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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혁명] [공산혁명과 맞바꾼 철도 건설] [러시아혁명 100주년]

뚝섬 2022. 11. 7. 10:50

[10월 혁명] 

[공산혁명과 맞바꾼 철도 건설] 

[러시아혁명 100주년]

 

 

 

10월 혁명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Manic Street Preachers ‘The masses against the classes’(2000)

 

1917년 11월 7일 민심을 읽지 못한 케렌스키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의 거점인 페트로그라드 겨울궁전이 혁명군에게 장악되면서 10월 혁명은 완료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썼기 때문에 10월 25일이다.) 인류 역사 최초의 노동자 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사실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에겐 수많은 기회가 있었다. 러일전쟁의 패배와 1905년 2월 혁명으로 두마(의회) 설치를 비롯한 투표권 확대 각종 기본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면 영국처럼 입헌군주국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충분히 지킬 있었을 것이다. 스톨리핀 총리의 경제 개혁으로 민생도 안정되고 있어서 레닌이 혁명은 글렀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전제군주정을 포기하지 못했고 무리였던 1 세계대전의 참전과 내정의 실패로 그가 믿었던 제국 군대마저 혁명으로 돌아서면서 왕조는 종말을 맞았다.

 

“계급에 저항하는 대중들/이유를 대는 것도 이젠 지겨워/우리가 믿는 것이 미래일 때/우린 겨울을 사랑하지/겨울은 우릴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니까(The masses against the classes/I’m tired of giving a reason/when the future is what we believe in/We love the winter it brings us closer together).”

 

영국 웨일스의 광산촌 출신의 록밴드 ‘미친 거리의 전도사들’은 대처리즘으로 무너진 영국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로 이루어진, 진지하고 확고한 좌파적 세계관에 기반한 비판적인 사유를 담은 노래들로 주류로 진입한 극히 드문 이단아들이다. 이들은 ‘자본론’을 읽으라고 설교하고 ‘적들’의 정체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라고 독려한다. 이 밴드는 쿠바에서 공연을 가진 최초의 영미 밴드가 된다.

하지만 밥 딜런이 일찍이 지적한 것처럼 세상은 끝없이 변한다. 지금 푸틴의 러시아는 11 7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공휴일에서 제외시켜 버렸고 혁명으로 폐지되었던 러시아 제국의 탄생일을 국경일로 부활시켰다. 지하의 레닌은 자신의 현재 조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강헌 음악평론가, 조선일보(2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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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혁명과 맞바꾼 철도 건설

 

[차현진의 돈과 세상] 

 

냉탕과 온탕에 몸 담그기를 반복하다 보면, 정신이 몽롱해진다. 국가도 그렇다. 19세기의 제정 러시아는 공포정치와 자유주의를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공산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나폴레옹이 뿌려놓은 법치주의와 시민 평등사상이 러시아에도 밀어닥쳤다.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군주제도가 붕괴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구체제를 수호하는 ‘유럽의 헌병’임을 자처하고 공포정치로 일관했다. 그 아들 알렉산드르 2세는 정반대였다. 병역 부담을 줄이고 검열을 폐지했으며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서 농노까지 해방했다. 미국보다 빨랐다. 그러자 기득권을 빼앗긴 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까지 그를 싫어했다. 개혁이 너무 느리다는 이유로 그에게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그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3세는 아버지를 죽인 자유주의자들에게 이를 갈며,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렸다. 전제군주제를 강화하고 반대 세력은 잔인하게 처형했다. 공산혁명의 주인공 블라디미르 레닌의 친형도 그에게 처형당했다. 정치를 후퇴시킨 알렉산드르 3세가 경제 근대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드넓은 국토 개발을 위해 특히 철도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크림전쟁 때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화해하고 프랑스 차관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사를 시작했다. 그는 죽으면서도 아들 니콜라이 2세에게 횡단철도 완성을 유언으로 남겼다.

 

10년 뒤 마침내 그 유언이 성취되었다. 그러자 그 노선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본이 자기들의 만주 철도와 연결하자고 제안했다. 1909년 10월 26일 코코프초프 러시아 재무상이 일본과 담판하려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날 회담은 무산되었다. 일본 대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했다. 1881년 3월 13일 알렉산드르 3세가 황제에 올랐다. 그는 물질적 근대화에 집착했지만, 정치 근대화는 외면했다. 거기서 공산혁명이 잉태되었다. 경제 발전 못지않게 정치 발전도 중요하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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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주년

 

잇따른 전쟁·식량난으로… 첫 사회주의 국가 탄생 

20세기 초 황제가 다스리던 러시아, 농민·군인 혁명으로 임시정부 수립
레닌, 전쟁·가난 지속되자 봉기 주도… 소련 세웠지만 74년 만에 붕괴

 

"레닌은 살아있다! 자본주의는 사라져라!"

지난 7일(현지시각),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레닌 광장에 모인 시위대가 외친 구호입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탄생시킨 '러시아 혁명'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아 집회가 열린 것이지요. 하지만 광장엔 200여명만 모였을 뿐이고 정부도 따로 공식 행사를 열지 않았을 정도로 분위기는 썰렁했다고 해요.

1917년 11월 7일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10월 혁명' 또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불린답니다. 당시 사용했던 러시아 달력(율리우스력)으로 10월 25일 발발해 '10월 혁명'이라고 부르고, 러시아 급진 공산당의 별칭이었던 '볼셰비키' 이름을 따서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말하지요. '러시아 혁명'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어요. 100년 전,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혁명은 과연 어떤 사건이었을까요?

◇"빵을 달라!" "전쟁을 멈춰라!"

20세기 초 제정(帝政·황제가 다스리는 제도) 러시아는 나라 안팎으로 큰 위기에 빠져 있었어요. 주변 나라들과 잇따른 전쟁으로 나라 살림은 궁핍해져가고 있었는데, 황제(차르)와 봉건 귀족들은 이를 극복할 의지가 없었지요. 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와 봉건 영주가 절대 권력을 누리며 농민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었어요.

이런 와중에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을 결정합니다. 황제는 농사짓고 물건 만들던 젊은 사람들을 계속 전쟁터로 끌고 갔지요. 계속된 전쟁과 가난으로 농업과 공업 모두 황폐화되면서 대중의 삶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어요.

1917년 3월 8일(러시아 달력 기준 2월 23일),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던 농민들이 '더 이상 식량이 없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나 시위를 벌입니다. 영하 20도 가까운 강추위에 그들이 외쳤던 건 "빵을 달라!" "전쟁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지요.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시위를 진압하려 했지만, 잇따른 전쟁에 지친 군부는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히려 농민 시위대에 합세했어요. 농민과 노동자, 군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대표들로 구성한 '소비에트(대표자 회의)'를 결성합니다. 위협을 느낀 황제는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고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렸지요. 이를 '2월 혁명'이라고 해요.

황제가 퇴위하자 공화국 임시정부가 구성됐는데요. 대중의 바람과 달리 임시정부는 '전쟁 계속'을 선언했답니다. 임시정부의 지지 세력 중 상당수가 부르주아(자본가)였는데, 이들이 전쟁을 계속 원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던 중 유럽에서 망명 생활을 해오던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10여년 만에 고국 러시아로 귀국합니다. 앞서 레닌은 황제에 반대하는 혁명 운동을 벌이다 발각돼 외국을 떠돌며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1917년 10월 소비에트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레닌의 모습을 그린 그림. 러시아 혁명으로 건설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91년 붕괴했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레닌은 곧바로 '4월 테제(April Theses)'를 발표했는데요. 여기엔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토지 몰수와 국유화, 소비에트의 생산·분배 통제 등 사회주의 강령을 담고 있었어요. 여기서 레닌은 "조국에게 패배를"이라는 충격적인 반전(反戰) 구호를 외쳤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면서 터진 것인데, 이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이 피를 흘리고 있으니 차라리 조국이 빨리 패배해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주장이었지요.

민주주의 무시하고 독재로 나가다

레닌을 필두로 하는 볼셰비키는 '무능한 임시정부에 봉기를 하자'고 결의합니다. 무기를 든 볼셰비키는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1917년 11월 7일(러시아 달력 기준 10월 25일) 거의 무혈(無血)로 군사 작전을 완료합니다. 중앙은행·전화국·우체국·중앙역·발전소·재무성을 차례로 접수했어요. 임시정부가 있던 황궁으로 쳐들어갔는데 이미 각료들은 도망간 뒤였지요. 이렇게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공화국(소련)'이 세워집니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것이지요.

레닌의 볼셰비키는 전쟁 중단, 토지 무상몰수, 8시간 노동법, 신분제 차별 폐지 등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내놓았어요. 하지만 정작 의회를 구성하는 선거에서 온건파인 사회혁명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면서 강경파인 볼셰비키는 어려움에 처했지요민주주의 원칙을 지키고 소수 급진세력에 머물 것인지, 의회를 무시하고 독재 정권으로 나아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결국 다음해 1월, 볼셰비키는 사실상 의회를 강제 해산하고 독재 정권의 길을 걷습니다.

권력을 잡은 레닌은 전쟁에서 발을 빼기 위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 조약(전쟁 종료·평화 회복을 선언하는 조약)을 맺었어요. 하지만 상당한 배상금과 영토를 주고 맺은 조약이었기에 전쟁 중단을 반대하던 정치 세력들로부터 큰 불만을 사게 됐지요. 러시아의 전쟁 참여를 계속 원했던 영국·프랑스 등과의 사이도 나빠졌어요.

이렇듯 새로 출발한 소비에트 공화국은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데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최악의 상황 속에서 출발합니다. 레닌은 이런 문제들을 생전에 해결하지 못하고 1924년 세상을 떠났고, 이후 소련은 스탈린 독재 체제로 이어졌지요.

20세기 역사는 자본주의와 한 축을 이뤘던 사회주의를 빼놓고는 논하기 어려워요노동자 계급 정당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세운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 혁명을 통해 노동자·농민·여성들의 지위가 그전보다 올라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랍니다.

하지만 대중의 자발적인 뜻과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고 소수 급진파 엘리트들이 독재를 했다는 점, 대중의 궁핍한 상황을 정치에 이용하고 적절한 대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는 점 등은 치명적인 한계로 지적되고 있어요.

 

마지막 황제의 최후

 

‘2월 혁명’으로 퇴위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가족과 함께 수도 근교 왕궁에 유폐·감금됐어요. 하지만 임시정부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황제 일가를 시베리아로 이주시키기로 하지요. ‘10월 혁명’이 성공하고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어요. 우랄 지방에 머물고 있던 황제 일가는 1918년 7월 볼셰비키 당원들에 의해 살해됩니다. 황제 일가가 처형됐던 집터엔 현재 ‘피의 사원’이 세워져 비극적 역사를 기억하고 있지요. 한때 니콜라이 2세 막내딸 아나스타샤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어요.

 

-이정하·천안 계광중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7-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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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 100주년

 

꼭 100년 전 오늘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음산한 날씨였다. 이따금 뼈를 시리게 하는 차가운 가랑비가 내렸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 귀족 딸들이 신부 수업을 위해 다니던 스몰니학교는 북적대고 있었다. 낡은 군복을 걸치고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은 퇴역 군인, 노동자들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웅성거렸다. 몇 달 전 황제를 내쫓고 구성된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모인 소비에트(대표자회의) 멤버들이었다. 그 안에 망명지 핀란드에서 돌아온 혁명가 레닌이 있었다.

▶이튿날 무장한 볼셰비키들이 중앙은행·전화국·우체국·중앙역·발전소·재무성을 차례로 접수했다. 네바강에 정박해 있던 순양함 오로라호가 황궁인 겨울궁전 쪽으로 포탄을 쏜 걸 신호로 볼셰비키들이 일제히 황궁으로 쳐들어갔다.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는 이미 도망간 후였고 대부분의 각료는 바로 투항했다. 레닌은 최초의 공식 연설에서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국가 권력은 우리 소비에트에 이양됐다. 노동자·군인·농민의 혁명 만세!" 

 

▶러시아혁명이 내일 7일로 100주년을 맞는다. 흔히 '10월 혁명' '볼셰비키혁명'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러시아 구력(舊曆·율리우스력) 10월 25일이 오늘날 통용되는 그레고리력으로 11월 7일에 해당한다. 이런 걸 '시작은 창대했는데 나중이 미약했다'고 해야 할까. 러시아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실험'으로 일컬어지고 그 결과 태어난 소련은 한때 세계 절반을 호령한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70여년 만에 처참한 실패로 귀결됐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기념행사는 러시아에서조차 외면받을 정도로 썰렁하다고 한다.

▶크렘린 대변인은 "왜 그런 걸 경축해야 하나"라고 했다. 러시아 공산당은 하원(두마) 450석 중 42석을 점할 뿐이어서 대대적 기념식을 얘기할 형편이 못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200여 미술관 가운데 혁명 100주년을 주제로 전시회를 여는 곳은 사립 미술관 하나뿐이다.

▶혁명은 피를 요구하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들 한다. 자기들 피는 흘리지 않고 혁명의 수혜만 누리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일수록 다음날 보수적으로 돌변한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은 러시아혁명을 평가하는 잣대로도 훌륭하다. 러시아혁명은 효율적 실현을 위해 잘 짜인 조직과 엄격한 위계질서를 필요로 했다이는 새로운 특권과 불평등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레닌의 동상들이 고철로 돼 사라지고 이제는 러시아혁명의 기억조차 희미해진 걸 보면 '혁명'은 역시 쉽게 입에 올릴 말은 아니다.

 

-김태익 논설위원, 조선일보(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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