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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 [유시민의 프락치 사냥, 그 후예들] ....

뚝섬 2023. 3. 16. 08:37

[벌레]

[유시민의 프락치 사냥, 그 후예들]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 事實과 상관없이 진영 논리로 나를 공격했다"] 

[심재철 對 유시민]

 

 

 

벌레

 

[차현진의 돈과 세상]

 

마키아벨리는 교활함과 변덕스러움을 군주의 미덕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18세기의 조제프 푸셰는 군주도 아닌 주제에 그 미덕을 실천했다. 권력의 풍향에 따라 수시로 태도를 바꾼 그는 배신자, 모사꾼, 변절자의 상징이다.

 

푸셰는 원래 신학교 교사였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수도사 옷을 벗고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자기가 몸담았던 교회를 타도 대상으로 몰아세우면서 그 재산을 몰수하는 데 앞장섰다. 그 공로로 혁명 정부의 지역 대표자가 되었다. 그런데 교회 재산을 빼앗은 시민들은 갈수록 과격해졌다. 민심 변화를 읽은 푸셰는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세우고, 귀족들을 처형하는 일을 주도했다.

 

혁명 정부는 재정이 빈약해서 화폐를 남발했다. 그 때문에 물가가 폭등하자 민심이 돌아섰다. 그러자 푸셰는 자기 상관인 로베스피에르에게 물가 상승과 공포정치의 책임을 씌워 단두대로 보냈다. 그 공로로 다음 정권의 경시총감직을 꿰찼다. 온갖 첩보를 수집하는, 정보 경찰의 시조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정부 전복 계획은 알면서도 뭉갰다. 1799년 쿠데타에 성공한 나폴레옹은 푸셰를 창업 공신으로 대접했다.

 

나폴레옹의 힘이 빠지자 푸셰의 버릇이 또 나왔다. 이번에는 외국과 손잡고 나폴레옹 축출 계획을 짰다. 1814년 왕정 복고 직후 루이 18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권력에서 멀어지는 순간 왕을 배신하고 다시 나폴레옹에게 붙었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파리로 귀환한 나폴레옹에게 “조금만 늦으셨다면 제가 반역죄로 죽을 뻔했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연기에 마음이 풀린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를 위해 프랑스를 떠날 때 모든 권력을 푸셰에게 맡겼다.

 

1815년 3월 19일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왔다. 푸셰가 마중 나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푸셰는 권력을 향해 껍질을 자주 벗었기에 별명이 벌레다. 벌레가 프랑스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현진 예금보험공사 이사, 조선일보(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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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프락치 사냥, 그 후예들

 

[선우정 칼럼]

경찰국장 논란은 물고문과 집단 폭행,
인격 살인의 프락치 사냥이
공공의 정치 공간에서 부활했음을 알려준다
 

 

요즘 기이한 장면이 김순호 행정안전부 신임 경찰국장을 겨냥한 야당과 재야 좌파의 ‘프락치 사냥’이다. 논점은 단순하다. 33년 전 주사파 운동권에서 공안 경찰이 된 김 국장의 변신 과정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동료를 배신하고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된 것 아니냐”며 “프락치 경력을 자백하라”고 한다.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모호한 말들 이외에 증거는 없다. 누군가 이런 식으로 ‘빨갱이 사냥’을 했다면 그들은 일치단결해 ‘색깔론’으로 역공을 퍼부었을 것이다.

 

프락치 사냥은 말로 끝내는 논쟁이 아니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 씨가 3년 전 김명일 현 조선NS 기자와 가진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 실감할 수 있다.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 때 자료를 얻으려고 서울대에 갔다. 누군가 얘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아니라고 하자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씩 폭행했다.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처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부었다.” “전두환 전 씨라고 더 심하게 때렸다”는 증언에선 가해자들의 악마성을 발견할 수 있다. 남의 신체에 고통을 주다 못해 인격을 가지고 장난질을 친 것이다.

 

1984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으로 구속된 유시민씨. 무고한 민간인을 상대로 감금, 고문, 인격 살인을 저질렀지만 수감 중 시종일관 당당했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법정에서 후회한 일도 사죄한 일도 없다. 가해자 대부분은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출세했고, 피해자는 프락치 낙인을 안고 대부분 불행한 삶을 살았다.

 

서울대생을 부러워하는 방송대생, 공무원 시험 준비생, 재수생 등 4명이 피해자였다. 프락치는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범인들은 1년 안팎의 징역형만 받았다. 법정에서 후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영웅 놀이를 했다. 유시민씨는 그때 얻은 명성을 발판으로 장관에 올랐다. 지상파 TV에 나와 당시 일을 자랑했다. 유시민은 노덕술, 이근안을 포함한 한국의 역대 고문 가해자 중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공범 윤호중씨는 민주당 원내대표, 이정우씨는 로펌 변호사, 백태웅씨는 미국 대학 로스쿨 교수가 됐다. 공범들은 유씨가 고마울 것이다. 그의 현란한 언행이 추악한 범죄를 민주주의 서사로 둔갑시키고, 일그러진 자화상에 민주 투사의 가면을 씌웠기 때문이다. 그들을 단호하게 단죄하지 못한 결과가 지금도 계속되는 프락치 사냥이다.

 

김 국장의 이력을 보면 그가 왜 타깃인지 알 수 있다. 그는 낮은 계급인 경장에서 시작해 장기간 공안 수사에 몸담았다.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 혁명 그룹 사건을 해결해 특진했고, 남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 동맹 사건을 해결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국의 좌익은 공안 경찰을 정보기관보다 더 증오한다고 한다. 좌파의 풀뿌리를 뽑아내 그들의 증식 공간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몸담았던 인노회 조직원들은 통일사회주의 혁명, 민족 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대법원이 이적 단체라고 했든 안 했든,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했다면 지금 한국은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조직을 버리고 경찰로 전향한 것은 공격받을 일이 아니다. 설사 그들 주장대로 김 국장의 수사 협조 때문에 조직이 해체되고 조직원이 체포됐다고 가정해도 자유민주주의 기반 위에 존립하는 한국 국회가 그를 매도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

 

프락치 사냥은 유시민으로 끝나지 않았다. 원조 사냥꾼이 영웅이 됐으니 당연하다. 5년 뒤 연대생 5명이 동양공업전문대 학생 설인종씨를 “프락치”라며 끌고 가 끈으로 손발을 묶고 각목으로 때렸다. 고려대생 3명도 가담했다. 술 냄새와 응원가 소음이 신촌을 가득 채운 연고전 마지막 날이었다. 축제의 밤, 설씨는 연세대 적십자 동아리 방에 갇혀 맞아 죽었다. 그에게 잘못이 있었다면 일류대 학생인 척한 게 전부였다. 각목으로 때리다가 쓰러지면 발로 밟았다. 기절하면 물을 끼얹어 깨우고 다시 때렸다. 설씨가 과다 출혈로 죽자 가해자들은 젖은 옷을 벗겨 증거를 감췄다. 그러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몰려가 보호를 요구했다. 그들은 설씨가 프락치라는 증거라며 자백 내용까지 공개했지만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연세대 민간인 고문 치사 사건을 보도한 조선일보 1989년 10월 20일자 사회면. 연대생 5명과 고대생 3명이 학교를 속이고 연세대 동아리 활동을 한 동양공전 학생을 프락치로 몰아 납치한 뒤 학생회관에 끌고가 때려죽였다. 당시 전국 대학에서 같은 유형의 폭행 사건이 수십건 발생했다.

 

전남대에서 송원전문대 졸업생 이종권씨가, 한양대에서 선반 기능공 이석씨가 한총련 대학생들에게 프락치로 몰려 맞아 죽은 때는 8년 후인 1997년이다. 전남대 사건 가해자인 정의찬씨는 이재명 경기지사의 발탁으로 경기도 월드컵재단 사무총장에 올랐다. 대선 직전 여론에 밀려 사퇴할 때까지 정씨도 유시민씨가 누린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김순호 경찰국장에 대한 공격은 유시민식 프락치 사냥이 밀실에서 벗어나 공공의 정치 영역에서 부활했음을 알려준다. 집단 린치가 재개된 것이다. 경찰의 도덕성을 무너뜨리고 새 정부 경찰 정책의 상징인 경찰국을 흔들어 정권에 상처를 입히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넓게 보면 한국 현대사를 뒤집으려는 일련의 시도와도 연결돼 있다. 정권 입장에서 국장급 간부 교체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양보해선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제동을 걸지 않으면 그들의 프락치 사냥은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2-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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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피해자 행세… 事實과 상관없이 진영 논리로 나를 공격했다"

 

'80년 서울의 봄' 누가 밀고자였나, 심재철 자유한국당의원 

 

지난달 유시민 노무현재단이사장이 KBS 예능 프로에 출연해 "1980년 합수부에 끌려가 진술서 쓰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찾게 됐다" "수사국장도 감동시킨 문장력" "진술서 잘 써서 비밀조직에 속한 동지들을 지킬 수 있었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때만 해도 지금의 상황이 전개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서울대총학생회장이었던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스물한 살 청년의 자필 진술서가 다른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됐다. 신군부에게 상세 좌표(座標)를 찍어줄 만큼 그렇게 절박했나"라며 '밀고자(密告者)' 공방에 불을 댕겼다. 운동권 동지였던 심재철과 유시민 간에 '80년 서울의 봄'을 둘러싼 진실 게임은 수사·재판 기록 공개와 주변 인사들의 가세로 판이 커지고 있다. 심재철(61) 의원을 만난 것은 어쨌든 그가 논쟁을 촉발한 쪽이었기 때문이다.

 

심재철 의원은 "당시 수사를 받았던 사람들은 남의 이름을 분 것에 대한 죄책감이 있게 마련"이라고 했다.  

 

유시민씨는 예능 프로에서 자기 자랑을 좀 한 것이다. 이게 '진실을 왜곡했다'며 정색할 만한 사안인지 모르겠다. 원래 그런 사람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았나?

"예능이라도 사실 관계를 왜곡하며 자기 자랑을 하나. 수사(搜査)를 받아본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남의 이름을 불었던 것에 대해 미안함과 죄책감, 부끄러움이 있게 마련이다. 다들 그런 상처가 있다. 나는 수사를 잘 받았다는 식으로 얘기를 못 하는 것이다. 역사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39년 전에 했던 진술을 지금 와서 따지겠다는 것도 지나친 느낌이 있는데?

"1995년 재심(再審) 청구를 하면서 처음 '유시민 진술서'를 접했다굳이 안 불어도 될 사안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놓은 걸 보고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었지만 참았다그런데 뻔뻔스럽게 자기 문장력을 자랑하고 다른 비밀조직은 완벽하게 지켰다는 식으로 자신을 미화까지 하니…"

그 시점에 연행된 서울대생만 수십 명이 됐다. 수사기관의 강압적 분위기에서 일기(日記) 쓰듯이 시시콜콜 모두 쓸 수밖에 없었다. 유시민의 진술서만 꼭 그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나도 부끄러운 면이 있지만 안 쓰고 넘어가도 될 것 같으면 안 썼다. 가령 다섯 명이 모였으면 두 명은 기억 안 난다는 식으로 덜 불려고 했다. 남의 이름을 적는 것에 고민이 있는 것이다. 유시민은 굳이 안 써도 되는 내용까지 미주알고주알 풀어놓았다."

그 진술서에는 공개된 학생회 간부와 몇몇 복학생, 행사나 회합에 대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유시민 주장대로 수사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감춰야 할 것은 감춘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나?

"공개돼 있어도 진술서에 너무 상세하게 나온다. 며칠날 누가 무엇을 했거나 말했다며 구체적인 혐의를 제공했다. 그가 고문당해서 어쩔 수 없이 그랬으면 이해하겠지만 자기 입으로 맞지 않기 위해 열심히 썼다고 했지 않나. 수사국장이 칭찬해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처음부터 그들의 입맛에 맞게 잘 불었다는 것 아닌가."

유시민은 5월 17일 체포됐고, 첫 진술서는 6월 12일 작성됐다. 그 첫머리에 '일전에 미처 진술하지 못한 사항이나 잘못된 사항, 불명확한 사항을 상세히, 잘못을 수정하고 명확하게 진술코저 합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수사관의 요구에 따라 수십 차례 쓴 뒤 이게 1차 진술서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자세하게 불었던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럴 수 있겠지만 유시민 혼자서만 90쪽을 적어 냈다(심재철의 1차 진술서는 13쪽). 그는 진술서 내용이 공개되자 '심재철 의원이 진술한 내용에 맞춰 자술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내 첫 진술서는 6월 30일에 작성됐는데 황당한 소리 아닌가."

이에 유시민은 "진술서는 처음부터 창작이었다"고 해명했는데?

"무슨 창작인가. 나와 처음 만난 시점만 빼면 진술서 내용 99%가 모두 사실이다. 유시민 진술로 인해 행적이 밝혀진 77명 중 미체포자 18명에 대해 6월 17일 지명 수배가 떨어졌다."

이들은 그전부터 수사 당국의 사전 검거 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단지 그 시점에 지명 수배됐다고 봐야 하지 않나?

"유시민 진술 때문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든다. 그의 진술로 수사 초점이 바뀐 것도 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관련한 중간 수사 발표(5월 22일)에서는 김대중과 대학 운동권의 연결고리로 '연청'을 지목했다. 하지만 유시민 진술서에서 '민청협(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이고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이 돌던 이해찬'이라고 특정하자, 6월 14일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받던 어른들의 입에서 '민청협' 진술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연으로만 볼 수 있겠나."

이번 논쟁에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사무총장이 유시민을 적극 편들고 나왔는데.

"1980년에 윤호중은 서울대 입학도 안 했다. 그는 1984년 논문 자료를 찾기 위해 서울대에 왔던 방통대생 등 민간인 4명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 폭행한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유시민과 공범이었다."

 

/알릴레오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유시민은 1년형을 살았다. 이는 민주화 투쟁과는 전혀 무관한 집단 린치와 물고문까지 한 범죄였다. 하지만 유시민에게는 그때 쓴 '항소이유서'가 소위 명문(名文)이라고 해서 세간에 이름을 얻는 계기가 됐다.

"가해자들은 장관도 됐고 국회의원도 됐지만, 피해자들의 망가진 삶이 어떠했는지 월간조선(2006년 2월호)에 보도된 적 있었다."

이번 논쟁에서도 승자(勝者)는 유시민인 것 같다. 저쪽 진영에서는 당신을 향해 '가롯 유다' '변절자'라고 공격하고 있다.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자들이 유죄를 받은 것은 당신이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수사·재판 기록을 보지도 않고 맹목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체포되기 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다른 피고인들의 자백으로 혐의 입증이 완성돼 있었다.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은 것은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의장'이라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수괴 혐의 때문이었다. 부인 이희호씨가 '한민통'과의 관계를 인정했고, 최측근 김상현 등 3인도 그렇게 진술했다. 나는 '한민통'과는 전혀 무관해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김대중 측의 배후 조종을 받고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는 내란음모 혐의와 관련돼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이해찬 의원은 한 인터뷰에서 "먼저 잡힌 심재철이 자백해 내가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고 말했다.

"명백한 허위다. 이해찬이 체포된 날은 6월 24일이고, 내가 자수한 날은 6월 30일이었다. 내가 자수하기 전에 이해찬은 합수부에서 이미 3차례 진술했다. 무려 277쪽으로, 피의자 진술서 중 최대 분량이다. 모두 다 불었던 셈이다. 그는 민주화 동지 101명의 이름과 행적, 전과를 적은 7쪽짜리 리스트도 제출했다."

그동안 이해찬은 당신을 인간 취급 하지 않는다는 식의 언행을 보여왔는데?

"가해자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해왔다. 사실과 상관없이 정치 진영 논리로 나를 공격했던 것이다. 이해찬 진술서에는 나와 관련된 분량이 8쪽이고 내 이름만 7번 나왔다. 수사관은 이를 근거로 나를 추궁했다. 내 진술서에는 이해찬 이름이 단 한 번 나온다."

하지만 이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고문 강압에 의해 허위 진술했다"고 번복했지 않나?

"당시 수사·재판 기록이 모든 걸 말해줄 것이다. 이들은 법정에서 재판관이 '고문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고 묻자,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27명 중 16명이 선처를 바란다는 반성문까지 썼다. 뒷날 재심이 열렸을 때 이들은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소리 자체가 고문이었다' '조사실에 불을 켜놓아 잠을 못 자는 게 고문이었다'는 식으로 고문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까지는 '심재철의 진술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완성됐다'는 게 정설처럼 되어 있는데.

"내란음모 사건 판결문에는 핵심 증인으로 29명의 이름이 나오지만, 내 이름은 증거 목록, 다른 피고인들의 공소사실 입증 증거 그 어디에도 없다. 김대중 사형선고나 다른 피고인들의 중형 선고는 나와는 법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총학생회장 때 나는 김대중 등 정치인과 거리를 뒀고 개인적으로 그의 돈을 받은 적도 없었다."

왜 그동안 침묵하고 있었나?

"다른 사람들이 어떤 진술을 했는지 몰랐다. 재심 청구를 할 때 일부 자료를 확보했고, 최근에 전체적으로 자료를 보면서 '80년 서울의 봄'과 관련된 진실이 이랬구나를 알게 됐다."

그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몇 달 복역했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군대에 징집됐다. 그는 복학한 뒤 운동권 중심부에서 밀려났다고 한다.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은 유시민이 됐다.

"그전에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을 둘러싼 학내 노선 투쟁이 있었다. 그때 신군부와 붙었어야 했는데 회군 결정을 한 것은 오류였다고 정리됐다. 서울역 회군 때문에 광주 유혈 사태가 났다는 논리도 만들어졌다. 만약 그때 회군하지 않았다면 서울 사태가 나지 않았을까. 군대에 끌려가 보니 군은 프로였고 학생들은 허술한 아마추어였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중학교 영어 교사를 거쳐 1985년 MBC 기자로 입사했다. 이번에 논쟁이 벌어지자 '그가 신군부에 협조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MBC에 들어갈 수 있었겠느냐'는 말까지 나왔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5공 정부는 공안사범의 복학, 시국사범 교수들의 복교 허용 등 유화정책을 폈다. 운동권 딱지 때문에 못 들어갔던 언론사나 대기업에 취직 문이 열렸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MBC에 들어갔다. 면접 때는 '절대 말썽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80년 서울의 봄'에는 아지랑이가 너무 많이 피어올라 실체와 허상을 헷갈리게 했다. 

 

-최보식 선임기자, 조선일보(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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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對 유시민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연행된 Y씨 앞에 수사관이 진술서 한 뭉치를 던졌다. "봐라. 너희 대장이 불었어." 민청련 리더 K씨의 글씨가 분명했다. Y씨는 뒷날 "그걸 보고 절망했다. '아무리 고문을 받았다 해도 이럴 수 있느냐'는 마음이 한 10년 동안 갔다"고 털어놓았다. 군사 정권 시절 공안 당국이 연행자들 입을 열게 하던 방법은 고문만이 아니었다. "너 혼자 안 불었다너만 손해다." 서로 불신토록 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동서고금 수사 기관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한국당 심재철 의원과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39년 전 1980년 '서울의 봄' 때 '누가 수사 기관에 동지를 실토했느냐'를 두고 논쟁 중이다. 심 의원은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 이사장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었다. 방송에 나온 유 이사장의 자기 과시가 발단이었다.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끌려가 조사받을 때 맞지 않기 위해 진술서를 하루 100장 썼는데, 내가 글을 잘 쓴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러면서 비밀 조직 등 핵심 정보는 끝까지 감췄다고 했다. 

 

▶심 의원이 "거짓말"이라며 유 이사장의 그때 진술서를 공개했다. 유 이사장 진술서엔 김부겸·신계륜 등 당시 학생운동가 77명의 이름과 행적이 등장한다. '김대중씨와 관계한다고 소문 돌던 이해찬'이란 표현도 있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작성된 상세한 행적이 동료들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됐다. 수사 당국에 상세한 지도를 줬다"고 심 의원은 말했다. 자신도 이 진술서 때문에 사법 처리됐는데 유 이사장은 불기소 석방됐다고 했다.

유 이사장은 비밀 조직을 감추기 위해 학생회 등 공개 조직을 내세워 허위 진술한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심 의원이 자수한 뒤 당국이 요구하는 진술을 해줬다고 했다. "나는 그의 진술서를 보고 맞춰 썼다"고 했다. 그러자 심 의원은 자기 진술서까지 공개하고 "나는 고문과 협박 속에 유시민 이름은 한 번 거명했다. 유시민은 내 이름을 78번 거론했다. 국민께서 판단하시라"고 했다. 두 사람은 한때 형제처럼 가까워 '군대 첫 휴가 나와 면회 가던 사이'였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 경험 있는 한 인사는 "고문에 회유가 이어지면 누구도 못 버틴다. '나는 버텼다'는 얘기는 다 거짓말"이라고 했다. "수사관이 볼펜만 던져도 알아서 진술서를 써내려간 사람도 많다"고도 했다. 그때 일을 자기 고백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TV 예능 프로에서 자랑할 소재도 아닌 듯하다.


-이동훈 논설위원, 조선일보(19-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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