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중년 남자]

대통령 당선인 공약 중에 살림살이를 획기적으로 바꿀 만한 내용이 있다. 음식 쓰레기 분쇄기를 가정에 설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아파트 싱크대에 분쇄기를 설치해 지하 공동수거함에 모은 뒤 쓰레기는 수거하고 하수는 따로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음식 쓰레기를 들고 나가 버릴 일이 없어진다.
서구에서 디스포저(disposer) 또는 가버레이터(garburator)라고 부르는 이 기기는 싱크대 아래에서 음식 쓰레기를 잘게 갈아 흘려 보내는 장치다. 미국 가정집에는 부엌 벽에 디스포저 스위치가 매립돼 있을 만큼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쓰이다가 1995년 수질 오염 때문에 금지됐다. 2005년부터는 아예 음식 쓰레기 분리 수거가 시작됐다. 출근길에 음식 쓰레기 봉지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자들도 그때 등장했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깔끔을 떨며 살아도 가족 중 누군가 언젠가는 음식 찌꺼기가 든 비닐봉지를 들고 인상을 쓰거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엘리베이터를 탈 수밖에 없다. 또 꼼꼼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내용물이 흘러 지옥의 냄새를 풍긴다.
요즘 홈쇼핑에서 앞다퉈 디스포저를 팔기에 개별 설치해도 되나 싶었는데 어느 날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이 붙었다. 디스포저 설치는 불법이므로 적발되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음식 쓰레기를 바짝 말려 가루처럼 만드는 기계도 있다는데 값도 비싸지만 한번에 4시간이나 돌려야 한다니 성질 급한 사람은 말리느니 내다버릴 판이다.
물기 빼주는 쓰레기통, 이중 패킹으로 냄새를 잡는다는 쓰레기통, 제법 비싼 스테인리스 쓰레기통도 써봤다. 생분해되기 때문에 음식 쓰레기와 함께 버려도 된다는 식물성 싱크대 거름망도 써봤는데, 너무 약해서인지 매번 찢어졌다. 벌레 꼬이는 여름엔 음식 쓰레기를 냉동실에 얼려 보관하는 집도 있다고 한다. 물론 최악은 음식 쓰레기를 현관 밖에 내놓는 집이다.
디스포저를 금지할 때만 해도 국내 하수 설비는 태부족이었다. 1993년 하수도 보급률은 41.3%에 불과했다. 2019년 현재 이 비율은 94.3%다. 환경 단체에서는 디스포저 공약에 대해 “소비자 편의성만 생각한 반환경 정책”이라고 비판했지만, 미국·캐나다·일본 같은 선진국이 수질오염을 몰라서 디스포저를 쓰는 건 아닐 것이다.
그나저나 왜 탈원전 백지화나 사드 추가 배치보다 음식 쓰레기 공약이 먼저 눈에 띄는 걸까. 이런 게 바로 ‘주부 마인드’라는 건가 보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2-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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