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아주까리가 어때서] [들기름, 아주까리기름, 왕세자… ]

뚝섬 2023. 2. 28. 08:53

[아주까리가 어때서] 

[들기름, 아주까리기름, 왕세자… 대한민국 국회엔 말보다 방귀가 많다]

 

 

 

아주까리가 어때서

 

[한현우의 미세한 풍경]

 

정치인들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을 일일이 곱씹는 건 바보짓이지만 “아주까리기름 먹느냐. 왜 이렇게 깐족대느냐”는 말은 대관절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너무 궁금했다. 무지와 경솔을 만천하에 스스로 까발리는 헛소리는 여럿 들어봤지만 이 말은 구체적 인과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면서도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까리기름을 먹으면 깐족대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주까리는 응원가로 부르는 노래 ‘아리랑 목동’에 등장한다. “꽃바구니 옆에 끼고/ 나물 캐는 아가씨야/ 아주까리 동백꽃이/ 제 아무리 고와도”다. 어깨동무하고 이 노래 부르는 젊은 관중 가운데 아주까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후렴의 ‘아리아리’와 운율 맞춘 의태어로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싶다.

 

1955년 발표한 이 노래는 느닷없이 응원가로 불리면서 가사에 심각한 왜곡이 생겼다. “동네방네 생각나는/ 내 사랑만 하오리까”가 그것이다. 내 사랑이 동네방네 소문나거나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생각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원래 가사인 “몽매간(夢寐間)에 생각 사 자(思字)”가 입에 붙기엔 너무 어려웠던 탓에 변형됐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차라리 “꿈에서도 생각나는”으로 개사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강원도 아리랑에도 아주까리가 나온다.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다. 여기에서도 아주까리와 동백은 붙어 있다. 식물의 씨앗을 기름은 예부터 여자들이 머리에 바르는 미용 기름이었다. 그래서 곱다고 한다. 민요에서 둘이 붙어다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강원도 아리랑은 온다더니 소식 없는 임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임이 안 오시는데 아주까리 열려봐야 곱게 단장할 일 없다는 말이다. 아주까리기름은 사랑의 상징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아/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 난다” 하는 영천 아리랑을 봐도 그렇다.

 

아주까리기름은 등잔불 밝히는 썼다. 그 불빛은 밝지 않고 어둠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백석은 1935년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 ‘정주성(定州城)’에서 읊었다. “산턱 원두막은 비었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 심지에 아주까리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성터는 허물어지고 왁자지껄하던 곳엔 인적 없는데 아주까리 등불 희미하다. 시인은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라고 했다. 나라가 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삶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송해의 애창곡이었던 1941년 작 ‘아주까리 등불’도 애처롭다. “엄마는 돈을 벌러/ 서울로 갔다/ 바람에 깜박이는 아주까리 등잔불/ 저 멀리 개울 건너/ 손짓을 한다.” 엄마는 언젠가 올 것이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간신히 손짓하는 등불을 보고 개울 건너 집으로 올 것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들판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다. 비탄 속에서도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 아주까리기름은 먹고사는 일이었고 고단하되 끈질긴 삶의 향료였다.

 

피마자유라고도 하는 아주까리기름은 윤활유로도 쓰인다. 영어로 아주까리기름은 캐스터 오일(castor oil)인데 영국 자동차 윤활유 회사 캐스트롤(Castrol)은 20세기 초 아주까리기름을 첨가한 윤활유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이 제품이 잘 팔리자 ‘웨이크필드’였던 회사명을 아예 캐스트롤로 바꿨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벌인 전투기 윤활유를 대기 위해 조선의 아주까리를 훑어 갔다. 이 악랄한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은 조선 아낙네들이었다.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자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자살했을 때 김지하는 시 ‘아주까리 신풍(新風)–미시마 유키오에게’를 썼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처절한 신풍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아주까리엔 민족의 사랑과 그리움과 고단한 삶이 묻어있다. 일제를 겪은 세대에겐 분노와 한이 함께 맺혀있다. 어딜 들쳐봐도 아주까리는 먹고 깐족거리는 풀이 아니다. 특히 아주까리기름은 냄새가 역하고 설사와 복통을 일으키기에 고문할 썼다. 맛으로 먹는 기름이 아니다.

 

다만 이런 속담은 있다. ‘참깨 들깨 노는데 아주까리 못 놀까.’ ‘남들도 다 하는데 나라고 뒤질쏘냐’란 뜻이다. 다음엔 어떤 아주까리가 무슨 막말을 할지 자못 궁금하다.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조선일보(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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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름, 아주까리기름, 왕세자… 대한민국 국회엔 말보다 방귀가 많다

 

[노정태의 시사哲]
라퐁텐 우화늑대와 어린
프랭크퍼트개소리에 대하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이 시냇가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늑대 한 마리가 나타나 어린 양에게 호통을 쳤다. “이 어린놈아! 내가 마실 물을 왜 흐리고 있느냐?” 어린 양은 자기가 물을 마시던 위치와 늑대가 선 곳을 찬찬히 살펴본 후,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저는 하류에 있는데 어떻게 제가 늑대님이 마실 물을 흐릴 수 있나요?”

 

늑대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순순히 포기하지 않고, 머리를 굴리더니 다시 호통쳤다. “네 이놈, 어디서 봤다 했더니, 작년에 날 욕하고 도망갔던 그 녀석이로구나!” 어린 양은 기가 막혔다. “저는 작년에 태어나지도 않았는데요?” 또 할 말이 없어진 늑대는 잠시 고민 후 외쳤다. “그렇다면 네 형이 날 욕했구나. 그 대가로 널 잡아먹을 테니 원망하지 마라!”

 

프랑스의 우화 작가 장 드 라퐁텐이 쓴 ‘늑대와 어린 양’의 내용이다. 늑대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폭력을 정당화하려 든다. 어린 양은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상대방 말문을 막는다. 하지만 늑대가 한 말이 거짓임을 폭로해도 소용이 없다. 반성도 사과도 하지 않는 늑대는 또 다른 이상한 소리를 하며 계속 어린 양을 위협한다. 이런 식의 말하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말 아침부터 점잖지 못한 단어를 보여드리는 필자를 양해해주시길.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미국의 분석철학자 래리 G. 프랭크퍼트에 따르면, 늑대가 하는 말은 ‘개소리(bullshit)’다. 방금 보신 그소리’. 프랭크퍼트는 1986년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라는 짧은 논문을 펴냄으로써 일상 언어 사용에 대한 철학적 분석의 한 획을 그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재명이다라는 말을 고찰해 보자. 저 말이 거짓말이 되려면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사실. 둘째, 상대방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는 본인의 행위. 요컨대 참과 거짓을 구별해야 하고, 자신이 그 선을 넘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거짓말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개소리를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진리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 영어 단어 ‘bullshit’만 봐도 그렇다. 철학자는 그 안에 포함된 ‘똥(shit)’이라는 단어를 성찰한다. “대변은 설계되거나 수공예로 만드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싸거나 누는 것이다.” 개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개소리는 ‘싸지르는’ 것이다. 똥과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것은 아니다.”

 

영어 단어를 통한 분석이지만 우리말에서도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누군가가 개소리를 내뱉는다. 그 말을 듣는 우리는 짜증을 낸다. ‘이게 말이야, 방귀야?’ 사람 입에서 공기와 함께 언어를 내뱉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아무것도 없다. 전혀 공들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항문에서 나오는 방귀와 다르지 않다.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거짓말을 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들이지 않는다. 가끔 거짓말쟁이들도 느끼는 작은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 아무렇게나 내뱉고 되는대로 지껄이면서 상대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윤리적으로 해롭다. 거짓말은 참과 거짓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을 전제로 하는 반면, 개소리는 그조차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관심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즉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프랭크퍼트가 말하는 개소리의 본질이다.

 

프랭크퍼트가 ‘개소리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쓴 것은 1986년 일. 화제의 논문이었지만 철학계라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본격적으로 이 논의가 확산된 것은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2005년부터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로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던 부시 정권에 대한 지식인들의 분노가 ‘개소리에 대하여’를 출구 삼아 뿜어져 나왔던 것이다. 결국 철학 논문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이변이 벌어졌다. 개소리라는 철학적 개념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트럼프가 내뱉던막말 분석하는 도구로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개소리가 우화 속에만 있다면, 남의 나라 일일 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현실은 우스꽝스럽다 못해 그로테스크하다. 지난 6일 국회 대정부 질문 현장을 떠올려 보자.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불러놓고 야당 의원들이 호통을 치고, 빈정거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째려보았다. 어린 양을 잡아먹을 핑계를 대고 싶은 늑대처럼 안달이 있던 그들은 바야흐로 개소리의 향연을 펼친 것이다.

 

그중 백미는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의원의 말. 장관은 들기름, 참기름 먹고 아주까리 기름 먹어요?” 여기서 정청래라는 사람은 ‘한동훈이라는 사람이 아주까리 기름을 식용유로 쓴다’고 거짓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뒤이어지는 문답을 보면 분명하다. 당황한 한 장관이 “그게 무슨 소립니까?”라고 되묻자, 정 의원은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아주까리 기름. 왜 이렇게 깐족대요?” 상대방에 대한 본인의 비호감을 드러내기 위해 얼토당토않은 아무 말이나 마구 내뱉는, 교과서적 개소리인 셈이다.

 

민주당 박성준 의원도 그에 질세라 국회의 품격을 높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과정에서 알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 장관이 “나에게 물어볼 일이냐”고 답하자, 마치 준비했다는 듯 박 의원이 하는 말. “그럼 왕세자가 도대체 누구냐? 세자 책봉했다. 그것은 바로 한동훈 장관 아니겠느냐?” 이런 장면을 보며 라퐁텐의 우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너는 작년에 나를 욕했던 양의 동생 아니냐’고 개소리를 하던 늑대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으니 말이다.

 

라퐁텐의 우화는 현실적이고 냉정하다. 어린 양이 잡아먹히는 비극으로 끝난다. 늑대가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를 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한 어린 양은 ‘반격’ 대신 ‘반박’만 하다가 도망갈 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야생이 아닌 민주주의 법치국가에 살고 있다. 개소리를 하며 호시탐탐 때를 노리는 자를 겁낼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 국회에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무언가가 가득 있다. 문을 활짝 열고 환기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조선일보(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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