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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고수들의 선한 선문답] [쫓겨난 총리, 그러나 행복했던..]

뚝섬 2022. 11. 6. 05:14

[정치 고수들의 선한 선문답] 

[쫓겨난 총리,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총리]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정치 고수들의 선한 선문답

 

전쟁과 혁명의 세기였던 20세기, 그 가운데 인류에게 희망을 보여준 시기가 있었습니다. 독일이 통일된 1990년 전후입니다. 지금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푸틴,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며 홍콩을 중국 체제로 편입하고 대만 무력 합병을 위협하는 시진핑 등 권위주의적 지도자들 때문에 세계 평화와 안정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트럼프에게서 시작한 미국 우선 정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전후의 시기엔 상대방을 배려하며 인류애와 인류 평화를 실현하려는 정치 지도자가 많았습니다. 그들 가운데 국가 수뇌는 아니지만 서독과 소련의 외무 장관인 겐셔셰바르드나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신뢰와 배려에 바탕을 둔 협상 과정을 보노라면 진한 감동을 느낍니다.

 

1989년 11월 9일 동독 정치국 대변인이 기자회견에서 실수하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해 독일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지만, 통일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소련의 협력을 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소련 정부로서는 당시 독일 통일을 찬동하기에는 큰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우선 소련 국민의 반(反)독일 정서 때문입니다. 소련 사람들에게 독일은 자국민 2500만명을 희생시킨 악마와 다름없었습니다. 이 점을 의식해서 두 외무 장관은 최초 회담을 소련의 작은 도시 브레스트에서 열었습니다. 그곳은 전쟁 초기 독일 침공으로 큰 피해를 본 곳으로 셰바르드나제의 고향이었고 그의 형도 그곳에서 전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벌이는 회담은 비극의 역사는 잊지 않되 새 시대를 열어가야 함을 암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겐셔는 회담 시작 전에 전쟁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함으로써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다음 회담은 1주일 후 서독의 뮌스터 시청에서 열렸습니다. 그곳은 1648년 유럽 대륙을 전쟁터로 만들었던 30년전쟁이 끝나고 강화조약을 체결한, 화해와 새 출발이라는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데 한 원인이 된 동독 탈출 난민들의 체코 프라하 소재 서독 대사관 난입 사건 때에도 그들은 서로 협조하였습니다. 1989 9 28 동독 탈출 난민 4000 명이 대사관에 난입해 서독 망명을 요구합니다. 당시 유엔 총회가 열릴 때라 두 장관은 뉴욕에서 만나 협상을 벌입니다. 협상이 아니라 서독의 일방적 협조 요청입니다. 동독 정부에 영향력이 있는 소련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겐셔의 설명을 듣고 있던 셰바르드나제는 “그들 가운데 아녀자와 아이는 몇 명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겐셔 장관이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겐셔는 주저 없이 “750명 정도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셰바르드나제는 “아녀자와 아이들의 고통이 심하겠군요. 본국에 연락하여 협조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회담장에서 나오면서 겐셔의 보좌관이 물었습니다. “장관님, 750명은 무슨 근거로 말씀하셨습니까?” 겐셔는 “훌륭한 외교관은 평소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하며 웃었습니다. 셰바르드나제는 협조하고 싶었고 합당한 인도적 명분을 만들어 본국을 설득하고 싶었기에 넌지시 아녀자들의 숫자를 물었고, 이를 알아챈 겐셔는 그에 맞게 화답한 것입니다. 정치 고수들이 역사를 만들어 가는 선(善)한 선(禪)문답이었습니다. 겐셔는 곧 프라하로 날아가 난민들의 서독 이송을 진두지휘합니다. 당시 겐셔는 심장병을 앓고 있어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제가 당시 겐셔 장관 보좌관이었던 분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이런 치밀한 계산과 배려는 정치 지도자의 상호 신뢰, 존중과 우정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결국 국가 외교 관계도 인간관계의 연장입니다. 오랜 경험과 경륜을 가진 지도자들이 필요하고, 밉든 곱든 정치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에 앞서 필요한 것은 좋은 자질과 인품을 지닌 지도자를 갖는 것입니다.

 

한독포럼 참석차 베를린으로 떠나려니, 20세기 말 그 좋았던 시절의 정치인들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안타까운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가능성을 현장 가까이서 알아볼 작정입니다.

 

-김황식 국무총리, 조선일보(2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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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총리, 그러나 가장 행복했던 총리

 

연초에 독일 총리들의 리더십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책에서 콘라트 아데나워부터 앙겔라 메르켈까지 8명의 총리는 모두 성공한 총리였다고 결론 지은 탓인지, 많은 이들이 그래도 어느 총리를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습니다.

 

모두 시대 상황에 맞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어 어느 한 사람을 앞세우기가 주저되었습니다. 그러나 생각 끝에 헬무트 슈미트 총리라고 답하기로 하였습니다. 그 유명한 라인강 기적의 아데나워, 동방 정책의 브란트, 독일 통일의 콜도 아니고 슈미트라니, 그리고 역대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하여 쫓겨난 그 사람이라니 하는 반응이 따랐습니다. 당연히 그 이유를 궁금해하였습니다. 제가 그들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살펴보아 존경할 만하고 행복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분이 슈미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에서 물러난 뒤 여생을 시사 주간지 ‘디 자이트(Die Zeit)’의 공동 편집인으로 일하며 독일이나 세계의 문제를 분석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시민들도 그를 ‘독일의 현자’라 부르며 존경하였고 이슈가 생기면 우선 그의 견해를 듣기를 원했습니다. 줄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그에겐 방송 중에 흡연이 허용될 정도였습니다.

 

슈미트는 전임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총리실에 숨어든 동독 간첩 때문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총리직을 승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브란트가 책임지고 퇴임할 일이 아니라며 한사코 퇴임에 반대하였습니다. 자신에게 넘어올 총리직을 밀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참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의 집권 당시 적군파 등 테러리스트들이 주요 요인을 납치하여 구속된 테러 분자들과 교환을 요구하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무고한 요인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불법과 타협하는 것과 국가 질서를 지키기 위해 타협을 거부하는 것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서 그는 괴로워하면서도 후자를 선택하였습니다.

 

1977년 10월 91명을 태운 여객기가 모가디슈로 납치되었을 때도 협상을 거부하고 특공대를 투입하여 테러 분자를 사살하고 인질들을 석방시켰습니다. 실패하는 경우 퇴임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슈미트와 아내 로키는 자신들이 납치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인질 교환은 절대 하지 말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이를 연방 정부 문서실에 남겨놓았습니다.

 

그는 소련이 동구권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자 나토와 협력해 핵미사일을 배치, 무력의 균형을 도모하고 아울러 협상을 통하여 핵을 폐기 또는 감축하고자 하였습니다. 무력의 균형이 없는 평화는 굴종의 평화일 뿐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당원 및 평화 운동가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았고, 이 때문에 의회 불신임 결의로 총리직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슈미트의 이 ‘이중 결정’은 훗날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는 안보의 토대가 됩니다.

 

슈미트와 아내는 68년을 해로하였습니다. 열 살 때 학교 친구로 처음 만났으니 알고 지낸 것은 무려 82년입니다. 이혼하거나 일찍이 사별하여 어려움을 겪었던 다른 총리들과 달리, 해로한 기간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슈미트 스스로 자신은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만하고 냉혹한 사람으로 통하는 결점이 있었지만,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아량이 넓고 마음이 따뜻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주었으며, 자신에게 쏟아진 찬사는 아내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한 슈미트가 한 번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는데, 이혼하자는 아내에게 슈미트는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는 슈미트의 단호함에 그를 용서했고 일생 단 한 번의 위기를 극복하였습니다. 이런 사실까지도 솔직히 공개하는 슈미트. 그는 지혜와 신념의 정치인일 뿐 아니라 부부 관계가 이상적이었던 정치인이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를 가장 행복한 총리로 내세우는 이유입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조선일보(22-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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