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호남 정치인들]
[한·일 협력 강화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시대적 요구]
[경성방직]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호남 정치인들
송진우·백관수와 ‘호남 삼총사’ 김성수, 기득권 버리고 토지개혁 동참
순창 출신 대법원장 김병로, 영암 출신 법무장관 김준연도 건국 기여
호남인이 함께 세운 이 나라 무너뜨리려는 세력 지지해선 안 돼
대한민국이 세계사에서 예외적으로 성공한 나라라는 점은 세계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식민지를 겪은 대부분 국가들은 산업화와 민주화에 실패하고, 포퓰리즘에 무너지거나 쿠데타가 빈발하는 등 진정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일본이 물러난 뒤 전근대적 조선 왕조로 돌아가지 않고, 근대국가 대한민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굳게 정하고, 수많은 인재들이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엔 호남의 인재들도 대거 참여했다. 호남의 너른 들판에서 일군 부를 기반으로 건국에 기여한 인재들의 중심에는 인촌 김성수(1891~1955)가 있었다.
조선이 몰락하던 1891년 전북 고창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난 김성수는 가족들의 반대에도 일본 유학길에 올라 발전된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민족의 실력 향상을 위해 시급한 과제인 교육사업에 뛰어든 그는 중앙학교(현 중앙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인수해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국내 최초 주식회사인 경성방직을 세워 민족의 의생활을 향상시킴은 물론 민족 자본을 축적하고 기술자들을 길러냈다. 동아일보를 창간해 조선일보와 함께 민족 정론지의 역할을 했다. 그가 직접 독립운동에 거금을 후원했음을 상기할 필요 없이 그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이었다. 민족이 스스로(獨) 일어설(立) 힘을 길렀기 때문이다.

해방 후 김성수는 좌익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조직과 자금을 대어 우익 계열 인사들을 규합해 한국민주당을 창당했다. 한민당을 통해 미군정과 협력해 혼란을 수습하면서 북한에 공산 정권을 세운 김일성과는 단호히 선을 긋고 이승만과 함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김성수는 기꺼이 기득권을 내려놓았다. 최대 지주이던 그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한 토지개혁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이 때의 토지개혁은 근대 국민국가 출발의 바탕이었고, 6·25전쟁 때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마련해줘 공산 세력에 용감히 맞서 싸울 원동력이 되었다.
김성수 곁에는 송진우(1890~1945)와 백관수(1889~1951)가 늘 함께해 ‘호남 삼총사’라 불렸다. 전남 담양 출신 송진우는 메이지대를 졸업하고 중앙학교의 교장이 되어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했다. 식민지 시대 동아일보 사장을 지내고 해방 후 한민당 대표를 역임했다. 전북 고창 출신 백관수는 메이지대 법대를 졸업하고 중앙학교와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 근무하다 제헌국회 의원이 되어 헌법을 기초했다.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론한 전북 순창 출신 김병로(1887~1964)는 대한민국 건국 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도쿄대 유학 후 베를린대로 건너가 수학한 뒤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을 역임한 전남 영암 출신 김준연(1895~1971)은 대한민국 헌법기초위원 및 제헌국회 의원과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호남 출신 정치인이 ‘이’ ‘이모’ 등 저급한 수준을 보이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당대 사람들의 지지로 부통령을 지낸 김성수는 안타깝게도 명의가 도용된 ‘징병 권고문’이 문제되어 문재인 정권 때 건국공로훈장이 박탈됐고, 고려대 인근의 길 이름 ‘인촌로’도 사라졌다. 건국에 기여한 인사들을 친일파라 낙인찍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선동에 호남인을 포함해 상당수 국민이 호응하는 것은 정신적 식민지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퇴행의 증거이자 열등감의 표출이다. 호남인이 함께 주도해 건국한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북한에 비자금을 보내고, 비리 의혹 정치인을 위해 방탄 국회를 여는 정당에 호남이 압도적 지지를 보내는 현실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호남인이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건국사를 알고 자부심을 가진다면 결코 반(反)대한민국 세력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저급한 반일 선동에 맞서 대한민국이 미래 지향적인 선택을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다. 해방 후 8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는 피해 의식과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내 고향 호남 사람들이 먼저 행동에 나서는 건 어떨까.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호남의 대표 정치인 김성수에 대한 복권 운동이 그 시작이길 바란다.
-박은식 의사·호남대안포럼 공동대표, 조선일보(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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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협력 강화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시대적 요구
윤석열 대통령의 방일로 강제 징용 해법 문제를 둘러싸고 촌보(寸步)도 나가지 못했던 한일 관계가 새로운 협력 시대로의 도약을 기대하게 되었다. 물론 최근 한국 정부가 실행한 일련의 조치와 해법을 두고 한일 정치 세력과 시민 단체들은 공히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많은 말을 쏟아 내는 중이다. 때로는 점잖고 때로는 거친 언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를 한국이 자존심을 버리고 지나치게 양보한 일본의 승리로 단정 짓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작금의 세계는 지정학의 복귀로 불릴 만큼 위태롭고 불안한 정세를 계속 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실의 냉정함을 도외시한 채 과거에 집착하는 태도는 세계 10위 경제국이며 한류라는 세계 문화를 선도하는 21세기의 문화 아이콘을 보유한 한국에 맞지 않는다.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의 역할을 천명한 현 한국 정부의 위상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는 정치적 입장에 따라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에 대한 ‘비교 인식’을 과감히 떨쳐야 한다. 상대적 이익의 집착은 결국 절대적 이익의 손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일화가 있다. 일제 침략의 고통은 겪은 중국은 1973년 중일 수교 1년을 앞두고 진행된 일본과의 청구권 협상에서 배상액에 집착하기보다는 명분을 택한 일화가 있다. 당시 청구권 협상을 진행한 중국의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과감하게 청구권 배상을 포기하고 도덕적 명분을 선택했다. 중국이 침략자 일본과의 협상에서 금전 문제로 설왕설래하는 것은 중국의 도덕 가치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 저우언라이가 강조했던 용어가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는 이덕보원(以德報怨)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갚는 것은 하수이며 덕으로 원한을 갚는 것이 상책임을 웅변하는 말이다. 도덕적 명분과 우위를 점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변하지 않는 상대를 앞에 두고 우리만 이렇게 덕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며 일본의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는 주장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기시다 총리의 정치 상황이 확고한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고 일본 우익의 대(對)한국 인식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는 일임은 분명하다.
외교는 기본적으로 국제 무대에서 자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활동이며, 늘 변하는 생물(生物)이다. 우리는 지난 정부가 대북 소통에 ‘올인’하면서 한반도의 난국을 타개하려던 시도와 중국에의 지나친 기대가 가져온 어려움을 경험한 바 있다. 북한은 결국 실질적 핵보유국이 됐고, 우리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면서 연일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미사일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이 상황은 과거와는 다른 인식과 해법을 요구한다.
한일 협력의 강화는 엄혹한 세계 정세의 파고 속에서 각자의 이익 확보는 물론 인류 보편 가치, 즉 민주, 자유와 평등의 수호에 대한 시대적 요구이기도 하다. 이는 한 국가의 노력과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로서, 또 북핵에 대한 공동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한일 관계는 연대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일본의 변화가 급선무지만, 일단 ‘이덕보원’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구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이러한 연대의 구축은 서로 득과 실을 따지는 상대적 이익의 관점보다는 양국이 함께 만들어낼 수 있는 절대 이익에 기반을 둬야 한다. 한국의 행보는 대일 관계는 물론 대미 관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상대적으로 대중 관계나 대북 관계에도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다. 대승적 차원에서 양국의 협력이 새로운 미래의 시발점이 될 것을 확신한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교수, 조선일보(23-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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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직
“경성방직은 일제 때 최고의 한국인 기업”
“오늘날 한국에 삼성전자가 있다면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방직이 있었습니다. 경성방직은 당대 최고의 한국인 기업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방직의 역사와 그 설립자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 일가의 경영 철학과 활동을 분석한 책 ‘대군의 척후’(푸른역사)를 낸 경제연구가 주익종(48) 씨. 그는 경성방직의 성장사를 통해 오늘날의 역동적인 한국 기업들의 기원을 살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 기업들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일제 강점기 대표적 한국인 기업이었던 경성방직을 분석한 책 ‘대군의 척후’를 최근 펴낸 주익종 씨
주 씨는 서울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미국 하버드대 방문연구원을 지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가 이끄는 낙성대경제연구소의 일원으로 한국경제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으며 서울신용평가정보 이사로도 재직 중이다.
그는 “이번에 낸 책은 1991년 하버드대 카터 에커트 교수의 책 ‘제국의 후예’에 대한 반론의 성격도 있다”고 저술의 또 다른 이유를 밝혔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에커트 교수는 ‘제국의 후예’에서 경성방직을 당대 대표 기업이라고 하면서 “일본의 협력 덕분에 만주와 중국 본토까지 사업을 펼치는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 씨는 “경성방직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한 것일 뿐”이라며 “경성방직의 회계와 영업 활동 자료를 꼼꼼히 분석해 에커트 교수의 주장을 반박했다”고 말했다. 주 씨는 에커트의 책도 번역해 이번에 함께 냈다.
―경성방직 설립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촌 김성수는 대표적인 문명개화파다. 경성방직을 설립한 것은 그가 품고 있던 ‘근대화 이념’으로 설명해야 한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면서 근대문명의 위력을 절실히 체험했다. 일본의 공업을 보면서 조선의 장래도 공업화를 통해 구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은 이를 앞당기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아일보와 중앙학교 설립도 같은 생각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윤은 인촌에게 주요한 동기가 아니었다. 당시 그가 벌인 일이나 사업들은 돈을 버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에커트 교수는 총독부가 식산은행을 통해 한국인 기업들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주장했는데….
“당시 총독부는 대출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 게다가 경성방직은 토지를 담보로 맡기고 돈을 빌렸다. 정상적인 금융 거래였다는 얘기다. 식산은행은 한국인 기업이든, 일본인 기업이든 담보의 적절성에 따라 대출을 결정했다.”
―에커트 교수는 경성방직에서 생산한 제품의 판매도 일본 상인들이 크게 거들어줬다고 기술했다
“명백한 오류다. 에커트 교수는 1930년대 말 어느 해의 1년 치 기록만 보고 일본인 상회들이 경성방직의 제품 60%를 판매해 줬다고 했는데 다른 거래 명세를 보지 못한 결과다. 1919∼1926년 거래 명세가 적혀 있는 장부를 살펴봤는데 오히려 반대였다. 경성방직은 스스로 시장을 개척했고 한국 포목상들에게 제품의 대부분을 넘겼다.”
―일본의 중국 침략기에 경성방직이 중국 본토로 진출한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일제에 편승해 중국에 진출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시장 상황을 전혀 모르고 하는 얘기다. 1930년대 국내 면포 시장은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국외로 새롭게 시장을 개척한 것이다. 사업 의욕이 충만하던 기업가로선 당연한 판단이었다.”
―책을 쓰면서 인촌에 대해 받은 인상은….
“뛰어난 ‘조직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유학파를 중심으로 당대 최고 엘리트들을 중앙학교, 동아일보, 경성방직으로 끌어들였다. 수많은 유학생 가운데 인촌만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끌어나간 사람이 없다. 그런 역량을 바탕으로 인촌이 설립한 경성방직, 동아일보, 중앙학교는 당대 제조공업, 언론사업, 교육사업을 대표하는 근대화 사업의 최고봉이었다.”
―책의 제목 ‘대군(大軍)의 척후(斥候)’는 무슨 뜻인가
“춘원 이광수가 1935년에 쓴 글 가운데 ‘상업에서 화신백화점, 공업에서 경성방직의 확장 발전은 결코 한낱 사실만이 아니요, 뒤에 오는 대군의 척후임이 확실하다’고 한 데서 인용했다. 대군은 훗날 만개할 한국의 기업과 자본주의를, 척후는 선두에 서서 이를 이끌었던 두 기업을 의미한다.”
-금동근 기자, 동아일보(08-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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