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한국과 일본의 세 번째 을사년] [겨울 문경새재에서.. ]

뚝섬 2025. 1. 8. 09:45

[한국과 일본의 세 번째 을사년] 

[겨울 문경새재에서 나라를 생각한다]

 

 

 

한국과 일본의 세 번째 을사년

 

1965년 국교 회복 후 韓日 관계
과거 상처 극복에 힘썼지만
과거사의 음영 여전히 짙어
다가오는 60년 함께 풀어가야
 

 

프로야구 롯데에서 활약한 재일교포 장훈(하리모토 이사오)씨=가나가와 가와사키 구장에서/2023.05.11 마이니치 신문 도쿄 본사 사진영상보도센터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은 을사늑약 2년 뒤인 1907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56년 만인 1963년 영구 귀국했다. 일본은 긴급 각의를 열어 노인이 되어 돌아가는 옛 인질에게 전별금 5만달러 지급을 의결했다. 2년 뒤인 1965년, 양국은 두 번째 을사년을 맞아 국교를 회복했다. 수교 후 일본이 다른 선진국들의 이전 건수를 다 합한 것보다도 많은 기술을 한국에 넘겼다. ‘미·일 안보 동맹’에 의한 동아시아 전략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식민 지배의 상처를 잊지 못하는 한국인의 감정을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을 원하는 민간의 마음은 국가 관계보다 순수했다. 지난주 타계한 소설가 송우혜씨 필생의 역작이 ‘윤동주 평전’이다. 그런데 첫 판을 낼 때까지도 작가는 윤동주가 왜 릿쿄대 재학 중 머리를 박박 깎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의문을 풀어준 이가 윤동주 사후 태어나 릿쿄대를 다닌 야나기하라 야스코씨였다.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한 그는 모교 학보 1942년 4월 10일 자에서 일제(日帝)가 태평양전쟁 발발 후 기풍을 다잡는다며 내린 단발령 기사를 찾아내 작가에게 전했다. 작가는 개정판 서문에 “일본인의 정성 어린 도움으로 평전의 내용이 더욱 보완되어 풍요롭게 완성될 날이 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고 썼다.

 

윤동주가 편입해 다닌 도시샤대는 1995년 교정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고 해마다 그의 기일(2월 16일)에 맞춰 헌화식을 한다. 시인의 80주기인 올해엔 문학박사 학위도 수여한다. 이 학교 총장은 “시인을 지켜주지 못한 분함이 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윤동주 사후 방치됐던 그의 무덤을 시인의 고향인 만주 용정까지 찾아가 위치를 확인한 이는 오무라 마스오 전 와세다대 교수였다. 1985년 시인의 무덤 앞에 제사상을 차리고 큰절을 올렸다. 평생 모은 윤동주 관련 자료 2만여 점은 재작년 별세할 때 한국에 기증했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에도 일본 야구계 도움이 컸다. ‘3000안타’의 주인공인 재일 교포 장훈은 후배 장명부·김일융이 조국에서 뛰도록 주선했다. 장훈의 스승인 미즈하라 시게루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 감독의 사연 앞에선 숙연해진다. 간경변을 앓는 몸으로 1982년 1월 방한해 훈련 노하우 등을 알려줬다. 두 달 뒤 열리는 개막전도 축하하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후 피를 토하고 쓰러져 공교롭게도 개막식 전날 별세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해방 때까지 한일 관계는 지배와 침탈, 저항과 분노로 점철된 불행의 역사였다. 두 번째 을사년인 1965년 국교 회복 이후 두 나라는 과거의 잘못을 수정하려 함께 노력했다. 국가 전략에 따른 필요와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가슴 아파한 민간의 순수한 감정 등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 결과였다고 본다.

 

일본이 오로지 식민 지배에 대한 미안함으로 우리와 관계 회복에 나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무릎을 꿇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이는 2차대전 이후 전범국에서 정상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독일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일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일 양국은 ‘1965년 을사년 이후’와는 다른 세 번째 을사년을 열어가야 한다. 2025년 벽두에 장훈씨의 한국 국적 포기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올랐을 때보다 한국 프로야구 출범 소식이 더 기뻤다”던 그였기에 의외였다. 그는 평소 “나는 한국인이란 게 자랑스럽지만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하지 말자”고 했다. 어쩌면 그는 세 번째 을사년 이후 한일 관계가 지난 120년과 다르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두 나라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숙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1-08)-

______________

 

 

겨울 문경새재에서 나라를 생각한다

 

[윤평중의 지천하] 

 

문경새재 겨울바람이 거세다. 지금 시국처럼 찬 바람이 온몸을 파고든다. 친구들과의 기차 여행에서도 마음 한구석 시름이 깊었다. 이심전심 나라 걱정이었다.

 

새재 황톳길은 청량하다.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와 동행한 오르막 산길이 평탄했다. 휠체어에 앉은 동료를 함께 밀며 내려오는 젊은이들 모습이 정겨웠다.

 

문경새재는 조선 시대 영남대로였다. 부산 동래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최단 거리여서 교통과 국방 요충지다. 지금 황톳길은 옛길을 펴고 넓혀 산책로를 만들었다. 제1관문 주흘관에서 제2관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 조령관까지 편도 6.5km로 조곡관까진 전동차도 운행한다.

 

새재 걷기는 산길 곳곳 퇴계, 다산 등 선비들 시비(詩碑)를 만나는 기쁨이 있다. 사람들이 쌓은 돌탑과 관리들이 묵었던 조령원 터, 주막과 옛길박물관도 있다. 신임 경상 감사와 전임 감사가 인수인계한 교귀정(交龜亭)이 우람한 소나무와 함께 우리를 맞는다.

 

문경새재 겨울 정취에 빠져 걷고 있는 나를 갑자기 섬광 같은 깨달음이 강타했다. 새재 오기 전엔 관문들이 건설된 정확한 시점을 몰랐다. 그 순간 문경새재 걷기가 한국사 최악의 국난 임진왜란을 돌아보는 나만의 성찰적 여행으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만8500명 선봉대는 가파른 문경새재에 이르러 주춤한다. 삼도순변사 신립의 조선군은 험준한 새재 지형을 살려 승부를 내야 했다. 제1진과 제2진을 지금의 주흘관과 조곡관 자리인 높은 언덕에 배치해 화살로 적을 공격하자고 부장 김여물과 이일이 진언했다. 험악한 산을 올라야 하는 왜군에겐 악몽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신립은 이 방책을 거부했다. 국망(國亡) 위기를 부른 치명적 오판이었다. 지금도 새재엔 2진 터[二陣址]가 있다. 신립은 대신 충주 달천평야(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가 8000명 전군(全軍)이 전멸한다. 탄금대 참패 닷새 후 한양이 불타고 살육과 기아가 온 땅을 휩쓴다.

 

해발고도 244m, 제1관문 주흘관 앞에 막상 직접 서 보니 1000m 넘는 조령산과 주흘산이 좌우에 버틴 천혜의 요새다. 웬만한 침략군은 넘보지 못할 웅대한 성채다. 조곡관도 그렇거니와 해발 650m인 조령관은 산 정상 높이에 있어 공략이 거의 불가능하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하늘을 날아가는 새도 넘기 어려운 군사 요충지다.

 

하지만 세 관문 축성 연대를 확인한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재 첫 관문은 전쟁 발발 2년 후(1594년)에야 지어졌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웅장한 주홀관·조곡관·조령관은 숙종 34~37년(1708~1711년)에 완성됐다. 결국 1592년 왜군이 새재를 급습했을 땐 세 관문 자체가 없었다!

 

이렇게 훌륭한 전략 요충지를 버려 두어 망국 위기를 키운 국가 지도부가 통탄스러웠다. 조선 왕조 국가 통치술의 부재와 지배층의 무능과 분열이 뼈아팠다.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후에야 관문을 만든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현재진행형인 총체적 국가 위기로 흔들리는 우리에게 문경새재가 웅변하는 건 무엇일까?

 

판교에서 문경까진 KTX로 1시간 반이다. 아름다운 문경새재가 한반도 운명을 가른 역사의 교훈으로 과객의 얼어붙은 마음을 통타한다. 21세기 세계 그레이트 게임에선 한 발 잘못 디디면 국제 미아가 된다. 나라가 망하면 우리네 삶도 부서진다. “분열된 집은 바로 설 수 없다.” 국가가 위태로울수록 모든 나랏일의 열쇠는 민심을 모으는 데 있다.

 

한겨울 문경새재 찬 바람을 뚫고 걸으면서 희망의 새해를 기원한다. 을사년 새해엔 우리가 피땀으로 쌓은 나라의 안녕과 소중한 일상을 되찾아야 한다. 동 트기 직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대한민국은 흔들릴지언정 결코 난파하지 않을 것이다.

 

-윤평중·한신대 철학과 명예교수, 조선일보(25-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