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隨想錄]

["첫 눈에 반해 결혼했는데... 내가 잘못 골랐나?"]

뚝섬 2014. 2. 20. 12:55

중매결혼의 맹점

 

우리세대 속어로 자주 쓰던 ‘겐또우’(見當, けんとう)란 일본말이 있다. 한자어(見當)로 해석하면 눈으로 보고 맞힌다는 뜻이다. 우리말의 어림짐작, 복불복(福不福)해당될 것이다. 겐또우를 짚다, 겐또우를 치다로 표현하곤 했는데 한마디로 요행수를 바라는 행위다.

학창 시절, 겐또우에 의존하여 시험을 치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사지 선다형 문제를 대하며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네 개의 보기 중, 정답에 가까운 두 개가 꼭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경우다. 변별력을 높이려고 출제자가 만들어 놓은 기술적인 함정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는 요령을 나름 체득하고 있었는데 바로 직감과 용기를 가지고 첫 눈에 확 잡히는 번호를 답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겐또우의 위력으로 제법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분류되곤 하였다. 그 때는 “겐또우도 실력이다”, “겐또우가 기적을 낳는다”는 말을 좋아하였다.

겐또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시험을 볼 때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의 결정적인 순간에도 더러 적용되곤 했는데 결혼도 그중의 하나였다. 처음 아내를 중매로 만났을 때
‘아, 드디어 이 여자와 결혼하게 되는구나’하는 기이한 예감에 전율하였다. 첫눈에 반했다기보다는 운명적인 직감, 확신에 찬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아내는 처음 선보는 자리였고 나는 몇 명의 배우자감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초의 느낌이나 직관을 중요시하던 터라 아내와 선을 본 뒤 다른 여인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혈기 방만했던 시절이라 인생 중대지사마저 사지 선다형 시험문제를 풀듯, 직감에 의존하는 만용을 부렸고 그 대가는 신혼 초부터 참으로 혹독하였다.

삼십년 전 그 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신부는 패물로 받은 팔찌를 꼭 차고 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양가 어른들은 고가품은 혼잡한 신혼여행지에서 분실이나
도난의 우려가 있으니 시댁에 보관하라고 극구 만류하였지만 신부는 막무가내였다. 나는 보석 팔찌를 차고 있는 신부가 마냥 예쁘기만 하여 신부 편을 들고 있었다. 첫날 밤, 신랑은 얼음에 채워진 샴페인을 방으로 주문하였고 늦게까지 신부와 블루스를 추었다. 신부는 잠자리에서도 팔찌를 소중하게 차고 있었고.

다음날 둘이는 다른 신혼 커플들처럼 택시를 전세내 관광을 나섰다. 택시 기사들은 사진사 노릇을 겸하고 있었는데 제주도 구석구석의 포토 존을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었다.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포즈를 취해야 좋은 그림이 나오는지 가히 전문가적인 안목을 구비한 그들은 신혼여행의 추억을 보증하는 연출가요 숙련된 촬영감독이라 불릴만했다. 그날 주연 배우인 신랑신부는 고분고분 감독의 지시에 잘도 따랐다. 어느 갈대밭 주위에서 신랑은 신부를 담쏙 안고 허리위로 올려 과감하게 돌리는 포즈를 취하기도 하였고 신부는 행복에 겨운 듯,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연기도 서슴지 않고 소화하였다.

하지만 단 꿈의 일정이 산산조각 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동 중인 택시 안에서 소스라치듯, 신부의 울음 섞인 외마디가 터져 나온 것이다
.
“팔찌가 없어졌어요, 팔찌가. 조금 전까지 분명 차고 있었는데.그럴 리가. 택시기사는 반신반의하였다. 한시도 두 사람에게 주의를 놓지 않고 촬영을 하고 있었는데 팔찌가 흘러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제주도에는 소매치기나 도둑이 없어요, 혹시 택시 안에 흘렀는지 봅시다.고맙게도 기사는 좌석 시트를 전부 들어내고 차 내부를 완전히 분해하였다. 흔적도 없다. 난감하였다. 반나절 동안 돌아 다녔던 곳을 일일이 다시 찾아다녀야 하나. 아내는 신음을 뱉으며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어떡해, 시부모님들이 그렇게 차고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 나 어떡해.일단 아내를 진정시켜야겠다. “이봐요, 우리가 신혼여행을 마치면 바로 당신 집으로 갈 것 아니요. 한 이틀, 친정에 머물면서 모조품을 하나 구입해서 시댁으로 갑시다, 아주 비슷한 놈으로. 나중에 형편이 되면 진품으로 새로 구입하면 되지 않겠소.참 어른스런 발상이었다. 며느리의 고집과 실수로 신혼 초부터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자 비상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드라마 “형사 콜롬보”에서 범인을 꼼작 못하게 하던 증거 수집과정이 떠올랐던 것이다.
택시 기사에게 그 즈음 유행하기 시작한 45분 고속 사진현상소가 제주도에도 있는지 물어보았다. 최근에 막 개업한 곳이 근처에 있단다. 다행이다. 반나절 동안 촬영한 사진을 전부 현상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 시간 뒤, 숙소 호텔 로비에서 현상된 사진을 기사와 검토하면서 나는 쾌재를 불렀다. 아침에 호텔을 나서면서 찍은 사진에는 아내 손목에 팔찌가 눈부시게 반짝거리고 있다. 그런데 갈대밭을 지나면서 팔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래, 바로 이곳이다. '갈대밭 근처 어딘가에서 감독의 지시에 따라 아내를 안고 좀 오버하는 포즈를 취했었지. 사진 속 풍경을 잘 관찰하면 팔찌를 찾을 수 있겠다.' 나는 급하게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 눈물 자국에 얼룩진 신부 얼굴을 대하자 억장이 무너지는 측은지심이 든다. 현상된 사진들을 전부 건네주었다. 풀이 죽은 아내를 빨리 달래서 참혹한 신혼여행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싶었다. “내일 아침 일찍, 이 장소에 가서 찾아봅시다. 택시 기사도 친구들을 몇 명 동원하기로 하였으니 찾을 확률이 매우 높을 거요.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진들을 뚫어지게 관찰하였다. 당시로는 몇 시간 전에 찍은 사진을 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기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신통방통한 반전을 떠올린 신랑이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반응을 기다리며 나는 약간의 칭찬과 감사의 말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자 눈물자국이 남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뛰며 그녀는 반색을 하였다.

“이것 보세요, 우리 둘이 찍은 사진 진짜 너무 잘 나왔다. 내일은 다니면서 사진 좀 더 많이 찍어야겠어요.” 귀를 의심하였다. 잘못 들었나.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저런
철없는 말을 할 수 있지. 자기 실수를 만회해 주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 때 번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아, 이 결혼, 겐또우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 갈대밭 숲속에서 수 시간의 수색 끝에 기적처럼 팔찌를 찾아 환호하면서도 나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아내와 부부로 살면서 겐또우를 잘못 짚었다는 느낌이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매결혼의 맹점이다. 그래도 정확히 삼십 년을 한 지붕
밑에 부대끼면서 살아 왔다. 자식도 세 명이나 두었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인내하며 살아왔을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삼십년 전 아내를 선택한 나의 겐또우가 기적을 낳은 것으로 보아야 할지 모르겠다.

  

-닥터 허원주의 병원 에세이,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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