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을 불러주세요!" 뉴욕 버스 안에서 응급 상황
이방인이 엿본 미국의 삶
승객들이 해결사로 나섰다
긴박했던 그날의 버스 사진 /최여정 제공
미국 뉴욕의 새벽. 밤새 뒤척이다가 일어나 커튼을 젖히고 도시를 응시한다. 히스테릭에 시달리는 여자의 비명 같은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와 환각에 젖어든 남성의 절망적인 고함소리로 가득했던 밤이 지나가고 서서히 아침이 다가온다. 뉴욕에 도착한 지 사흘째건만 밤새 잠들지 못하는 이 도시의 소란스러움에 적응이 쉽지 않다. 어젯밤부터 날리던 눈발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환자처럼 잦아들고 있다. 그래, 뉴욕의 겨울은 바로 이 멋이지. 눈은 뉴욕의 외설스러움을 조금이나마 순수의 감정으로 둔갑시킨다. 낡고 오래된 적벽돌 건물의 지붕 위에도, 까마득한 꼭대기가 올려다 보이지도 않는 위협적인 마천루 창틀에도 눈이 쌓였다.
저 아래 어느 가정집의 창문에서 번져 나오는 따뜻한 불빛으로 시선이 간다. 주방 창 안으로 싱크대를 향해 등을 돌리고는 부산히 움직이는 여자가 보인다. 아이가 뛰어 들어오더니 여자에게 매달린다. 거대한 오피스 빌딩 창문 안에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청소기를 밀고 있는 남자가 있다. 남자는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더니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이 도시엔 일조권이나 전망권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시선에 대한 일말의 고려 없이, 공간이 만드는 한 치의 틈도 허용 없이, 밀도 높은 건물의 겹치기를 반복하는 맨해튼이 빚어내는 풍경은 무질서와 혼돈.
히치콕이 이 도시에서 영화 ‘Rear Window’를 만든 이유가 있구나. 우리말로 ‘창 너머’쯤 될까. 다리를 다친 사진작가 제프리가 손바닥을 내다보듯 훤하게 보이는 ‘창 너머’ 타인의 삶을 엿보는 그 영화. 한국어 제목 ‘이창’은 영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창가에 서서 주인공 제프리처럼 이 집 저 집을 엿보자니 나도 역시나 누군가의 시선에 걸린 제물. 서둘러 블라인드를 내렸다.
맨해튼 일정을 마치고 방문할 도시는 보스턴. 고속버스를 타고 다섯 시간 정도면 도착한다. 승객 30여 명을 태운 버스가 눈 쌓인 맨해튼을 뒤로하고 천천히 고속도로로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뒤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로 “제발 도와주세요. 몸이 너무 안 좋아요. 심장이 조여와요”라는 말과 함께 여성의 흐느낌이 들리기 시작했다. 버스는 고속도로 갓길에 멈춰 섰다. 예상치 못한 응급 상황에서 잠을 자다가 깬 듯한 승객들은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 이방인인 나는 마치 창 밖을 바라보는 제프리처럼 이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
동양인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의 중년 남성인 운전사가 버스 뒷자리로 가서 여성의 상태를 살펴본다. 꽤 큰 체격의 흑인 여성이었다. 동행은 없는지 옆자리가 비어 있다. 운전사는 곧 큰소리로 “911을 불러주세요!”라고 외쳤다. 그런데 신고는 운전사가 해야 하지 않나? 이 버스 운행의 책임자이자 차량만 오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20대 후반의 백인 남성이 911과 통화를 시도했다. 위치 파악이 되지 않아 몇 번의 긴 전화가 이어졌고 초조한 시간만 흘러갔다. 흑인 여성은 계속 흐느끼며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데, 운전사는 다시 이렇게 외쳤다. “CPR(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는 여성은 나와주세요! 저는 남자라서 할 수가 없습니다!” 아, 지난번 사내교육 때 배워둘 걸 그랬네 하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다.
그때 환자 뒤에 앉아 있던 젊은 백인 커플 중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젖혀 그녀를 눕히더니 말했다. “지금 기분이 어때요? 구급차가 금방 올 거예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긴장감이 팽팽하던 버스에 순간 온기가 번졌다. 남성도 가까이 다가와 환자를 살펴보더니 “아스피린 있는 분?”을 외치며 도움을 구했다. 해열제로 먹던 아스피린이 심장병 예방약인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버스에는 어떤 구급약도 없었는지 운전사는 그저 어깨만 들어올리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시계를 보니 15분여가 지났을까. 백인 여성은 내내 환자의 손을 꼭 잡고는 무언가를 계속 귓속말로 이야기하고, 따뜻한 손길로 다독였다. 마침내 응급차가 도착했다. 권총을 찬 경찰이 먼저 버스에 올라 운전사에게 어떤 상황인지 정확한 설명을 요구했다. 운전사는 그저 자신은 정상 운행을 하고 있었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구급차에서 내린 간호사들이 버스에 올라 환자를 부축하고 일으켜 세우자 겁에 질려 더욱 크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환자 곁을 지켰던 젊은 커플은 버스 의자에서 떨어진 휴대폰이며 가방을 챙기고 있는데, 운전사는 비어 있는 커다란 음식물 통을 발견하고는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경찰에게 외쳤다. “이것 보세요! 심장마비가 아니라, 급체라고요!”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차창 밖에는 아직 들것에 실려 누워 있는 흑인 여성이 보인다. 환자가 간신히 손을 들어 버스를 향해 흔든다. 버스 안에 있던 백인 여성도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다. ‘걱정 말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최여정 작가, 조선일보(25-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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