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이스라엘"… 다시 찾아온 빈살만의 시간
지난 11월 11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아랍-이슬람권 정상회의 때 모하마드 레자 아레프(가운데 양복 입은 사람) 이란 부통령이 사우디에 도착하는 장면. /AFP 연합뉴스
사우디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가자 사태 이후 정중동의 행보를 보여 온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1년 만에 다시 전면에 나섰다. 지난달 리야드에서 열린 아랍연맹(LAS)-이슬람협력기구(OIC) 특별 정상 회의를 주도하며 이스라엘을 ‘대량 학살’ 국가로 비난했다. 반(反)이스라엘 전선의 선봉에 선 것이다. 반면 숙적 이란에는 친근함을 표시했다. 빈살만은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서로 교감하며 독려했다. 회의에는 이란 부통령이 참석, 이스라엘 규탄에 함께했다.
작년 가자 사태 직전,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당시 빈살만은 중동 지정학의 판도를 주도하고 있었다. 인권 문제로 자신을 흔드는 바이든에게 거침없이 맞섰다. 석유 대금 위안화 결제설 등을 흘리며 사우디의 중국 경사(傾斜) 가능성을 내비쳤다. 미국의 역린을 건드렸다. 당황한 미국은 이스라엘과 사우디를 수교시켜 다시 품으려 했다. 사우디는 미국과 절연을 각오했을까? 안보 의존도나 국가 운영의 인적 네트워크 등을 보면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빈살만은 미·중 전략 경쟁 구도를 활용, 미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대담한 게임에 나선 것이었다.
미국이 반응하자 사우디는 기다렸다는 듯 두 가지를 요구했다. 조약에 근거한 동맹 관계와 원자력 협력이었다. 전자는 한미 동맹, 후자는 미·일 핵 협력을 떠올리게 했다. 미국으로서는 수용하기 쉽지 않은 요구였다. 그러나 사우디의 급격한 친중국화를 막아야 했다.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빈살만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수교) 직전에 와 있다’며 낙관하고 있었다. 이스라엘과의 수교는 사우디에도 실익이 크다. 이란 위협에 대비, 모사드와의 정보 자산 공유가 긴요했다. 이스라엘 남부 네게브 사막 연구·개발 인프라와 네옴 신도시를 잇는 기대 효과도 크다. 빈살만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선물을 얻는 양수겸장의 포석이었다. 작년 9월까지의 일이다.
가자 사태는 거침없이 질주하던 사우디를 멈춰 세웠다. 선대 국왕과 달리 팔레스타인 대의보다는 국가 발전이 중요한 빈살만은 짜증이 났을 법하다. 하마스는 미웠지만, 그렇다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을 사우디가 편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서 이스라엘이 휴전에 나서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자와 레바논 남부를 초토화하고 이란과 미사일을 주고받는 등 확전 일변도였다.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에 등을 돌렸다. 사우디도 어쩔 수 없었다. 여론은 확고했다. 사우디 국민의 95%가 아랍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새로운 판을 만들어야 했다. 이스라엘과 수교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도외시했다가는 그동안 자임해 온 아랍과 이슬람의 지도 국가 지위는커녕 공공의 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결국 빈살만은 팔레스타인 수호자의 이미지를 외교의 지렛대로 삼아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다. 지난 9월 국회(Shura)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 이전까지는 이스라엘과 수교하지 않겠노라 못을 박았다. 이후 연일 강경한 메시지를 발신하며 반이스라엘 대오를 이끌고 있다. 수니파 연대를 이끌며 시아파 이란을 견제하던 사우디가 종파 연대를 허물고 범이슬람권 연대를 이끌면서 시오니스트와 맞서 싸우는 구도로 전환했다. 급격한 반전(反轉) 포석이다.
네타냐후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유엔총회에서 ‘축복’과 ‘저주’의 진영론을 설파하며 이스라엘과 사우디의 ‘축복’ 연대를 주장했던 터였다. 사우디가 저주의 축을 이끄는 이란 옆에 선 것은 큰 부담이다. 사우디는 이제 진영의 일원에서 갑자기 중동 전역의 중재자로 스스로를 재설정했다. 사우디가 계속 강경하게 나설 경우, 자칫 아브라함 협정 서명국들은 물론, 이스라엘과 접경한 이집트, 요르단과도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이 경우 이스라엘은 다시 외교적으로 고립된다. 건국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겪은 후 아랍 적대 국가를 하나하나 공들여 친구로 돌려놓은 외교 성과가 순식간에 무너질 판이다. 하마스, 헤즈볼라와의 전쟁에서 이기고도 외교에서 처참한 실패를 마주할지 모르게 되었다.
이제 관심은 트럼프 대통령이 누구 손을 들어줄 것인가에 모인다. 네타냐후와 빈살만 모두 트럼프와 가깝다. 일단 첫 임기 중동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지와 반이란 강경 기조가 예상된다. 그러나 아브라함 협정을 최고의 치적으로 자랑해 온 트럼프가 이 협정의 화룡점정, 즉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수교를 원하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기에 빈살만의 요구를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이스라엘이 빨리 휴전하고 팔레스타인의 독립, 즉 ‘두 국가 해법’을 다시 인정하기 전까지 수교는 없다는 빈살만의 발언은 트럼프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독립을 설계한 트럼프판 평화 구상 ‘세기의 협상’안도 이미 마련되어 있다. 빈살만이 트럼프 야망의 고리를 잡아채어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루지 못했던 중동 평화 업적을 욕심내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브라함 협정 완결, 팔레스타인 독립, 나아가 이란까지도 외교 관계로 엮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어쩌면 지난 10월 사우디 언론 알아라비야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이란을 아브라함 협정에 포함하고 싶다며 지나가듯 언급한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은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
현재는 명분상 국제사회가 지지하는 두 국가 해법을 내세운 사우디가 우위다. 반면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강경파 각료들과의 연정을 이끄는 네타냐후는 고민일 것이다. 이제 트럼프를 사이에 두고 네타냐후와 빈살만의 수싸움이 치열할 것이다. 일단 빈살만이 다소 유리하다. 임기가 없는 빈살만은 트럼프의 지지 없이도 버티면 되지만, 네타냐후는 트럼프와 척지면 정치적으로 어려워진다. 어쩌면 이스라엘 국내 여론, 심지어 정부 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타냐후가 레바논 헤즈볼라와의 휴전을 서둘러 결의한 것도 취임 전 전쟁을 종료하고 싶어 하는 트럼프의 내심을 읽은 것은 아닐까? 서로 수교하고 싶어 하면서도 맞서야 하는 사우디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힌 중동 지정학의 단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조선일보(2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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