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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 양쪽서 '대통령 임명식' 불참, 광복절날 둘로 쪼개지는 나라] ....

뚝섬 2025. 8. 14. 10:00

[좌우 양쪽서 '대통령 임명식' 불참, 광복절날 둘로 쪼개지는 나라]

[어질어질하다, '태극기 품절' 시대를 살게 되다니]

[89년 만에 제 이름 찾은 ‘기테이 손’과 ‘쇼류 난’]

[기록된 히로시마의 참상, 지워진 광복의 기쁨]

 

 

 

 

좌우 양쪽서 '대통령 임명식' 불참, 광복절날 둘로 쪼개지는 나라 

 

1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광복절 행사 무대. 대통령실은 광복절 행사와 함께 진행되는 이재명 대통령 국민임명식에 약 1만 명의 국민을 초청할 예정이다. /뉴스1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광복절 오후 행사에 불참하기로 했다. 이날 광복절 행사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 나눠 치러지는데, 오후엔 축제 형식으로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 임명식’이 열린다. 야당은 오전 공식 행사만 참석하고 오후 임명식엔 참석하지 않겠다고 한다.

 

야당이 이 대통령 임명식에 참석하지 않는 건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단행된 사면 때문이다. 야당은 이 대통령이 취임 두 달 만에 사면한 여권 인사 중 납득할 수 없는 사람들이 포함됐다는 입장이다. 상당수 국민도 이런 지적에 공감한다. 자녀의 입시 비리를 공모한 조국 전 장관 부부는 교육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었으며, 윤미향 전 의원은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후원금을 빼돌린 혐의로 유죄를 받았다. 뇌물수수 등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은 은수미 전 성남시장, 택시 기사를 폭행하고 증거를 인멸해 유죄를 받은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등도 사면됐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도 국민 임명식 불참 의사를 밝혔다. 그런가 하면 이 대통령의 우군인 민노총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이 아직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광복절날 대통령 임명식을 함께 갖겠다는 계획은 추진 단계부터 논란이 됐다. 나라를 되찾은 지 80년을 맞는 기쁨을 기념하는 의미가 분산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특히 올해 광복 80주년은 계엄·탄핵 등 정치적 상황 때문에 3·1절, 임시정부 수립일 등 광복을 기릴 만한 날이 평년보다 존재감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광복절은 광복절 행사에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굳이 광복 80주년에 임명식을 여는 건, 자신의 취임을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만들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이 대통령은 12·3 계엄과 윤석열 대통령 탄핵, 그리고 자신의 대선 승리 과정을 ‘빛의 혁명’이라고 부른다. 3·1 운동과 광복, 4·19 혁명,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을 계승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런 바람은 좌우 양쪽에서 임명식 불참 통보로 빛이 바래게 됐다. 이념·정파 구분 없이 화합의 장이 되어야 할 광복 80주년에 둘로 쪼개진 나라 모습을 확인하게 될 모양이다.

 

-조선일보(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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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어질하다, '태극기 품절' 시대를 살게 되다니

 

8월 초의 어느 날,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박)으로 걸어가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만다. 요즘 날씨가 뿜어내는 대단한 열기와 습기에 한 번, 이 날씨에 해일처럼 국박으로 밀려오던 인파에 또 한번, 인파에 내국인과 외국인이 고루 섞여 있어서 또 한번. 국박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 걸 본 적이 없다. 국박을 가본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진입로가 유난히 광활한 그곳은 웬만해서는 붐비기 힘들다. 그날 그곳을 더 덥고 붐비게 한 것은 인파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였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박물관에 온 사람들의 걸음이라고 하기에는 투지와 위세가 있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전진 같았다.

 

잠시 후, 나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되는데 입장이 만만치 않았다. 다음에는 뮤지엄숍을 지나다 놀라게 된다. 전시를 보고 나서 들르려고 했는데 뮤지엄숍 줄이 심상치 않았다. 그 줄에 합류했다. 같이 온 친구가 외국인 친구에게 줄 부채를 사야 한다고 해서다. 줄에도 내국인과 외국인이 섞여 있었다. 담당자는 다섯 명 정도씩 끊어서 입장시켰다. 점점 입장이 가까워지면서 그것을 보았다. 까치호랑이 배지가 품절이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했다. “까치호랑이가 뭐야?”라며 친구와 어리둥절한 표정을 교환했다. 줄을 선 지 30분이 넘어 입장할 수 있었다.

 

의문은 집에 가서 풀렸다. 국박의 엄청난 인파는 까치호랑이를 사러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케데헌’이나 ‘케데몬’으로 불리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시작된 일이다. 케데헌이 뜨면서 케데헌에 나오는 호랑이가 떴는데 국박의 호랑이 굿즈가 케데헌 호랑이와 닮아서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 인터넷으로는 10차 품절이라 지금은 주문할 수 없고, 2026년 1월부터 판매한다는 공고가 있었다. 현장에는 혹시 물량이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가 사람을 몰리게 했을 것이다. 대체 그 호랑이가 뭐길래, 라며 ‘케데헌’을 봤는데 까치와 호랑이는 정말 귀엽긴 했다. 민화의 단골 주제인 ‘까치와 호랑이’가 요즘 감각에 맞게 변주되어 표현되고 있었다. 

 

3일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굿즈 매장 '뮷즈샵'에서 품절 사태를 일으켰던 까치 호랑이 배지가 판매되고 있다. /뉴스1

 

그날 국박에서 이 ‘까치 호랑이 배지 품절 대란’보다 더 놀란 것이 있었으니 태극기 굿즈 열풍이었다. 태극기 스티커, 태극기 펜, 태극기 키링, 태극기 조명, 태극기를 든 반가사유상 등등 종류가 많기도 했거니와 ‘태극기 키링은 품절이라 죄송하다’는 안내문도 있었다. 태극기가 유행인 시대를 살게 되다니, 어질어질했다. 왜냐하면, 언제부턴가 태극기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특정 분들이 계시지 않았던가? 가방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엑스자로 교차해서 달고 ‘한미 동맹 수호’를 외치는 분들의 ‘빽꾸’ 아이템 아니었던가? 소녀들의 빽꾸가 유행이 되기도 전부터 이분들은 자신들의 태극기 사랑을 빽꾸로 표현해 오지 않았던가?

 

빽꾸란 무엇인가. ‘가방(bag) 꾸미기’를 이르는 말로, 나는 빽꾸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 내 가방 꾸미기는 아니고 남의 가방 꾸미기에 대한 관심이다. 가방은 뭘로 꾸미냐? 주로 인형이다. 솜으로 꽉 차서 볼이 미어질 듯한, 그래서 현실계에는 잘 없는 귀여움의 결정체다. 라부부 인형의 짝퉁이 나도는 것도 이런 ‘빽꾸’ 유행과 맞닿아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빽꾸가 소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제는 남녀노소로 확산되었다. 가방보다 인형이 큰 경우도 있고, 모빌처럼 인형을 주렁주렁 단 경우도 흔하다. 70대 남성분이 빽꾸한 것도 종종 보기에 나는 생각하곤 했다. ‘아, K국 사람들은 귀여움에 미쳐 있구나.’

 

내가 그날 태극기 굿즈에서 놀란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아, 태극기도 귀여울 수 있구나!’ 품절된 태극기 키링은 솜이 들어가서 몽글몽글한 태극기다. 민족주의를 귀여움으로 승화시키다니. 우리가 알던 시뻘겋고 시퍼런 태극과 딱딱해서 찔릴 것 같은 건곤감리가 있는 태극기가 아니라 가능했다. ‘데니 태극기’를 원안으로 한 상품들이다. 그래서 달랐다.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오언 니커슨 데니가 고종에게 하사받은 태극기를 데니 가문이 보관해 왔는데, 바로 이게 데니 태극기라고. 데니 태극기로 만들어진 이 제품들은 무려 ‘광복 에디션’이다. 나는 그날 국박에서 광복이라는 상품이 대유행임을 보았던 것이다. 지금 이 시각 한국에서는 광복이 제일 힙하달까요.

 

자, 가봅시다. 태극기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귀여움과 힙이 어디까지인지. 이 정도면 조만간 태극기 티셔츠를 입고 태극기 키링으로 빽꾸한 팝스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귀여운 태극기라면 가능하다.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 1층 대한제국실에 광복절을 기념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극기로 알려진 데니 태극기가 전시돼 있다. 1886년 당시 고종(재위 1863∼1907)의 외교·내무 담당 고문으로 부임했다가 1891년 1월 조선을 떠난 미국인 오웬 니커슨 데니(1838∼1900)가 소장했던 유물이다. /뉴스1

 

-한은형 소설가, 조선일보(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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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만에 제 이름 찾은 ‘기테이 손’과 ‘쇼류 난’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는 시상식 직후 일본 측이 마련한 격려 만찬에 가지 않았다. 대신 베를린의 한 두부 공장으로 향했다. 교민 10여 명이 조촐한 축하 파티를 열어줬다. 음식이라곤 공장에서 만든 두부와 김치가 전부였다. 공장 벽엔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조금 전 시상식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월계수로 가렸던 손 선수는 그날의 소회를 훗날 자서전에 적었다. “잃었던 조국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아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살아 있듯 우리 민족도 살아있단 확신이 들었다.” 그 두부 공장의 주인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봉근이었다.

▷승전보를 안고 돌아온 24세 청년은 방송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인터뷰를 강요당했다. “저는 손기정입니다.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승리라고 하겠습니다.” 그의 유품인 한 음반에 이런 육성이 담겨 있었는데 “크게 읽어, 크게 읽어”라고 지시하는 목소리가 함께 녹음됐다. 손 선수의 당시 인터뷰는 말한 것이 아닌 읽은 것이었다.

▷그해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엔 ‘승리자의 벽’이 들어섰다. 메달리스트들의 이름과 국적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손 선수는 ‘마라톤 우승자 일본인 손’으로 각인됐다. 그 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홈페이지에도 국적은 일본, 이름은 기테이 손(Kitei Son)으로 등재됐다. 우리 국회와 체육계의 줄기찬 수정 요구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IOC는 손 선수를 바꿔주면 식민 지배를 겪은 다른 국가들도 줄줄이 수정을 요구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4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 IOC도 결국 화답했다. 최근 홈페이지 선수 명부에서 손 선수의 일본식 이름 바로 아래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된 것이다. 출전 당시 강제로 일본 국적과 이름을 써야만 했다는 점도 명시됐다. 소개 글에는 손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국 이름으로 서명했고, 출신국을 묻는 질문에 한국이라고 답하며 별개의 나라라고 강조했다는 설명이 담겼다. 손 선수와 나란히 출전해 동메달을 땄던 남승룡 선수도 일본식 이름 ‘쇼류 난(Shoryu Nan)’ 아래에 본명과 한국 국적이 병기됐다.

▷2002년 별세한 손 선수는 “나를 기억하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강요된 국적과 이름을 걷어내고 한국인 손기정으로 기록되기를 그만큼 염원했다. 김구 선생은 1946년 8월 손기정 우승 10주년 행사에서 “나는 손 군 때문에 세 번 울었다”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우승 소식에 감격해서 울었고, 헛소문이지만 그가 일본군이 되어 전사했다는 소식에 슬퍼서 울었고, 광복 후 그와 다시 만나 기뻐서 울었다.” 김구 선생이 살아있었다면 손 선수가 89년 만에 제 이름을 되찾은 게 후련해서 또 울었을 것이다.

 

-신광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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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된 히로시마의 참상, 지워진 광복의 기쁨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피폭으로 심한 화상을 입은 아내와 아이를 수레에 태운 아버지. 미야타케 하지메 촬영. 아사히신문 제공

 

3일 오전 9시 30분경 일본 도쿄 에비스 사진미술관 앞에는 문도 열기 전 이미 스무 명이 넘게 줄을 섰다. 대부분 ‘히로시마 1945-원폭 80년 특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히로시마 원폭은 ‘반딧불의 묘’나 ‘이 세상의 한구석에’ 같은 만화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했다. 만화 속 장면들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지만, 실제 피해 모습을 사진으로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식민통치 가해자였던 일본이 피해자로 둔갑한 모습이 불편해 의도적으로 피했다. 그러나 그런 이분법을 넘어서 사진이라는 기록이 가진 무게를 전시회에서 느꼈다.

전시장의 공기는 무거웠다.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부모,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들. 혼자서 조용히 사진 앞에 서 있는 금발의 외국인도 있었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모두 사진 속 장면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전시회의 첫 번째 사진은 올려다본 버섯구름이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인근 계곡에서 놀던 중학생 야마다 세이소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찍은 사진이었다. 미군이 공중에서 촬영한 게 아닌 평범한 시민의 눈으로 바라본 원자폭탄의 규모와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주고쿠(中國)신문 사진기자였던 요시토 마쓰시게가 촬영한 다섯 장의 사진이 이어졌다. 그는 신문사로 출근하려다 배가 아파 집에 잠시 들렀을 때 원자폭탄이 터졌다. 살아남은 그는 카메라를 들고 미유키 다리로 나갔다. 그곳은 작업에 동원됐던 여학생들이 열선에 노출돼 온몸에 물집이 공처럼 부풀어 있거나 터져서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그는 마음을 굳게 먹고 셔터를 눌렀다. 이는 피폭 직후의 참상을 담은 유일한 사진이 됐다.

육군 함선사령부 사진반 소속 오누카 마사미는 군의관의 지시로 화상을 입은 환자들의 모습을 촬영했다. 그가 찍은 등 전체에 화상을 입고 누워 있는 여성, 얼굴에 끔찍하게 화상을 입은 남성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오누카는 “내가 피해자였다면 이런 비참한 모습이 남는 걸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 외에도 전시는 평탄화된 도시 모습부터 재건 과정까지 거대한 서사가 담겨 있었다.

80년 전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에서도 자료가 보존돼 있는 게 놀라웠다. 그 이유엔 기록에 대한 집요함이 있었다. 원폭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의 주요 언론사들은 곧바로 히로시마로 취재진을 파견했다. 사진기자들은 열악한 여건에서도 여분의 필름과 카메라를 확보했고, 방사능 노출의 위험에도 방독면을 쓴 채 취재를 강행했다. 군부는 미국의 만행을 입증할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일정 범위의 촬영을 묵인했다.

일본이 항복한 뒤, 연합군은 원폭 관련 보도를 전면 금지하고 자료를 압수하려 했다. 그러나 사진가들은 이에 맞서 사명감으로 자료를 지켜냈다. 아사히신문의 미야타케 하지메는 상부의 필름 소각 지시를 거부하고 집 바닥 밑에 숨겼다. 다른 사진가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원본을 보존했다. 오늘날 우리가 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는 건 끝까지 기록을 지켜낸 그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같은 시기 한반도는 달랐다. 8월 15일 조선은 광복을 맞았지만 거리는 조용했다. 라디오 보급률이 3.7%에 불과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는 관련 내용을 명확히 보도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형무소에서 정치범들이 석방되자 비로소 시민들은 주권이 회복됐음을 실감했다. 종로 거리까지 만세 행렬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기쁨이 담긴 사진 자료는 많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만세 사진도 수십 년 동안 촬영자와 찍힌 날짜 및 장소가 불분명했다.

이는 장비와 촬영 주체의 부재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 카메라는 집 두 채 값에 비견될 만큼 비쌌고, 필름 등 물자도 부족했다. 여기에 기록을 남길 주체도 거의 없었다. 광복 직전까지 발행되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조선어 신문들은 모두 강제 폐간돼 기자들이 현장에 나설 수 없었다. 설령 민간에서 귀중한 사진이 촬영됐다 하더라도 이후 6·25전쟁을 거치며 보존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광복 직후의 이미지는 대부분 후대에 재현된 것에 기대고 있다.

그날 사진미술관을 나서면서 광복의 순간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우리의 빈 앨범이 떠올랐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대가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라는 참혹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날의 모습을 세세히 남겼다. 우리는 식민지에서 벗어난 기쁨의 순간조차 온전히 기록하지 못했다. 기록은 역사를 미래로 전하는 유일한 다리지만 스스로 놓이지 않는다. 그 순간을 담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세워진다. 일본과 조선의 사례는 기록을 남기고 지켜낸 이들의 의지와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 준다.

-송은석 사진부 기자, 동아일보(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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