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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영정 논란] .... [조선총독부 청사] ['친일 나무']

뚝섬 2023. 2. 28. 08:54

[이순신 영정 논란]

[부끄러운 역사도 남겨야 한다]

[조선총독부 청사]

['친일 나무']

 

 

 

이순신 영정 논란

 

조선은 ‘초상화의 나라’였다. 제사 때문인 듯하다. 지위가 높을수록 제사를 위해 자신이나 부모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털오라기 하나라도 닮아야 한다”고 했다. 실물을 미화한 중국이나 유럽과 달리 조선 초상화는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극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걸작이라는 심환지 초상화, 윤두서 자화상이 전형이다. 노인 반점, 곰보 자국까지 생생한 초상화도 있다.

 

▶왕을 그린 ‘어진(御眞)’은 조선 초상화의 최고봉이다. 당대 최고 화가들이 전력을 다해 그렸다. 조선은 역대 모든 왕의 어진을 그려 보관했다. 온전했다면 최고 국보가 됐을 것이다. 불행히도 6·25전쟁 직후 부산 임시 보관소에 불이 나 거의 다 타버렸다. 영조 어진과 반쪽이 사라진 철종 어진, 전주 경기전에 별도 보관돼 있던 태조 어진만 겨우 전한다. 이 어진의 세밀한 묘사를 보면 왕 초상화도 사실주의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화폐엔 5명이 그려져 있다. 모두 조선시대 인물인데도 실물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상으로 그린 정부 공인 ‘표준 영정’을 사용한다. 위대한 측면을 부각하는 그림이기에 이상형 같은 모습들이다. 조선의 사실주의 초상화와 달리 이 영정들은 다 비슷비슷한 얼굴이다.

 

▶100원 동전의 이순신 영정은 원래 논란이 많았다. 불패의 무장인데 영정 모습은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에 대해 “단아하고 수양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했다. 반면 “후덕하지 않고 입술이 치올라서 복장(福將) 아니다”라는 기록도 있다. 유성룡의 기록이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연구자도 있다. 혹평에 따라 위인을 그릴 수는 없지만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래도 많은 국민에게 이 영정은 이순신의 본모습처럼 각인돼 있다. 오래 걸려 형성된 이미지라면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정을 그린 동양화가 월전(月田) 장우성의 후손이 이순신 영정 반환과 저작권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몇 년 전 냈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이 월전이 친일 화가라며 화폐 교체를 추진하자 아버지가 매도되는 두고 없다 반발한 것이다. 5000원권과 1만원권, 5만원권에도 같은 논란이 있다. 이들을 교체하려면 4000억원 이상 든다고 한다. 화폐 속 위인의 적합성이나 영정의 사실성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위인을 그린 화가의 100 행적을 들춰내 화폐 대부분을 바꾸겠다는 나라가 있을까. 문재인 시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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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역사도 남겨야 한다

 

이토 친필 새긴 한국은행 머릿돌, 문화재위, 만장일치 보존 의결
치욕의 역사도 남기고 되새겨야 부끄럽지 않은 미래 가능하다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 글씨 ‘定礎’(정초·주춧돌을 놓음)를 새긴 옛 한국은행 본관 머릿돌. 최근 문화재위원회에서 보존하기로 결론이 났다. /문화재청

 

철거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글씨 머릿돌’을 보존하기로 최근 결론이 났다. 문화재위원회 근대분과는 지난달 26일 회의에서 옛 한국은행 본관(사적 280호)의 머릿돌 관리 방안을 심의한 끝에 돌을 그대로 두고 설명 안내판을 따로 설치하기로 의결했다. 머릿돌에는 한반도 식민지화에 앞장섰던 초대 조선통감 이토의 친필로 ‘定礎’(정초·주춧돌을 놓는다는 뜻)가 새겨져 있다.

 

논란은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전용기 의원이 이토 친필설과 함께 처리 방안을 질의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전 의원은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필이 남겨져 있다는 것은 굉장히 부적절하다”며 “저는 건물을 없애자는 것도 아니고 정초석 하나 옮기자는 주장을 하는 거고…”라며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후 문화재청은 전문가 조사를 벌여 이토 친필이 맞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방안은 세 가지다. ①머릿돌은 그대로 두되 이토의 글씨라는 안내판을 설치 ②머릿돌 글씨 부분을 석재로 덮어 씌우기 ③머릿돌 철거 후 독립기념관으로 이전. 근대분과의 한 문화재위원은 “원형을 유지하고 안내판을 설치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됐다”고 했다. 돌을 철거하거나 글씨를 새긴 표면을 덮어 흔적을 지우는 것은 단순히 ‘정초석 하나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에 대한 또다른 훼손이기 때문이다.

 

이번 논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과정이 떠올랐다. 1993년 김영삼 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일환으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했다. 이때도 찬반 논란이 뜨거웠다. “일제 침략의 상징이자 치욕의 흔적인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럴수록 보존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완전 철거, 원위치 보존, 이전 복원 등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끝내 완전한 철거를 강행한 대목은 두고두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중앙돔 첨탑을 해체하고, 이듬해 11월 전체 건물이 폭파되는 장면이 중계되면서 통쾌한 감정을 느낀 국민도 많았을 것이다.

 

‘네거티브 유산’에 대한 철거 논란이 반복될 때마다 우리가 간과하는 게 있다. 총독부 건물은 일제 36년간의 역사만 담고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자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기념물인 중앙청이었다는 것. 총독부 건물 철거는 뒤집어보면 대한민국 산업화와 근대화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깨끗이 부숴버렸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본관 건물은 1909년 주춧돌을 세운 뒤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됐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경제 수탈을 위해 일본이 세운 건축물이지만, 광복 이후 1950년부터 한국은행 본관이었고 6·25전쟁 때 폭격으로 내부가 불에 탄 뒤 1958년 1월 임시로 복구했으며, 1989년 5월 원형 복원해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토의 흔적을 지우면 당장 속이야 후련하겠지만, 수탈의 증거와 함께 현대사의 현장을 우리 손으로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다행히 근래 들어선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네거티브 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치욕의 순간을 간직한 유산이라고 해서 눈앞에서 없애버린다고 그 시간까지 도려낼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적지처럼, 남기고 알려서 과거에서 어떻게 교훈을 얻을지 되새겨야 한다. 부끄러운 역사를 남겨야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허윤희 기자, 조선일보(21-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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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청사

 

르네상스·바로크 뒤섞은 日 '근세부흥식' 건축… 1926년 완공 당시 동양서 가장 거대

 

올해는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경술국치'가 일어난 지 110년이 되는 해죠. 1945년까지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고 수탈했던 기관인 '조선총독부' 청사는 역사의 아픔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습니다. 1996년 해체가 끝나면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1926년 완공된 이래 약 70년간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있었어요.

 

1910년 한반도를 식민 통치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는 남산에 있는 조선통감부 건물을 청사로 사용했어요. 하지만 사무 공간이 비좁다는 이유로 신청사 건립을 계획합니다. 오늘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옛 서울대 문리대)과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등이 후보지로 꼽혔는데, 최종 부지는 경복궁 경내로 낙점됐지요. 조선 왕조의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임금이 정사를 논하는 근정전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흥례문을 부수고 거대한 청사를 짓겠다는 것이었어요.

원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12년 독일 건축가 게오르게 데 라란데가 설계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급사하는 바람에 일찍이 대만 총독부 건립 경험이 있던 일본 건축가 노무라 이치로가 설계를 마무리했습니다. 1926년 착공해 완공까지 10년이나 걸렸는데, 일제가 상당한 공을 들였지요. 한반도 식민 통치가 오래 계속될 것이라 생각했던 거예요.

지하 1층, 지상 4층 높이로 전면 너비만 131m에 달하는 이 신청사는 철근 콘크리트로 골조를 세웠지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근세부흥식'으로 지어졌어요. 유럽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을 모방해 서로 뒤섞은 뒤 이를 일본 스타일로 소화한 건축 양식이죠. 내부에 거대한 안뜰 두 개를 배치한 대칭 구조는 과거 유럽에서 궁전이나 관공서 등 권위 있는 건물에 자주 쓰는 형태였지요. 건축 면적 약 7000㎡, 연면적 약 3만1750㎡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거대한 서양식 건물이었어요. 내부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해서, 한반도 전역에서 채취한 다채로운 대리석으로 바닥과 벽, 기둥을 마감했고 유럽에서 공수한 거대한 청동 조명과 샹들리에, 황금빛 커튼으로 내부를 장식했습니다.

1945년 광복 이후 이곳은 미군정 청사가 되었어요. 이후 이곳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국회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됐죠. 1970년 정부서울청사 완공, 1982년 정부과천청사 완공 때까지 정부 청사 역할도 맡았답니다. 개·보수를 거쳐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변신했죠.

김영삼 정부는 1993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발표했습니다. 당시에도 '일제 잔재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과 '치욕의 역사도 보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맞붙었지만 여론이 철거 쪽으로 기울었어요. 그리고 1995년 8월 15일 커다란 기중기가 건물 중앙 돔 꼭대기의 첨탑을 들어 올리며 이 건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현재 해체된 첨탑과 일부 잔해는 독립기념관 야외 공원에서 볼 수 있어요. 다만 5m 아래 땅에 놓아서 위에서 내려다보도록 했고, 해가 지는 서쪽에 배치해 일제의 패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종현·디자인 건축 저널리스트, 조선일보(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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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나무'

 

나팔꽃, 분꽃, 달맞이꽃은 이름만으로 정겹다. 먼 조상 대대로 고향 집 길모퉁이를 지켜온 것 같다. 그러나 착각이다. 각각 인도, 중미, 남미가 원산지다. 들녘에 흔한 개망초와 토끼풀, 도시에 흔한 서양민들레도 국내 정착한 외래종이다. 이런 '귀화 식물'이 국내에 400종이 넘는다. 나무 국적(國籍)을 따져 뭐 하나. 생태계에 문제 일으키지 않고 잘 어울려 살아가면 그게 우리 꽃이다.

 

▶그런데도 식물 국적 시비가 종종 벌어진다. 벚꽃이 대표적이다. 벚꽃이 일본 국화(國花)라는 인식 때문에 창경궁에 있던 벚나무가 대거 잘리거나 이식 됐다. 일본엔 국화가 없고 굳이 따지면 왕실 상징인 국화(菊花)라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다. 한·일 식물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왕벚나무의 원산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논쟁은 허망하게 끝났다. 국립수목원이 한·일 왕벚나무의 전체 유전체(게놈)를 해독해보니 "두 나무의 종이 아예 다르다"는 사실이 지난해 밝혀졌다.

▶이번엔 향나무가 시비에 휘말렸다. 제주도의회가 3일 '일제 식민 잔재 청산 조례안'을 입법 예고했다. 제주교육청은 "교내에 심은 '가이즈카 향나무'는 일제 잔재" "조례안이 통과하면 베어낼 것"이라고 한다. 이 향나무를 교목(校木)으로 지정한 제주도 내 초·중·고가 21곳이다. 교정의 향나무 2157그루가 모조리 잘려나갈 판이다. 대통령이 친일 청산을 요구하니 도로명, 교가(校歌)까지 바꾸고 이제는 식물까지 공격한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대구 달성공원에서 가이즈카 향나무를 기념 식수했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작년 발간한 '정신문화연구'에 "가이즈카 향나무에 관한 속설은 대부분 허구"라는 논문을 실었다. 이 향나무의 일본명인 '가이즈카이부키(貝塚伊吹)'가 처음 등장한 게 1928년이어서 "1909년엔 그런 향나무가 있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1930년 발간된 일본 문헌엔 이토가 심은 향나무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향나무 원산지는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등 여럿이다. 서울 창덕궁과 선농단 등지엔 수령 500년 넘은 향나무가 있다. 반면 삼나무는 일본만이 원산지다. 일제강점기 국내에 들어와 제주도 마을 주변과 논밭, 과수원 등지의 방풍림으로 심어져 제주의 대표적 수종이 됐다. 향나무를 베어내겠다는 논리라면 그 전에 삼나무부터 먼저 베어내야 한다. 제주가 황폐해질 것이다. 이 한심한 코미디를 언제까지 봐야 하나.

 

-박은호 논설위원, 조선일보(19-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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