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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인가, 새우인가?] [여우·승냥이 시대 끝내고.. ] ....

뚝섬 2024. 8. 20. 10:47

[고래인가, 새우인가?]

[여우·승냥이 시대 끝내고, 새로운 정치인 나와야 한다]

["난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고래인가, 새우인가?

 

[김대중 칼럼]

해외에서 우리나라 보면 세계 톱10의 경제 대국
강력한 군사력·소프트파워 G7에 초대받는 고래 국가
안에서는 분열·갈등·저주 난무… 분단 후 사상·이념 대립 고착화
결국 한 나라 정치는 국민의 수준… 어느 쪽으로 갈지 국민이 판결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최고위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송파구 KSPO DOME(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제1차 정기전국당원대회에서 손을 맞잡아 들어보이며 당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뉴스1

 

대한민국은 이번 2024 파리올림픽에서 세계 8위의 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섰다. 독일·이탈리아·캐나다를 제친 순위다. 세계 순위를 따지자면 근자에 한국만큼 잘나가는 나라는 없다. 한국의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3만6000달러를 넘어서 드디어 일본을 따라잡았다고 한다. 군사 면에서는 세계 6위의 강국이고 자동차·휴대폰·반도체·선박 등 여러 면에서 한국은 선두 그룹에 진입한 지 오래다. 세계의 바다에 떠다니는 대형 선박의 43%가 우리 조선소에서 만든 것이고, 탱크·항공기 등 군사 무기도 세계시장에서 인기가 높다. 지하철·공항 등도 세계 일류 수준이고 머지않아 세계의 원전 시장에서도 한국이 우뚝 설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우리가 특히 자부해도 좋을 것은 이런 성취가 불과 50년 내외의 기간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참혹하고 참담한 전쟁을 겪으면서, 또 남북으로 갈린 상태에서 이념적 분열에 시달리면서 그런 불운들을 딛고 일어서 해낸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국의 발전을 세밀히 관찰해 온 스페인 출신 학자 라몬 파체코 파르도(영국 킹스칼리지 교수)는 2023년에 출간한 ‘새우에서 고래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오늘날 한국은 더 이상 고래들 사이에서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다. (중략) 한층 강화된 민주주의 사회이자 세계에서 열 번째 경제 대국 그리고 여섯 번째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소프트파워의 차원에서 열한 번째 나라, 또한 언론 자유를 기준으로 아시아 최고의 국가이며, G20 테이블에 자리를 차지하고 G7에 초대받는 이 나라는 절대 피라미가 아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 책을 읽다가 눈을 현실로 돌리면 우리는 오늘날 이 시간 한국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열과 갈등, 증오와 저주가 난무하는 정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라가 어떻게 건국됐는지를 8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정리하지 못하고 아직도 친일·반일 하면서 머리 터지게 싸우는 나라를 정말 제대로 보면서 하는 소리인가? 독일-프랑스처럼 수백 년을 원수처럼 죽이고 싸웠으면서도 손잡고 이웃하는 유럽의 학자가 무엇을 잘못 봤길래 아직도 친일, 죽창가 하면서 35년의 식민지 멘털리티에서 못 벗어나는 이 나라를 ‘고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국회를 보면 저질 정치의 극치를 본다. ‘180석’에 취해 이성이 마비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탄핵이니 특위니 하는 폭력적 언사가 일상이 되고 있다. 당대표 뽑는데 90% 가까이 찬성한다니 이 정당이 민주주의 정당인가 싶다. 지금 한국의 정치는 고래는커녕 새우라고 하기에도 창피할 만큼 타락하고 있다. 욕하는 것 보면 시정잡배도 저런 시정잡배가 없고 소셜미디어를 통한 비난의 정도는 도(度)를 넘는다.

 

나는 이 대립과 파괴적 언행들이 단순히 정치와 권력 추구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단 이후 고착화된 남북 대치에서 오는 사상과 이념의 대립에 기인한다고 본다. 그 대립의 뿌리에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지역 대립의 문제가 더 얹혀져 있다고 본다. 경제적 빈부의 차이에 대한 체질적 저항이 있고 그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좌우의 이념적 차이로 발전해 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이념적 대립을 더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남북 분단이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는 빈부의 문제, 보수와 진보좌파의 문제, 지역적 차별 의식의 확대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이런 이념적 좌우 대립은 우리가 좀 잘살게 되면 마찰이 적어지거나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보다 잘살게 되고 세계의 이목을 끌 만큼 발전하고 있음에도 그 대립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악랄하고 더 저질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남들은 우리를 부러워하고 우리를 따라오려고 모방하고 우리를 배우려고 한국을 찾아오는데 우리 정치는 ‘너 죽고 나 죽자’는 돌격형으로 치닫고 있다.

 

학자들은 한 나라의 정치는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지금 이 나라를 ‘고래’로 일군 국민은 누구이고, 저질 정치를 가능케 해준 표(票) 쏠림은 어느 국민에게서 나온 것인가 헷갈린다. 이렇게 언제까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렇게 만든 것이 국민의 표심이라면 언제까지 나라를 한쪽으로 끌고 갈 것인지 판결을 해줘야 하는 것도 국민 몫이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하나의 나라로서, 하나의 국민으로 비로소 고래로 발돋움할 것이다.

 

-김대중 칼럼니스트, 조선일보(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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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승냥이 시대 끝내고, 새로운 정치인 나와야 한다

 

정치판이 목불인견이다. 왜 정권을 잡았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재야 여당’의 행태도 안쓰럽지만, 다수 의석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집권 야당’의 행태는 거대한 국가적 코미디다.

 

그 무대의 주인공들이 볼 만하다. 곰이나 구렁이형 정도의 인간도 눈에 띄지 않는 가운데 여우와 승냥이형의 인간들이 무대를 주름잡고 있다. 계산속만 빠르고 뻔뻔스러움이 몸에 밴 인간들이 서로 할퀴고 으르렁거리는 언행들로 넘쳐나고 있다. 권력 편승과 개인적 보신을 위한 ‘무한 도전’만이 펼쳐지고 있다.

 

그러한 무한 도전에는 아무런 성역도 있을 수 없다는 듯, ‘조그만’ 인간들의 아귀다툼 속에 헌정 질서가 파괴되고 국가의 근간이 되는 제도들이 거침없이 무시당하고 있다. 그 모든 행태들이 ‘민주주의=다수결 원칙’이란 등식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많은 국민이 ‘이러려고 민주화했는가’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수결이 과연 민주주의 그 자체인지 정리하고 지나갈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국민 전체의 의사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국민들 모두가 단일하고 균질적인 의사를 가질 수는 없다. 따라서 국가적 사안에 대해 국민의 의사가 나누어질 경우 다수의 의사를 존중해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면서 소수의 전횡을 방지하는 방법이다.

 

다만 그것이 민주주의 운영의 원칙으로 작동하려면 적어도 다음의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다수결로 결정하기 전에 충분한 토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다수의 의사가 소수의 의사보다 타당하다는 점이 더 큰 설득력을 가질 때다. 그러한 과정이 없이 다수결 지상주의가 일방적으로 작동할 경우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된다.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유일한 원칙이라면 주민센터 직원의 선출이나 도로 포장 등 공적 사안 하나하나가 모두 국민투표로 결정돼야 한다. 모든 국가적 결정은 오직 투표를 통해 시행되어야 하며, 국가의 통치 체제나 법률 또는 관행 등도 필요가 없다. 선거 제도나 의회 제도만이 아니라 정당도 존속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민주주의라면 외딴 섬에 고립된 자족적인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제도가 민주주의이다. 결국 현재의 ‘집권 야당’은 다수결 지상주의를 표방하면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의와 절제 등의 윤리적 덕목들, 특정 집단이나 계층의 이익을 넘은 공공선, 미래에 대한 식견이 다수결 원칙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이뤄진다. 그것이 바로 헌법 1조의 의미다. ‘민주공화국’은 바로 그러한 조화를 추구할 때 구현된다. 그러한 조화를 포기하거나 무시하는 정당은 민주주의 정당도 아니고 국헌에 합당한 정당도 아니다.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다는 정당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반헌법적인 행동을 하면서 국가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은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놓여 있다. 그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반(反)민주주의 혹은 사이비 민주주의로 대한민국은 국가 전체가 쇠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

 

모든 것이 극단에 이르면 그것을 청산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태동하기 마련이다. 파리 올림픽에서 우리의 스포츠 영웅들이 보여준 너무나도 신선한 ‘깜짝 쇼’는 그 태동의 신호다. 승부에 임하면서 열과 성을 다하는 태도, 진솔하면서도 예지(叡智)까지 갖춘 언행은 민주주의를 추하게 변질시키는 정치인들의 그것과 극단적으로 대조된다.

 

이 시대는 대한민국에 저급하고 졸렬한 품성이나 범속한 식견으로는 극복 불가능한 난제를 던져주고 있다. 이제 새로운 정치인들이 등장해 시민사회 각 영역에서 넘쳐나고 있는 창조적인 에너지를 새로운 차원의 국가 발전으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때다.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정치학, 조선일보(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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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신물나는 질문, 너는 누구 쪽이냐
진영끼리도 편 가르며 악화됐지만
장대익·강준만 릴레이 칼럼 보며
지식인 소통, 희망의 씨앗을 본다
 

 

/조선일보DB

 

20년 전에 나온 작가 김훈(76)의 산문집 제목은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다. 덧붙일 말이 별로 없다. 너는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내 편이냐 아니냐. 좋아지기는커녕, 악화됐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세월로 알고 있다. 종교보다 정치 성향 차이가 연애·결혼 불가의 1번 이유더라는 보건사회연구원의 4000여 명 면접 조사 결과가 최근 공개됐다. 이제는 같은 진영끼리도 누구 편이냐로 사생결단이다. 수박이냐 아니냐, 우리 팬덤이냐 아니냐, 밀정이냐 아니냐.

 

20년이 흘러 작가가 이번에 펴낸 산문집 제목은 ‘허송세월’. 그렇게 헛되이 시간만 흘러간 걸까. 이 주제만으로 일관한 책은 물론 아니지만, ‘적대하는 언어들’이란 제목의 짧은 글이 그 안에 있다. 주인공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임화(1908~1953)다. 일제강점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최고봉. 서울이 고향이지만 그는 1947년 ‘사회주의 조국’ 평양으로 월북했고, 6·25 당시 인민군이 남하할 때 낙동강 전선까지 종군(從軍)한 확신범이다. 하지만 휴전 직후였던 1953년 8월 그는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사회주의 조국에서 그는 ‘밀정’이었다.

 

작가가 인용한 임화의 시 두 편이 있다. 6·25 때 인민군이 불렀던 ‘인민항쟁가’가 그중 하나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강력한 이념성과 폭발적인 선동력. 두 번째 시의 제목은 ‘바람이여 전하라’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전쟁의 참화를 겪고 돌아와 평양에서 발표한 작품. ‘불붙는 휘발유와/ 쏟아지는 총탄 속을/ 집과 낫가리와 마을까지를 잃고/ 바람 속에 서 있는 어머니에게…’ 혁명에서 인간으로, 이념에서 어머니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에 그의 죽음은 예비되어 있었다고 작가는 건조하게 적는다. 더 이상 내 편이 아니었을 때, 임화는 후방 인민을 모욕하고 패배주의적 감정과 투항주의 사상을 유포한 인민의 적이 되어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보다 이념을 우선해야 생존할 수 있는 삶이라니. 신물이 난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캐묻기보다, 광복절이냐 건국절이냐를 따지기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먹고사는 문제 아니었던가. 오래된 거리처럼 뭉근히 사랑하고, 아이와 조금 더 놀아주지 못해 아쉬워하는 하루하루가 인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울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다. 거대한 편 가름의 사회에서 극히 사소하고 순진한 반례일지 모르지만, 최근 색다른 칼럼 릴레이가 있었다. 장대익 가천대 교수의 8월 9일 자 조선일보 칼럼에 대해,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가 8월 14일 자 경향신문 칼럼으로 호응한 것이다. 주제는 이념이 아닌 일상. 도파민 유발하는 자극적 유튜브 생태계를 우려하며 좀 더 많은 지식인이 유튜브에 참여하자고 장 교수가 제안하자, 강 교수가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지식인들이 유튜브 생태계로 쉽게 이주할 수 있게 해주는 기술적 혁신 이야기로 화답한 것이다. 문재인 정권 이후 진보 진영을 주로 비판한 강 교수는 요즘 그 진영의 극단주의자들에게 ‘배신자’로 비난받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네 편 내 편’의 선봉이었던 논객 강준만을 떠올리면 아이러니지만, 지적 게으름과 지적 불성실로 여전히 너는 누구 편이냐만 묻고 있는 나태한 지식인들보다는 희망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득 지난 5월 세상을 떠난 시인 신경림(1935~2024)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어수웅 기자, 조선일보(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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