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머니 머신”… 속수무책인 트럼프의 엉터리 ]
[돈 많이 가져다주는 家長, 트럼프]
[‘나토 발언’서 미리 보는 트럼프 2기의 새 청구서]
[바이든 조사한 특검 “기억력 나쁜 노인”]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려면]
“한국은 머니 머신”… 속수무책인 트럼프의 엉터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는 황당한 주장을 펼 때 뜬금없는 말로 논점을 흐리곤 한다. 며칠 전 미 유력 매체인 블룸버그 편집장과의 1 대 1 대담에서도 그랬다. 트럼프는 “당신의 감세 공약대로라면 국가부채가 10년 동안 최소 7조 달러(약 9000조 원)가 늘어난다는 보고서가 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그렇게 비판했다”는 질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신문이 뭘 아나. 모든 게 다 틀리는 신문이다. 하긴, 당신도 평생을 틀려 왔으니…”라고 응수했다. “당신이 틀렸다(wrong)”는 말을 5번 반복하는 장면에선 논리적 설명을 할 뜻이 안 보였다.
▷그 자리에서 트럼프 후보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현금인출기)”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대통령 재임 때 한국 정부에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더 대라. 국회에서 연 20억 달러(약 2조7000억 원)로 동의를 얻어 오라”고 요구했던 일을 공개했다. “그 다음 해엔 50억 달러를 받아낼 생각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의 분담액이 연 1조1000억 원에 못 미치던 때였다. 자신이 이렇게 애썼지만, 후임 바이든 대통령이 합의를 백지화시켰다는 비난을 빼놓지 않았다.
▷트럼프는 마치 우리 정부로부터 큰 걸 얻어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한미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협상은 그가 퇴임할 때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국방장관과 국무장관 등 참모들은 “한미동맹은 국방비 숫자를 뛰어넘어서는 전략적 가치가 있다”며 트럼프의 막무가내식 압박을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조언에는 별 관심이 없는 트럼프는 블룸버그 대담에서 “내가 지금도 대통령이었다면 한국은 매년 100억 달러를 내고 있을 것”이라고 호언했다.
▷대선 승리에 한 발 다가섰다는 트럼프의 예측 불가 기질은 중요한 문제다. 불쑥불쑥 이슈를 꺼내들면서 상대국을 압박하지만, 그때뿐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기자인 밥 우드워드의 책 ‘분노(Fear)’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파기와 관련된 일화가 담겨 있다. 하루는 트럼프가 “미국이 손해 보는 FTA를 깨겠다”며 효력정지 문서를 만들도록 불호령을 내렸다고 한다. 파장을 걱정한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장이 백악관 집무실 책상에 놓은 그 문서를 치워 버렸는데, 트럼프는 문서의 존재를 끝내 잊어 버렸다고 한다.
▷트럼프는 이날 특유의 화법으로 대담을 주도했다. 늘 그래 왔듯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어휘를 짧은 단문으로 쏟아냈다. 단순한 메시지를 열 번이고 백번이고 반복하는데, 그의 말을 확신하는 지지층은 여전히 두텁다. 그의 엉터리 언행에도 우리는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미 대선이 다가올수록 선거 결과가 우리 선거 때만큼이나 신경이 쓰인다.
-김승련 논설위원, 동아일보(24-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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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가져다주는 家長, 트럼프
[특파원 리포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7일 미시간주를 찾아 지지자들에게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만난 뉴욕의 한국계 미국인 공직자는 “가끔 한국 언론에서 미국 대선과 관련한 기사를 보면 의아할 때가 있다”고 했다. 한때 한국 언론에서 니키 헤일리 전 유엔 대사가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자웅을 겨루는 것처럼 보도했는데, 현지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는 다르다는 얘기였다. 그는 “바른말을 하지만 평범한 가장과 행동은 엉망이라도 집에 돈을 많이 가져다주는 아버지 중 하나를 고르라면 누구를 택하겠느냐”면서 “공화당 내 트럼프 인기는 압도적”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말은 괴팍하지만 종종 미국인들의 속마음을 대변하곤 한다. 지난 10일 트럼프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유세 도중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는 나토 동맹국에 대해선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도 방어하지 않고 오히려 러시아의 공격을 부추기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 말에 대해 “멍청하고, 부끄러우며, 위험하고, 미국답지 않다”고 비판했지만, 적어도 현장에 모인 미국인들은 호루라기를 불며 환호했다. 뉴욕타임스는 이 장면을 두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여전히 나토와의 동맹을 지지하지만, 반대 목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다”고 했다. 트럼프에게 치명적일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사법 리스크도 아직까지 영향이 미미하다. 유죄가 인정되고 천문학적인 벌금이 부과되더라도 출마를 막을 수 없다.
반면 바이든은 ‘나이’와의 싸움에서 고전하고 있다. 최근 그에게 비수를 꽂는 일도 벌어졌다.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의혹’을 수사한 연방 특별검사가 바이든을 고발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보고서에 그를 ‘기억력이 나쁜 노인’이라고 적었다. 이를 두고 “바이든에게 ‘코미 모멘트(comey moment)’가 왔다”는 해석도 있다. ‘코미 모멘트’는 2016년 대선 때 제임스 코미 당시 FBI 국장이 대선 11일을 남긴 상황에서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유출 의혹’ 재수사에 착수했다가 9일 만에 ‘무혐의’ 결론을 내린 사건이다. 힐러리는 이때 기소되지 않았지만, 치명타를 입고 결국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졌다.
미국에 와보니 한국의 대미(對美) 의존도는 생각보다 높다는 걸 느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대북 제재를 통과시키려 해도 미국을 움직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수출 중심 한국의 지난해 말 대미 수출액은 대중 수출액을 넘어섰다. 한국 투자자들은 연방준비제도가 기준 금리를 언제 낮추는지 들으려고 새벽잠을 설치고 연준 의장의 발표를 주시한다. 이런 상황에서 변칙 기술을 사용하는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또다시 한국은 의지와 상관없이 격랑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트럼프는 계산기를 두들겨 바이든 정부 때보다 훨씬 길어진 청구서를 들이밀 수도 있다. 한국 정부가 이런 흐름에 꼼꼼히 대비하기를 바랄 뿐이다.
-워싱턴=윤주헌 특파원, 조선일보(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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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발언’서 미리 보는 트럼프 2기의 새 청구서
[특파원칼럼]
‘안보 무임승차론’ 넘어 안보질서 재편 시사
‘中대응’ 주한미군 역할 조정 압박 대비해야
11월 미국 대선에서 재집권을 노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작심한 듯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공세를 퍼붓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0일(현지 시간) 대선 유세에서 나토 방위비 기준을 달성하지 못한 유럽 주요국을 ‘채무 불이행자’라고 규정하며 “러시아가 원하는 대로 하라고 독려하겠다”며 침공까지 부추기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가 나토에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공인된 사실. 하지만 ‘안보 무임승차론’을 제기하며 방위비 증액을 요구했던 집권 1기를 넘어 동맹국에 대한 러시아의 무력 사용을 독려하겠다는 이 발언은 미국을 최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기여해 온 동맹 체제의 근간을 흔들 폭탄 발언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4일에도 나토 동맹국이 현재 각국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방비로 부담해야 하는 비율을 2%에서 4%로 높이라고 촉구했다. 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동맹국은 나토의 집단안보 체제에서 제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측근도 등장했다. 일각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 뒤에 깔린 정치적 계산에 주목한다. 이 발언은 미 상원이 중남미 불법 이민자 차단을 위한 국경 대책 강화와 우크라이나 지원을 묶은 안보 지원 예산 패키지를 같이 처리하기로 합의한 직후 나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공화당 일부 강경파는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 통과를 위해 불법 이민자에 대한 강경 대응을 요구하며 해당 예산의 처리를 지연시켜 왔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공화당의 국경 강화 요구를 대폭 수용하면서 우크라이나 예산 지원을 막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나토의 방위비 분담금 추가 증액 등을 언급하면서 우크라이나 지원을 반대할 새로운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워싱턴 소식통은 이 발언을 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충동적인 면모가 아니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그의 집요한 면모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논평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유세 때마다 공약으로 강조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은 우크라이나가 상당 부분 영토를 포기해야만 가능하므로 실현 가능성이 크지 않다. 또한 우크라이나 종전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1기 추진했던 1만2000명의 독일 주둔 미군의 철수 계획을 현실화시킬 발판도 될 수 있다. 즉 침공 독려 발언의 기저엔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에 대한 미군 개입을 줄이려는 외교 기조가 깔려 있는 셈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그의 재집권 시 한국에 내밀 새 청구서로도 이어질 수 있다. 그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주독미군을 괌, 팔라우, 하와이, 알래스카 등 인도태평양의 다른 곳으로 배치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는 것은 미국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 모든 동맹의 과제”라며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다”고도 강조했다. 현재 북한 대응으로 국한된 주한미군의 역할과 구성을 조정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속내다.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주한미군 역할을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대만 분쟁 시 한국의 역할 등 동북아 안보 구조에 중요한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다.
유럽에선 ‘트럼프 리스크’에 미리 대비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차기 나토 사무총장으로 거론되는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17일 “이제 그만 징징거리고 유럽의 이익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유럽 못지않은 ‘트럼프 리스크’에 직면한 한국도 흘려듣지 말아야 할 얘기다.
-문병기 워싱턴 특파원, 동아일보(24-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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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든 조사한 특검 “기억력 나쁜 노인”
올 11월 두 번째 4년 임기에 도전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기억력 문제로 궁지에 몰렸다. 1942년생으로, 미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인 그가 재선되면 86세로 퇴임한다. 말실수 잦고, 자주 넘어지더니 이번엔 지난주 특별검사가 내놓은 345쪽 수사보고서가 미 정가를 흔들고 있다. 인스턴트 음식을 즐기는 과체중 도널드 트럼프(77)가 아니라 늘 운동하고 건강 식단을 챙기는 바이든(81)에게 생긴 건강 논란이 역설적이다.
▷한국계인 로버트 허(Hur) 특검은 바이든이 부통령에서 퇴임한 뒤 이란 우크라이나 군사기밀을 자택으로 가져간 일의 불법성을 수사했다. 바이든은 “참모의 단순 실수”라고 해명했고, 1년 수사의 결론은 “중범죄 혐의 없음”이었다. 사달은 그 이유에서 시작됐다. 허 특검은 “기소하더라도 대통령 변호사들은 배심원단에게 바이든을 ‘착하지만 기억력은 나쁜 노인’으로 묘사할 것이고, 결국 유죄 평결을 받기 어렵다”고 썼다. 미 특검은 조사를 마칠 때 유죄 가능성 판단을 밝혀야 한다.
▷허 특검은 지난해 10월 8, 9일 이틀에 걸쳐 5시간 동안 바이든을 백악관에서 조사했다. 그는 보고서 곳곳에 “의사소통이 느리고… 기억력에 한계가 있다”는 표현을 남겼다. 바이든은 반박문을 통해 “조사 시점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발발(7일) 이튿날로, 내가 국제분쟁의 한복판에 서 있을 때여서 그랬다”고 해명했다. 특검은 자택에서 찾은 녹음테이프에 기밀이 담겼는지도 확인했다. 확인 결과 바이든이 책 대필작가에게 구술한 테이프였다. 특검은 “녹음 속 바이든은 때론 듣기 고통스러울 정도로 말이 느렸다(painfully slow)”거나 “수첩을 보고 말하는 것도 힘겨워했다”고 썼다. “대통령이 내부 회의 때나 외국 정상과 만날 때는 판단이 날카롭다”는 백악관 해명을 180도 뒤집은 것이다.
▷메시지를 반박 못 하면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정치 공식이 워싱턴에서도 작동됐다. 민주당은 허 특검을 향해 “정치 목적으로 권한 밖의 일을 했다”는 공세를 폈다. 허 특검이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메릴랜드주 연방검사에 임명됐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서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공화당원이다. 하지만 그를 특검에 임명한 것은 바이든의 법무장관이었다.
▷“돈을 더 안 내면 러시아의 나토 공격을 장려하겠다”는 발언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킨 트럼프 캠프는 역공 소재로 삼고 있다. 공화당은 문제의 5시간 대화록을 의회에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녹음 속 하나하나를 따지겠다는 것이다. 91개 혐의로 4개 형사재판을 받고 있는 트럼프, 말과 행동이 둔해지는 바이든. 미국인들은 11월 두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투표권 없는 우리는 한반도 운명에 직결된 미국의 선택을 숨죽이며 지켜보게 됐다.
-김승련 논설위원, 동아일보(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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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려면
[朝鮮칼럼]
美의 예멘 후티반군 공습 때 빠진 아태 동맹국은 한국뿐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도 10년째 불참 동맹국은 한국뿐
인간사회도 국제사회도 베푼 만큼 받는 법
트럼프 시대에는 더욱 그럴 것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2월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콘웨이에서 열린 대선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다.AFP 연합뉴스
한반도 주변에 ‘위대한’ 국가들이 넘쳐나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일찌감치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기치로 패권 도전을 선언했고,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위대한’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위해 빼앗긴 땅을 수복하겠다며 3년째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 뒤를 이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횃불을 들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백악관 재입성을 향해 진군 중이다.
마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가 부활하기라도 한 듯 한반도가 온통 ‘위대한’ 주변국들에 둘러싸이고 그들이 상호 대립하는 신냉전 체제가 깊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끼여 상충하는 압박과 요구에 직면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은 고달프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하고 경제는 미국의 적국 중국에 의존했던 모순된 정책은 이제 설 땅이 없고, 한국이 원하건 원치 않건 선택이 불가피한 시대가 왔다. 게다가 당선 가능성이 점증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백악관 복귀가 초래할 ‘미국우선주의’로의 정책 전환은 냉전 이래 70년간 한미동맹의 일방적 수혜에 안주해 온 한국 외교에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다.
한국은 오랜 세월 미국, NATO, 호주, 일본 등으로 이루어진 자유민주진영 동맹 체제의 일원이었다. 미국이 주도해 온 이 동맹 체제는 과거 로마 시대의 동맹 체제와 매우 흡사하다. 공화정 시대 전성기의 로마는 이집트 등 6개 동맹국과 18개 속주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로마는 패권국임에도 불구하고 동맹국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세금도 받지 않았으나, 동맹국이 침공을 당하면 군대를 파견해 지원했다. 당시 로마가 그런 군사적 보호의 대가로 동맹국에 요구한 조건은 지극히 너그러웠다. 로마가 전쟁에 나갈 때 병력을 제공할 의무와 로마의 다른 동맹국을 침공하지 않을 의무가 전부였다. 그런 너그러운 동맹 조건 덕분에 로마의 패권은 다른 어느 패권국보다 오래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한 로마식의 개방적 동맹 개념을 승계한 미국은 냉전 시대 40년간 자유민주진영 전체에 막대한 군사적, 경제적 보호막을 제공했고 한국은 그 대표적 수혜국이었다. 그러나 탈냉전 후 30년간 지속된 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의 일부 동맹국들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의존하면서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 극대화를 위해 미국의 잠재적 적국인 중국, 러시아와 손잡고 그들의 전략적 이익에 봉사했다. 그 대표적 사례는 유럽의 독일과 아시아의 한국이었다. 국력이 점차 쇠퇴해 가는 탈냉전 시대의 미국이 직면했던 이런 배신적 상황에 대해 정면으로 분노의 칼을 뽑았던 것이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자국우선주의’라 비난받는 트럼프 대외 정책의 핵심은 미국의 이익이 없는 곳에 일방적 안보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미국의 안보지원을 받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기여를 제공하고 자주국방을 강화하라는 것이다. 그에 대한 동맹국들의 볼멘 불평에도 불구, 미국을 대체할 더 좋은 옵션은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대신 중국이나 러시아의 안보지원을 받으려면 아마도 주권이나 영토를 담보로 제공해야 할 것이다. 또한 ‘자국우선주의’는 세계적 공통 현상이며, 한국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나라다. 미국의 안보지원을 70년간 받고도 자국의 현안에만 매몰돼 남중국해, 대만 등 미국의 핵심 관심사에 무관심하고 방위비 분담금을 한 푼이라도 더 깎는 게 애국이라 칭송받는 한국도 철저한 ‘자국우선주의’ 국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기간 중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하고 북한이 그에 편승해 군사행동을 벌일 경우 미국의 군사지원이 가능할지 걱정하는 이가 많다. 국제사회는 인간 사회와 마찬가지로 베푼 만큼 받는 사회고, 트럼프의 시대엔 더욱 그럴 것이다. 한국 외교가 트럼프 시대의 격랑을 헤쳐가는 데 필요한 지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한국민의 세계관 깊은 곳에 자리한 ‘자국우선주의’를 극복하고 우리가 미국에 바라는 만큼의 상응하는 기여를 미국과 국제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달 초 미국의 예멘 후티반군 공습에는 아태 지역의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도 8개 연합국의 일원으로 동참했다. 파병이 금지된 일본을 제외하면 미국의 아태 지역 동맹국 중 빠진 나라는 한국뿐이다. 미국의 남중국해 ‘항행의 자유 작전’에 10년째 불참하는 동맹국도 한국뿐이다. 트럼프의 ‘자국우선주의’만 비판할 때가 아니다.
-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前 외교부 북핵대사, 조선일보(2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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