 아이템이다. 세상에 이 모든 걸 갖춘 나라는 찾기 힘들다. 세계 유일 경제 강국이라는 미국도 팬데믹에 글로벌 생산이 주춤하자 공급망 위기와 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으로 정권이 흔들리는 위기까지 겪었다. 요즘 같은 글로벌화 시대에 홀로서기가 어려운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그중에서도 러시아는 국제사회의 제재에 가장 취약한 나라로 꼽혀 왔다. 에너지 수출로 대부분의 외화를 벌고 주요 공산품은 수입에 의존하는 천수답(天水畓) 경제 구조로는, 외부와 무역이나 금융이 차단되면 스스로 버틸 방도가 없다. 당국이 아무리 금리를 올리고 외화 반출을 통제한들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을 거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이런 허점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이어가며 반영구적 자립 경제를 이루겠다는 환상을 꿈꿨다. 현실은 물론 정반대다. 제재 며칠 만에 나라는 부도 위기에 몰렸고, 고달픈 국민들은 삶의 터전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국경을 넘고 있다. 러시아가 제재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크라이나가 빨리 무너질 것’이라는 예상과 함께 이번 전쟁에 임하는 푸틴의 두 가지 결정적 오판(誤判)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 발로 나라 문을 걸어 잠그며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도 있다. 잇단 도발로 제재를 자초하고, 방역을 이유로 모든 교역을 중단한 채 지내온 북한 정권도 평소엔 ‘자력갱생’이라는 허망한 구호를 외치며 주민들을 속여 왔다. 무역과 기술 도입에 의한 경제 발전을 ‘외세의 노예가 됐다’고 비난하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면서 금전적 보상이나 취해 온 북한의 현실은 지금 모두가 다 아는 대로다. 이 세상 독재자들이 ‘자립’ ‘애국’ 같은 허울 좋은 말을 내세워 외부와 담을 쌓는 진짜 목적은 자신들의 체제 유지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유재동 뉴욕 특파원, 동아일보(22-0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