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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 속 혼자 웃는 ‘37세 군주’.. 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뚝섬 2022. 11. 12. 07:49

[경제 위기 속 혼자 웃는 ‘37세 군주’… 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의 미래, 비키니와 홍해 프로젝트]

 

 

 

경제 위기 속 혼자 웃는 ‘37세 군주’… 개혁가인가, 독재자인가

 

17 방한 사우디 왕세자
무함마드 살만 대해부

 

지난 7일 이집트 휴양지 샤름 엘 셰이크의 한 호텔에서 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 참석한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그는 문화적으로는 개방 정책을, 경제적으로는 탈석유 정책을 시행하며 사우디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29일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밤거리로 유령, 마녀 분장을 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우디 여성들은 검은색 아바야를 벗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 이 행사는 사우디 정부 후원으로 열린 ‘공포의 주말’, 사실상 할로윈 데이 행사였다.

 

이는 사우디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사우디는 이슬람교의 발상지로, 핼러윈뿐 아니라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같은 ()이슬람권 기념일은 축하하는 자체가 금기였다. 그러나 이날 거리 축제를 연 사람은 현재 왕위 계승자이자 총리인 무함마드 살만(37). 공식 직함은 왕세자지만,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올해 87세인 그의 아버지는 2019년 이후 공식 석상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 권력자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달려간다. 앙숙이었던 조 바이든 미 대통령도 지난 7월 자존심을 굽히고 사우디를 방문했다. 3연임을 통해 ‘황제’가 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오는 12월 사우디를 방문할 계획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는 이미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각하기로 유명한 푸틴이 살만을 만날 때는 평소와 달리 일찍 도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전 세계 군주들을 손에 쥐고 흔드는 그가 오는 17일 한국에 온다. 2019년 이후 3년 만이다. 빈 살만은 누구이고, 왜 전 세계는 그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걸까.

 

존재감 없던 과묵한 왕자

 

무함마드 빈 살만은 1985년 8월 31일 리야드에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과 그의 세 번째 부인인 파다 빈트 팔라 알 히슬레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없다. “과묵하고 차가운 성격으로 아버지 뒤를 따랐다”는 정도다. 어머니는 부족원이다. 호주 언론 파이낸셜 리뷰는 “유년 시절 급우들은 아무도 빈 살만과 축구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들은 빈 살만보다 승계 순위가 높아 보이는 그의 사촌들과 노는 것을 선호했다”며 “빈 살만이 그의 아버지가 첫 번째 아내와 사는 궁을 방문했을 때도, 이복형들은 빈 살만을 ‘베두인족(아랍의 유목민)’의 아들이라고 조롱했다”고 보도했다. 왕실 가족들이 찍힌 사진에서도 그는 항상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해외 유학을 다녀오지 않고, 리야드에 있는 킹 사우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020년 출간된 책 ‘피와 기름(blood and oil)’엔 “그가 해외 유학을 거부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고 해외 문물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그는 아이폰을 좋아하고, 미국 비디오 게임 ‘콜 오브 듀티’를 즐겨하는 E스포츠 팬이다.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 신혼여행을 일본과 몰디브로 다녀왔다고도 한다. 일본 게임회사 SNK도 인수했고, 국내 게임회사인 넥슨과 엔씨소프트의 지분도 갖고 있다.

 

빈 살만이 국제 뉴스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2015년이다. 아버지가 왕으로 즉위하자, 그가 30 나이로 최연소 국방장관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사우디가 예멘 내전에 개입하고, 카타르와 단교하며, 레바논을 압박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후 살만은 국영석유회사사우디 아람코 총괄하며 경제권도 가져온다. 2016년엔 사우디 경제가 석유 의존에서 벗어나는 ‘비전 2030′을 발표하고, 이듬해 ‘네옴(NEOM)’이라 불리는5000억 달러 규모의 거대도시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3일에는 대만 폭스콘과 합작해 사우디 전기차 생산 계획도 발표했다. 한 사우디 왕족은 “빈 살만은 오래전부터 권력을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항상 자신의 이미지를 신경 쓰고 있었다”고 뉴욕타임스에 말했다. 그는 술과 담배도 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놀지도 않는다. 공식적으로 부인도 한 명으로, 3남2녀를 두었다. 미 외교전문지 애틀랜틱과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마다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고 말했다.

 

개혁 군주인가, 독재자인가

 

올해 37세인 빈 살만은 문화적으로 ‘개혁 군주’다. 2017년 그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을 허락했고, 아바야를 벗도록 했으며, 스포츠를 관전하게 했다. 종교 경찰에게서 체포 권한을 빼앗고, 여성에 대한 남성의 후견인 역할도 상당 부분 삭제했다. 사우디에서 음악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도 빈 살만 덕분이다. 살만은 30 미만의 사우디인 58% 오락에 굶주려 있고, 이로 인한 외화 유출도 상당하다고 분석한 , 경제 개발의 일환으로 엔터테인먼트 개발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2018년 영화관을 합법화했고, 2019년부터는 해외 가수들의 콘서트를 허락했다. 이후 머라이어 캐리를 시작으로 방탄소년단, 저스틴 비버 등이 공연했다. 내년 1월에는 K팝 그룹 ‘블랙핑크’의 콘서트도 예정돼 있다.

 

그의 개혁 방향과 달리 한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그에 대한 시선은 냉랭했다. 왕세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잔혹함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을 무력 통일해 1932년 건국했다. 국가 운영은 오로지 왕족이 독점해 왔다. 왕족 내 수많은 왕자들은 요직을 나누는 것으로 견제와 상호 감시를 했다. 관례를 깨고 권력을 독점화한 최초의 인물이 살만이다.

 

살만 국왕이 즉위했을 왕세자는 살만의 사촌형인 무함마드 나예프였다. 살만의 형인 나예프의 아들이었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FBI 보안과정, 영국 대테러부대 훈련 등을 받은 그는 미국의 입장에서 편안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2017 살만 국왕이 자신의 아들 살만을 왕세자로 임명하면서, 나예프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로 자진 사퇴였지만, 이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후 사우디에서는 유력자들이 부패 등의 혐의로 속속 구속됐는데, 그중에는 무타이브 빈 압둘라 왕자 방위부 장관도 있었다. 2017년 사우디를 탈출한 사드 알 자브리 사우디 전 정보국장은 미국 CBS와 인터뷰에서 “그는 무한한 자원을 가진 살인자이자 감정이 없는 사이코패스”라고 했다.

 

친트럼프, 반바이든

 

미국 언론들은 이를 가능하게 것이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분석한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후 첫 국빈 방문국이 사우디였다. 사우디는 환영 인사로 1100억 달러의 무기 매각 계약을 맺었다. 이후 한 달 뒤 빈 살만이 왕세자로 승격됐다. 바이든과는 선거 때부터 앙숙이었다. 바이든은 빈 살만을 ‘왕따(pariah)’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2018년 발생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 배후에 빈 살만이 있다며 공격했다.

 

이는 미 정부의 중동 정책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트럼프는 살만을 군주로 대우하고, 중동의 축을 사우디에 두면서,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화해시킨 나라를 이란과 대립시켜 중동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든은 사우디를 중동의 중심에 놓지도 않고, 살만은 패싱하면서, 이란과의 협상을 통해 이란 자체의 위험도를 낮추려는 방법을 택하려고 했다.

 

그러나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모든 상황이 변했다. 물가가 급등하고 글로벌 경제가 침체기에 들어섰지만, 사우디는 유가 급등이라는 호재를 맞았다. 전 세계가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사우디의 투자와 지원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사우디의 ‘네옴시티’는 토목부터 신재생에너지, 인공지능 등 현존하는 모든 산업 분야의 기술이 집약되는 사업이다. 수주에만 성공한다면 제2의 사우디 중동붐을 통한 경제 회복을 노릴 수 있다. 이를 위해 최근 정부는 GS건설과 현대건설, 삼성물산 등 22개 민간기업이 ‘원팀’을 구성해 사우디에서 ‘한-사우디 혁신 로드쇼’를 개최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우디와 2030 세계박람회 개최를 두고 한국이 경쟁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당장 앞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이 취소된다는 말이 나오자, 각 기업에서는 부산엑스포가 변수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빈 살만의 별명은 ‘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 추정 재산 2조 달러로 뭐든 다 할 수 있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이혜운 기자, 조선일보(2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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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아라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약칭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동 및 서아시아에 있는 전제군주국이다. 2,207,651 km2 에 달하는 영토를 자랑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아랍국가이며,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전체 아랍권 국가들 중에서는 알제리에 이어 두번째로 면적이 넓은 국가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북쪽으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쿠웨이트가 있고, 동쪽으로는 카타르, 바레인, 아랍에미리트가 있으며 남동쪽에는 오만, 남쪽에는 예멘이 있다. 다만 이집트와 이스라엘과는 아카바 만으로 인하여 서로 분리되어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홍해와 페르시아 만에 둘다 해안선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토 대부분은 건조한 사막지대와 산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8년 10월에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는 중동에서는 가장 거대하고 세계에서도 18위권에 드는 규모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도 가장 젊은 국가들 중 하나인데, 3,340만 명에 달하는 인구 중 50%에 달하는 사람들이 25살 이하이기 때문이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가 세워진 곳은 고대 문명이 번성한 유서깊은 지역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고대 역사는 인류 역사의 여명기로 거슬러올라가며, 세계 제2의 종교인 이슬람교도 바로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지역에서 7세기 초에 생겨났다. 이 때 이슬람교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의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통일하고 동일한 이슬람 공동체로 묶었던 것이다. 무함마드가 632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들은 급격하게 영토를 늘려나갔고 이슬람교를 전 세계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전성기 때에는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기도 하였고, 동쪽으로는 파키스탄에 닿았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서 발흥한 아랍 왕조들에는 정통 칼리파조,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바스 칼리파조, 파티마 칼리파조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무수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이슬람 왕조들이 이 곳에서 번성하였다.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는 크게 하자즈, 네지드, 동부 아라비아, 남부 아라비아, 총 이 4개의 지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1932년에 이븐 사우드에 의하여 건국되었는데, 그는 1902년부터 원정을 펼쳐 4개의 지방들을 하나의 국가로 묶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현재도 절대적인 전제군주정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사우드 가문에 의하여 국왕직이 세습되는 구조이다. 극보수적인 와하비즘과 수니파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류 문화를 장악하고 있으며, 석유와 가스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자금을 가지고 이 사상을 전세계로 퍼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종종 ‘2개의 신성한 모스크의 땅’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메카에 있는 알 마스지드 알하람과 메디나에 있는 알 마스지드 안 나바위, 이 2개의 사원이 이슬람교 전체에서 가장 신성한 모스크들이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언어는 아랍어이다.

 

1938년 3월 3일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석유가 발견되었고, 이후 연이어 유전들이 발견되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이래 세계에서 2번째로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로 떠올랐고,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석유 매장량과 6번째로 거대한 가스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은행으로부터 고소득 국가로 분류되었고, 인간개발지수도 높은 편을 보이고 있다. 또한 아랍 국가로는 유일하게 G20에 가입한 나라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내전 개입, 이슬람 테러리즘 후원 의혹, 특히 심각한 여성 인권 침해와 시민권 탄압, 사형제의 남용, 무신론자와 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국가적 탄압, 국가적인 인종차별주의와 반유대주의, 샤리아법의 엄격한 적용 등으로 전세계적인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가 GDP의 8%를 군대에 쏟아부으며, 이는 오만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로 세계에서 3번째로 많은 양의 자금을 국방비에 투자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무기 수입국이었으며, 중동으로 수출하는 미국 무기들 중 절반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가져갔다. BICC에 의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 28번째로 군사화된 나라이며 군장의 질도 이스라엘 다음으로 세계에서 최고로 우수한 편에 손꼽힌다고 전한다. 그러나 최근들어서는 예멘 내전 간섭 등의 행동으로 인하여 국제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으며, 특히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당한 이후 그 목소리는 더더욱 커지고 있다.

 

역사

 

이슬람

 

이슬람교가 태어나기 이전, 현재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아라비아 반도 지역은 소수의 부족들이 살아가고 있는 사막 지대였다. 그러던 중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가 571년에 메카에서 태어났고, 7세기 초 경에는 무함마드가 자신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아라비아 반도의 다양한 부족들을 통일하고 동일한 이슬람교 공동체를 창조해내었다. 632년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이후, 무함마드의 후계자들은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여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동쪽으로는 파키스탄까지 수십년 만에 빠르게 영토를 늘리었다. 아라비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인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이슬람교는 이에 힘입어 세계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아랍인들은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의 하자즈 지방에 라쉬둔 칼리파조, 우마이야 칼리파조, 아바스 칼리파조, 파티마 칼리파조 등을 세웠다.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메카와 메디나 지방은 메카의 샤리프라고 하는 토착 지배자가 통치하였다. 허나 대부분의 경우, 메카의 샤리프들은 바그다드, 카이로, 이스탄불 등에 위치한 제국들의 간접적인 통치를 받았으며, 사우디아라비아가 세워지기 직전까지도 전통적인 토후국들이 갈래갈래 나뉘어 아라비아 반도를 각자 통치하고 있었다.

 

10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시아파의 한 부류인 이스마일파 계열의 까라마타파가 페르시아 만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930년경, 까라마타파는 메카를 침공하여 약탈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메카의 카바에 박혀있는 ‘검은 돌’을 훔쳐가면서 이슬람 세계의 공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결국 1077년, 아랍의 압둘라 빈 알리 알 우유니가 셀주크 제국의 도움을 받아 바레인 지방에서 까라마타파를 꺾고 우유니드 왕조를 세웠다. 우유니드 제국은 후에 시리아의 사막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1253년 경에 유스푸리드 왕조가 들어서며 멸망하였다. 한편 유스푸리드 왕조는 1320년에 페르시아인의 침공으로 세가 크게 약해졌고, 14세기에 이르자 자와니드 왕조가 동부 아라비아를 지배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15세기에 자브리드인들이 자와니드를 몰아내고 호르무즈 지방에서 대대적인 전쟁을 벌였으며, 이 전쟁은 1507년에야 끝났다. 이후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인들은 점차 오스만 제국의 통치 하로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 소규모의 반란이 있었으나 나중에는 이들조차 모두 오스만 제국군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오스만 제국

 

16세기, 오스만 제국은 홍해와 페르시아 만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였고, 술탄제를 선포하며 포르투갈인들의 홍해와 인도양 침입을 막아내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후 대략 400여 년 동안 중앙 정부의 권력이 세거나 약해짐에 따라 아라비아 반도 지역에 다양한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관적이지 못한 정책들은 이후 20세기의 아라비아 반도의 불확실성을 강화시켰고, 부족들간 분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븐 사우드,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국왕

 

사우드 가문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실인 사우드 가문은 1744년, 중앙 아라비아의 네지드 지방에서 발흥하였다. 가문의 시조인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종교 지도자이자 이슬람 극단주의 운동인 와하비즘의 창시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와 힘을 합쳤는데, 이 18세기에 맺어진 동맹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후대의 팽창 정책과 현재의 엄격한 전제군주정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사우디 제1왕국, 또다른 이름으로는 디리야 토후국은 1744년에 현재의 리야드 근처에 성립되었고, 빠르게 팽창하여 1803년에는 메카를 공격하여 얻어낼 정도로 번성하며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지방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 제국에 의하여, 1818년에 이집트 총독인 알리 파샤의 공격을 받고 181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이 과거의 영광을 잃고 쇠퇴하자 사우드 가문은 또다시 국가를 세워 이를 사우디 제2왕국이라 칭했다. 사우디 제1왕국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사우디 제2왕국은 네지드 지방에 위치하였는데, 1824년에 건국되었다. 이후 19세기 내내, 사우드 가문은 현재 아랍에미리트의 왕실 가문인 라시드 가문과 내분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결국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이 내분에서 승리하며 사우드 가문과 알 사우드는 1891년에 쿠웨이트로 피난가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의 지방에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라비아는 점차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독립의 움직임이 강해졌고, 부족장들이 모여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하였다. 1902년, 압둘 라흐만의 아들인 압둘 아지즈, 후에 이븐 사우드라 불리는 인물이 리야드의 통치권을 다시 되찾았고, 사우드 가문을 네지드로 귀환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후 이븐 사우드는 사우디 제3왕국을 세웠다. 이븐 사우드는 와하비즘 영향을 받은 부족군대 이크완의 지지를 받았고, 이븐 사우드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1913년에 알 아샤 지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강탈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916년,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의 도움을 받아 범아랍적인 반오스만 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통일된 아랍 국가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후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하자 결국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에서 패퇴할 수 밖에 없었고, 후세인 빈 알리는 헤자즈 왕국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이븐 사우드는 아랍에서 일어난 반란에 참여하기를 꺼렸고, 대신 알 라시드 가문과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알 라시드 가문을 꺾은 이븐 사우드는 네지드의 술탄직을 1921년에 얻어내었고 이크완의 지지를 등에 업고 후세인 빈 알리의 헤자즈 왕국을 1925년에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1926년 1월에 이븐 사우드는 스스로를 헤자즈의 왕으로 선포하였고, 이후 네지드의 국왕도 겸직하였다. 약 5년 동안 이븐 사우드는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을 따로따로 다스렸다.

 

헤자즈 왕국을 정복한 이후, 이크완들의 목표는 와하비즘의 세력들을 영국의 쿠웨이트, 이라크, 요르단 보호령 등지로 확장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점차 영국령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이븐 사우드의 급격한 반대를 일으켰는데, 이는 이븐 사우드가 영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크완과 이슬람 과격주의 세력들은 현대화와 외국인들의 이주를 장려하는 듯한 이븐 사우드의 국내 정책에 실망하였고, 결국 이븐 사우드에게 등을 돌렸다. 허나 이들은 1929년에 결국 사빌라 전투에서 진압되었고, 지도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1932년 9월 23일,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은 서로 통합되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고,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이날을 건국기념일로 기리고 있다.

 

통합 이후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왕국이 통합되어 새로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이 건국되기는 하였으나, 왕국은 제한된 농업과 일부 산업에만 근근히 의존하고 있던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1938년에 초대규모의 유전이 알 아샤페르시아 만 인근 지방에서 발견되었고, 1941년에는 미국 계열 회사인 아람코의 주도 하에 대대적으로 석유가 시추되기 시작하였다. 석유는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막대한 부를 가져다 주었고, 국제적 위상을 한순간에 엄청난 규모로 드높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 수준이 비약함에 따라 문화도 빠르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헤자즈 지방에서 언론과 라디오가 활성화되며 그 중심지가 되었다. 허나 석유 산업으로 인하여 수많은 외국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자 안그래도 만연하였던 제노포비아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들 사이에서 더더욱 심화되었고, 그 와중에 정부는 낭비와 실패를 반복하며 막대한 양의 국가 부채를 만들어내고 외국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빚을 들여오게 되었다.

 

1953년,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국왕직을 물려받았고, 1964년에 이복형제인 파이살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그를 쫒아내고 대신 3대 국왕으로 즉위할 때까지 재위하였다. 197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아람코의 지분들 중 20%를 소유하게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원유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노력하였다.

 

1973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욤키푸르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에 맞서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국가들에 대한 보복으로 오일 대란을 일으켰다. 유가는 즉시 엄청난 가격으로 상승하며 세계적으로 대대적인 오일 파동을 불러왔다. 그러나 1975년에는 파이살 국왕이 그의 조카인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 의하여 암살당했으며, 그의 이복형제인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사우디아라비아의 4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1976년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석유 생산국이 되었고, 칼리드 국왕의 재위기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경험하며 국가의 인프라와 교육 시스템 자체를 재정비하였다.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더욱 긴밀해졌다. 1979년에는 2개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는데, 하나가 이란에서 일어난 이란 혁명이었는데, 시아파가 주도한 이란 혁명의 열기를 이어받아 사우디아라비아 동부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국내 시아파가 반란을 일으켜 중앙정부를 흔들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실제로 1979년 카티프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2번째 사건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메카에 있는 대모스크를 강제로 점거한 사건이었다. 이 극단주의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벌이고 있는 ‘반이슬람적’ 행동에 격분했다고 주장하였으며, 정부의 부정부패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부는 10여일이 지나고 나서야 대모스크를 탈환하는데에 성공하였으며, 이 극단주의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이로 인하여 사우디 왕가는 영화관의 문을 닫는 등 이전보다 훨씬 더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사회적으로 적용하기 시작하였고, 정부 내에서도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등 이슬람계의 반발을 무마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 두 조치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가 국내에서 더더욱 창궐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였다.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람코의 미국 지분을 모두 사들였다. 칼리드 국왕은 1982년 6월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즉위하였다. 그는 ‘2개의 신성한 모스크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자신의 이름에 추가하였으며, 이슬람계의 반발을 받아들여 ‘전하(Majesty)’라는 호칭을 신에게만 쓸 수 있도록 하였다. 파흐드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여전히 막대한 양의 미국제와 영국제 무기들을 사들였다.

 

석유 생산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재원은 사우디아라비아 사회에도 큰 영향을 불러일으켰다. 기술적으로도 급격한 현대화가 이루어졌고, 도시화, 대규모 공공 교육과 새 미디어들이 신설되었다. 이러한 발전들과 급격하게 증가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존재는 전통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전통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크게 발달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사우드 왕가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며 국정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든 자국민들을 배제해버리는 후진적인 체제가 지속되었다.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50억 달러를 쏟아부어 사담 후세인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라크가 1990년대에 쿠웨이트를 침공한 것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고, 결국 미국의 참전을 요청하였다. 파흐드 국왕은 미군과 연합군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할 수 있도록 허가하였다. 그는 쿠웨이트 정부 요인들과 국민들을 사우디아라비아로 초대하였으나, 예멘과 요르단은 이라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국외로 쫒아냈다. 1991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군대가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이라크 공습과 지상전에 모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와 서방 세계와의 공조는 극단적인 이슬람계와 샤리아 동조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점차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테러리스트들이 국내외적으로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오사마 빈 라덴은 1994년에 시민권을 박탈당하기 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시민이었고, 2000년에 예멘의 아덴에서 미국 군함을 공격하고 2001년 9월 11일에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테러하며 국제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들조차, 친서방적인 외교 기조를 추구하는 정부의 입장에 딱히 동조하지는 않았다.

 

이슬람이 유일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문제점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매우 부유한 국가이기는 하지만, 그 국부는 거의 정체되어 있으며 높은 세율과 실업율로 인하여 사회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회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자연스레 왕가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다. 결국 파흐드 국왕은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반포하였으며, 1992년 3월에는 기본법을 소개하며 지도자로서의 임무와 책임을 강조하였다. 파흐드 국왕은 60명의 의원들과 의장으로 구성된 국정자문회의(Majlis Ashura)와 같이 의회와 비슷한 기구를 처음으로 출범시켰으나, 이 의원들은 모두 국왕이 임명하며 실제 권한은 얼마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녔다. 국왕의 의도는 최대한 반대파의 목소리를 듣는 척하며 실제로 변화는 최소화하려 했던 것이다. 파흐드 국왕은 ‘선거에 기반한 제도는 우리의 의논에 기반한 이슬람적 신념에 어긋난다’라고 발언하면서 자신이 민주주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1995년, 파흐드 국왕은 심장 발작에 시달렸고 왕세자인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압둘라 왕세자의 권한은 파흐드 국왕의 형제들에 의하여 제한되었고, 1990년대부터 점차 불화의 징조가 쌓이기 시작하였고 2003년과 2004년에는 리야드와 제다 등지에서 살상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05년 2월부터 4월까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으로 전국적인 지방 선거가 열렸다. 다만 여성들은 투표권이 허락되지 않았다.

 

2005년, 파흐드 국왕이 사망하였고 그 뒤를 압둘라 왕세자가 이었다. 그는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고 반발 세력들을 억압하며 개혁 조치는 최소화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규제를 완화하고 해외 투자와 사유화를 장려하며 경제적 개혁을 일부 실시하여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한 경제 구조를 바꾸려 시도하였다. 2009년 2월, 압둘라 국왕은 사법, 군대 체계도 개혁하겠다고 선언하였고 사법계의 원로들과 무타완(종교 경찰)들을 조금 더 온건한 성향의 인사들로 임명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여성 장관을 내각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2011년 1월 29일, 수백명의 시위자들이 제다에 모여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보기 드문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11명이 죽은 제다의 홍수 사건 이후 나아지지 않고 있는 제다의 빈약한 인프라 제도를 비판하였다. 경찰은 곧바로 개입하여 15분 만에 이들을 진압하였고, 30명에서 50명에 달하는 인원들을 체포하였다.

 

2011년 이래,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의 봄 사태를 크게 의식하고 있었다. 압둘라 국왕은 2011년 2월 22일에 360억 달러에 달하는 돈을 시민들에게 풀었고, 이 중 10.7억 달러는 주택 문제에 쏟아부었다. 다만 이때에도 몇몇 금융 사기범들이 풀려난 것 이외에도 정치적인 개혁 조치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같은 해 3월 18일에는 압둘라 국왕이 93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 지원 조치를 쏟아냈고, 50만 명에게 670억 달러를 주며 새로운 집을 제공하였고 6만 개가 넘는 새로운 직업들을 창출하여 시민들의 불만을 무마하였다.

 

2011년에 열린 지방선거에서는 오직 남성들만 투표권이 있었던 것과 달리, 압둘라 국왕은 2015년 지방선거에서 여성들의 참정권과 투표권을 허가하였고 의회에도 여성 의원들을 선출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001년부터 광범위한 인터넷 감시를 해오고 있다. 대부분의 검열조치는 2개의 사항에 해당되는데, 하나는 ‘부도덕적’인 것으로 예를 들어 음란물이나 이슬람 수니파의 교리들에 반발하는 내용의 웹사이트들을 모두 차단한다. 나머지 하나는 사우디아라비아 정권과 왕가에 비판하는 자들을 차단하고 검열하는 데, 보통 이쪽이 훨씬 더 까다롭게 처리하는 경우가 잦다. 2015년 1월 23일, 압둘라 국왕은 폐렴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이 즉위하였다. 2017년 들어서는 노회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국왕 대신 그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 알사우드 왕세자가 국정을 지휘하고 있으며, 그는 현재까지도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Mr. Everything'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국기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에는 꾸란의 구절이자 이슬람의 다섯 기둥의 하나인 샤하다가 쓰여있다.

 

아랍어: أشهد أن)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 أشهد أن) محمد رسول الله) →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

 

이 구절은 이슬람에서 가장 신성시되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조기를 게양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국기의 샤하다 구절 아래에 그려진 검은 와하브 왕국의 국왕 이븐 사우드가 추가한 것으로, 잠정적으로 알라와 이슬람 율법을 수호하고 이교도(기독교, 유대교 등 적대세력)로부터 알라와 이슬람을 사수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국기를 게양할 때 항상 검날 끝은 깃대 방향으로 위치한다. 따라서 뒷면은 앞면의 검이 뒤집힌 형태이다. 또한 국기의 바탕색인 녹색은 이슬람교에서 신성시하는 색으로, 경전 꾸란에 의하면 천국으로 간 자들은 모두 녹색 옷을 입고 다닌다고 전해진다.

 

2007년 8월,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민사작전의 일환으로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가 그려진 축구공을 헬리콥터에서 투하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가 그려진 축구공이 샤하다를 발로 차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신성 모독으로 비판을 받았다.

 

-위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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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의 미래, 비키니와 홍해 프로젝트

 

비키니·음주 허용하는 리조트… 사우디, 홍해 연안에 건설 발표
미래 권력 왕세자의 정치 승부수, 젊은 세대 바라는 자유 수용해
30대 국왕 등장할 가능성 높아… 전통주의 넘는 새 왕국 만들까

 

'비키니 리조트.' 지난주 세계의 이목을 끈 사우디아라비아발(發) 외신 제목이다. 이른바 홍해프로젝트 구상으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 해안 북쪽 200km를 따라 파격적인 관광 특구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비자도 면제하고, 복장도 자유로우며, 심지어 음주도 가능할지 모른다는 소식이다. 일종의 해방구다. 사우디가 어떤 나라던가? 엄격한 이슬람 율법의 보루이자, 성지 수호를 자임하는 나라다. 관광 비자는 거의 발급되지 않고, 술도 엄격하게 금하며, 외국인 여성이라도 전신을 감싸는 아바야를 두르지 않으면 거리에 나설 수 없다. 그렇기에 비록 한정된 구역이지만 비자 없이 입국하고, 비키니 수영복도 허용한다는 발표는 무척 놀라운 일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2019년 착공해 2022년 완공할 예정인 홍해 휴양지 부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사실 오랫동안 한갓진 마을로 남아있었던 이 지역의 개발 잠재력은 높다. 아름다운 바다 홍해에는 때묻지 않은 50여개 천혜의 섬들이 흩뿌려져있다. 해안을 따라 기묘한 바위산들이 줄을 잇는다. 독특한 풍광이다. 내륙으로 조금 들어가면 화산과 용암지층도 나오고 동식물의 식생도 다채롭다. 투자 비용과 상관없이 환경 친화적으로 짓겠다는 의지도 높게 평가된다. 계획대로라면 창출하는 일자리와 실질 수익도 만만치 않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수익성 높은 개발 프로젝트로만 볼 수는 없다. 정치적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일찍이 '비전 2030'을 내걸고 국가의 환골탈태를 약속하며 미래 권력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가는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다음과 같은 승부수다.

첫째, 왕세자는 집권 후 개발 중심축을 서부로 이동하려 한다. 내륙 네즈드(Nejd) 출신인 왕가는 그동안 막대한 수입원이었던 동부 알 하싸(al Hassa), 즉 유전이 몰려있는 걸프 연안의 만성적 분쟁에 지쳐있다. 유가 하락이 대세인 시대다. 여기에 시아파의 준동과, 바다 건너 이란의 부상도 부담스럽고 카타르 등 걸프 왕정 국가들의 움직임도 불편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홍해 프로젝트는 안정적인 홍해 연안, 즉 히자즈(Hejaj) 지역을 다시 주목한다. 새로운 거점을 중심으로 권력을 세우고 싶다는 왕세자의 의지와 전략이 담겨있는 것으로 읽힌다.

둘째, 시대 변화의 수용이다. 제한적이지만 상징성은 크다. 극단적 이슬람 보수 이념인 와하비즘을 신봉하는 왕실의 전통을 일부 허물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들과 보수인사들의 반발은 클 것이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응원할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흐름을 알고 있는 세대다. 변화된 왕국을 기대한다. 왕세자는 이 점에 주목하며 파격적인 계획을 던졌다.

 

무함마드 빈 살만. /조선일보 DB

 

셋째, 미래 권력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이려 한다. 프로젝트 주체는 사우디 공공투자펀드(PIF)이지만 왕세자 본인이 의장을 맡고 있기에 전권을 쥐고 있다. 곧 아람코 기업 공개가 이루어져 막대한 현금이 조달되면 왕세자는 더 파격적인 프로젝트들을 내놓을 것이다. 이를 통해 승계 논란을 잠재우고 새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하려 할 것이다. 가시적인 성과가 드러나 변화의 면모가 보이기 시작하면 왕세자의 권력은 점차 기정사실화되기 때문이다.

30대의 젊은 사우디 국왕이 등장할 가능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왕세자의 젊은 리더십이 승부를 걸어야 할 지점은 전통보다는 비전과 변화다. 일견 홍해 프로젝트는 여느 토목 계획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왕세자의 정치적 미래가 달려있다. 만일 고루한 이슬람 전통주의를 혁파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젊은이들이 희구하는 개방과 자유의 물결을 수용한다면, 홍해 프로젝트는 새로운 사우디를 이끌어낼 것이다. 사우디는 기로에 섰다. 과거처럼 편하게 석유 이익에 매달려 살 수도, 아니면 힘들겠지만 미래로 도약할 수도 있다. 석유가 묻힌 걸프는 편하지만 한쪽이 막힌 닫힌 바다다. 반면 홍해는 인도양과 지중해를 잇는 열린 바다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조선일보(1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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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 [Saudi Arabia] 

 

-아라비아 반도의 4/5 정도를 차지하는 나라 

 

소속대륙: 중동

공식명칭: 사우디아라비아왕국(Kingdom of Saudi Arabia)

인구: 2,963만명(13)

면적: 2,149,690 km²

수도: 리야드

정치·의회형태: 군주제

국가원수/정부수반: 국왕/국왕

공식 언어: 아랍어

독립년월일: 1932.09.23

화폐단위: 사우디리얄(Saudi riyal/SRIs)

국가(國歌): Sarei lil majd walaya("Hasten to glory and supremacy")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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