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외교관의 비자 인터뷰]
[‘日 무비자’ 먼저하면 어떤가]
[“파란 눈으로도 세상이 잘 보여요?”]
신임 외교관의 비자 인터뷰
[에릭 존의 窓]

영사관에서 근무한 경험 덕분에 수많은 사람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눠본 횟수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모든 신임 국무부 직원은 의무적으로 1년 이상 영사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데, 대부분 첫 업무로 비자 인터뷰를 담당한다. 나는 1984년부터 서울과 호치민에서 무려 4년 동안 비자 인터뷰를 수행했다.
사실 학부 시절 국제정치학을 전공하며 꿈꾸던 글로벌 외교계의 중심에서 일하는 모습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직무였다. 외무고시에 합격했던 해에 2만 명이 함께 시험을 보고 그 중 200명이 채 안 되는 인원이 외교관이 되었다. 3개 파트로 이뤄진 시험을 통과한 우리는 승리감에 도취해 앞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한 혜안을 국무부에 직접 보고하는 등 중책을 맡게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몇 개월간의 언어 및 여타 전문 과정을 마치고 저마다 세계 각국의 대사관과 영사관으로 파견되어 처음 수행하게 된 업무는, 다름 아닌 비자 인터뷰였다.
그렇게 관광 비자 신청인에 대한 입국 심사를 시작하고 첫 몇 개월 동안은 모든 것이 실망스럽게 느껴졌다. 2개월 전까지만 해도 조지타운대의 저명한 교수진과 은퇴한 대사 밑에서 외교정책을 논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2주간 홀로 디즈니 월드를 방문하겠다는 누추한 행색의 중년 남성이 혹여나 미국에 불법체류를 하려는 의도가 있지는 없는지 간파해내야 했다. 매일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심사해야 했기에 비자 발급 여부에 관한 결정도 매우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져야 했다.
고작해야 몇 분간 일면식도 없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낯선 사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하기란 여간 까다롭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비자 신청인과 심사인 모두 상당한 심리적 위압감을 느끼며 인터뷰에 임했다. 비자 인터뷰는 어찌 보면 당대의 한미관계를 보여주는 소우주와도 같았다. 불평등하고 우려스러운 면도 분명 존재했지만, 한편으로는 친밀하고 상호호혜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한미관계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려웠다. 신임 외교관으로서의 기여도는 극히 작고 하찮게만 느껴졌다. 솔직히 미국의 외교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이 저서에서 미국의 국제 관계를 성공으로 이끄는 비결로 비자 인터뷰를 소개한 적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당시의 경험을 감사함으로 돌아본다. 판단력과 문화 및 언어에 대한 이해의 밑거름이 되어주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이 경험을 통해 타인을 존엄성을 가진 객체로 바라보고 존중하는 자세의 중요성을 배웠다. 비자 인터뷰 업무를 시작하고 몇 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어쩌면 이 인터뷰는 비자 신청인들이 미 정부 관료를 만날 수 있는 최초이자 유일한 기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그 경험을 통해 미국에 대한 긍정적이고 좋은 인상을 받도록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존중과 긍정적인 태도가 더욱 큰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서울에서 영사 업무를 마치고 한참이 지난 후이다. 국무부에서 경력이 쌓이면서 학생 시절 염원하던 바와 같이 북한과의 고위급 교섭에 참여할 기회도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서 가족과 휴가 중에 저녁거리를 사러 한인 마트에 들렸다. 마트 주인은 내가 내민 신용카드와 내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생각하던 그때 주인이 내 얼굴을 다시금 찬찬히 살피며 “혹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에릭 존 씨 맞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자 그는 “1985년에 이민비자 신청 인터뷰를 할 때 우리 가족에게 참 친절하셨습니다. 이후 한 번도 당신의 이름을 잊지 않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날 이후, 가장 자랑스러운 외교적 성과 중 하나로 이 대화를 상기하곤 한다.
커리어 초기일수록 본인의 업무가 미칠 수 있는 장기적 영향에 대해 인식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는 작은 일에도 즐겁고 긍정적인 태도로 임하는 것이 가장 큰 결과를 낳는 시작이 아닐까 한다. 물론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며,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일터에서 본인의 ‘감성지수’ 목표를 높게 설정하는 것은 높은 지적 능력을 갖추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1984년, 비자 신청인들이 창구 맞은편에 앉아 느꼈을 긴장감을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이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조선일보(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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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무비자’ 먼저하면 어떤가
[특파원 리포트]

지난 6월1일 오후 7시쯤부터 도쿄 미나토구 주일 한국대사관 영사부 건물 앞에 관광비자를 신청하려는 시민 30여명이 밤샘 대기를 준비하고 있다./도쿄=최은경 특파원
어느 일본 네티즌이 엊그제 트위터에 한국 비자 받은 인증 글을 올렸다. ‘새벽 5시 45분 도쿄총영사관 도착. 순번표 30번 받음. 8시 30분 총영사관 업무 시작. 8시 50분 순번표 ‘1번’의 이름이 불림. 9시 22분 비자 받음.’ 우리나라가 이달 1일 관광비자 발급을 시작하고 나서 매일같이 ‘한국 비자 인증’ 글이 올라온다. 귀하기 때문이다. 도쿄총영사관이 발급 가능한 관광비자는 하루 150명. 열성 한국팬이 아닌 한 일본인이 올여름 휴가를 서울이나 제주도에서 보내기란 쉽지 않다. 한류 거리인 도쿄 신오쿠보엔 20~30대 젊은 일본인들이 매일 저녁 한글 간판을 단 ‘00포차’를 가득 메운다. 며칠 전 옆자리 앉은 일본인에게 물어보니 “한국에 가고는 싶은데 비자 받을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일 왕래가 막힌 때는 2020년 3월이었다. 일본 정부가 코로나 대책으로 한국을 포함한 외국인의 입국을 막자, 다음 날 문재인 정부는 ‘상호주의’를 내세워 일본인의 한국 입국을 막았다. 중국인은 와도 되는데 일본인은 안 된다는 조치였다. 일본인의 한국 방문은 2019년 327만명에서 작년 1만5000명으로 급감했다. 윤석열 정부는 5월 출범 후 일본인에게 문을 열었다. 다만 반만 열었다. 무(無)비자는 허용 않고 관광비자를 받고 오라는 것이다. 역시 전 정부가 내세운 논리였던 상호주의가 이유였다. 일본이 한국인에게 비자를 요구하니 한국도 요구한다는 것이다.
한 관광업계 전문가는 “상호주의가 절대 명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인에게 무비자를 준 때는 1993년이었다. 한시적 조치였지만 매년 연장했다. 일본이 비슷한 ‘한시적 무비자 조치’를 취한 때는 2005년이다. 양국 간 무비자 입국은 2006년에야 맺었다. 외교부가 상호주의를 내세우는 이유는 ‘대일 굴욕 외교’ 같은 비난을 피하려는 까닭일 뿐이다.
상호주의를 무조건 고수한다면 연내 양국 간 무비자는 어려울 듯하다. 일본 외무성이 한국을 포함한 주요 국가의 무비자를 결정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위드 코로나’로 가는 추세지만 섬나라 일본 여론은 ‘코로나 쇄국’이 강한 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여론조사(16~17일)에서 외국인 입국 제한(1일 2만명) 확대에 대해 ‘늘리자’(49%)와 ‘늘리지 말자’(44%)는 팽팽했다.
외교부는 마냥 ‘일본 탓’만 하면 되니 편하다. 하지만 이제 관광 영역은 정치가 아니라 문화로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인구, 국토 면적, 경제에선 여전히 한국이 일본보다 규모가 작지만 오징어게임·BTS·트와이스 등의 활약에서 보듯 대중문화에서 한국은 일본과 중국을 넘는 대국이다. 한류를 사랑하는 일본인에게 ‘무비자 선물’을 줄 정도로 통 큰 가슴을 갖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도쿄=성호철 특파원, 조선일보(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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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으로도 세상이 잘 보여요?”
[에릭 존의 窓]
38년 전 첫 한국 근무 때 “파란 눈으로 보면 파랗게 보이나” 질문 받아
처음엔 한국인들 관심 불편했지만 곧 애정에서 비롯된 것 깨달아
BTS 활동 중단을 외신이 톱뉴스로 전하는 나라 됐어도 情은 그대로
시간이 지나면서 정도가 덜해졌을지 몰라도 한국에서 나는 항상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미군 헤어스타일도 아닌 데다 키는 멀대같이 크고 마른 백인을 1980년대에 부산에서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었기에, 어디를 가나 행인들 시선은 내게 향했다. 특히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거나 조깅할 때면 아이들이 어김없이 달려와 내 팔다리를 가리키며 “헬로 미스터 몽키”라는 노래의 후렴구를 부르곤 했다. 대체 어디서 나온 노래길래 그토록 많은 아이가 따라 부르게 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아이들이 악의를 갖고 놀리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고 외출하기가 때로는 불편했다.
당시 부산 외곽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파란빛의 눈이 낯선 모양이었다. 미 외교관 업무의 하나로 이따금 한국에 수감된 미국인들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한번은 부산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구금 시설에서 교도소장, 직원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소장은 대뜸 몸을 숙이더니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파란 눈으로도 세상이 잘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다른 직원이 내 쪽으로 바싹 몸을 기울이며 내 눈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참에 본인의 의학적 궁금증을 해소하려는 듯했다. 그는 내가 보는 세상에 파란색이 덧입혀져 있지 않은지 물었다. 나는 그것은 눈 색깔과는 상관이 없는 문제라고 대답했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항상 궁금했노라고 덧붙였다.

/일러스트=이철원
한국에서 살면서 이런 일 말고도 끊임없는 관심과 시선이 나에게 향하는 것을 느꼈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사람도, 해맑게 웃으며 자연스럽게 상황을 무마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이런 시선이 꽤 신경 쓰였지만, 차차 한국인들의 이러한 관심이 모두 진정 어린 친절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외양적으로 다르다고 나를 보며 킬킬대거나 난처한 질문을 던지는 이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한국인들의 속 깊은 배려와 친절을 경험할 기회가 더 많았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국인들은 레스토랑이나 공연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주거나 앞좌석으로 안내했다. 식사할 때는 최고의 서비스와 음식으로 대접받고 있는지 유난스러울 정도로 재차 확인하곤 했다. 이러한 환대를 받을 때면 약간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감사했다. 황송한 대접의 중심에는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그것을 나처럼 호기심 많은 외국인과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욕구가 자리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열고 한국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할수록 한국인들은 그 이상으로 화답해 주었다.
1984년 이후 여러 차례 한국에서 근무했지만 지금부터 8년 전, 한국에 돌아온 시점에는 특히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간 한국은 큰 도약을 이루었고 어느덧 글로벌 비즈니스,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더 이상 한국에서 길을 가다 외국인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중에서도 한국어를 유독 유창하게 구사하는 외국인을 조우할 때면 나는 경탄을 금치 못하고 부러워하곤 한다. 한국에 사는 수많은 외국인이야말로 무엇보다도 한국의 세계적 위상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글로벌 비즈니스와 문화의 허브로서 한국은 이미 자석과 같은 매력으로 세계인을 끌어당기고 있다.
실제로 지난주 대전 출장 중에 이런 한국의 성장과 발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는 밴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한국의 뛰어난 5G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생방송 TV가 실시간으로 스트리밍되었다. BBC 채널의 헤드라인 뉴스로는 ‘BTS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이 보도되었고, 이것이 전 세계 음악 산업에 미칠 영향력에 대해 K팝을 연구하는 한 미국인 교수가 출연해 논평하기도 했다. 세미나 참석을 위해 방문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유학생 비율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의 뛰어난 기술력,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문화적 파급력,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유입되는 젊은 인재들을 보며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새삼 체감한 날이었다.
한국의 발전 양상뿐 아니라 국내외 삶의 수준 향상에 한국이 기여하는 바를 생각하면 언제나 놀랍고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보다도 유일하게 변치 않은 한 가지에 나는 더욱 깊이 감동하고 가치를 둔다. 이는 바로 내가 1984년 처음 발견한 한국인의 온정과 친절이다. 당시 한국에서 만난 모든 사람과 교류하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배우고 느꼈는데, 그때부터 거의 40년이 지난 오늘도 매일 그 따스함이 전해진다. 여전히 한국의 삶이 매일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에릭 존 보잉코리아 사장·前 주태국 미국 대사, 조선일보(22-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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