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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기자 이승만] [그래도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뚝섬 2025. 10. 21. 06:38

[최초 기자 이승만]

[그래도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최초 기자 이승만

 

‘감자’ ‘발가락이 닮았다’를 쓴 소설가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문화부장이다.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그는 후배들이 써 온 기사가 맘에 안 들면 원고를 집어던지며 “당신, 기자 맞아?”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시 기자(記者)는 사실을 기록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우국충정의 지식인이라는 상징적 의미까지 포함했다.

 

▶라틴어 디우르날리스(diurnālis)는 ‘날마다의’라는 의미의 형용사다. 여기서 유래한 프랑스어 주르날(journal)은 매일 쓰는 일기나 신문을 뜻한다. 영어 단어 저널리스트가 여기서 왔고,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이 서양식 신문을 도입하며 이 단어를 ‘기자’로 번역했다. 그래서 초창기 기자는 일간 신문의 저널리스트로 한정됐다.

 

▶순(旬)에서 알 수 있듯, 1883년 창간한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는 일간이 아니라 열흘에 한 번 발행했다. 그때는 기자라고 하지 않고 기재원(記載員)으로 부르거나 탐보인(探報人)·채방인(採訪人)처럼 조선 말에 쓰던 표현을 혼용했다. 정보를 탐색하고 알리는 직업, 정보를 캐고 현장을 찾는 사람인 것이다. 유길준도 1895년 ‘서유견문’에서 신문기자를 탐보인으로 불렀다. 근대 이전 조선에는 관보 격인 ‘조보(朝報)’가 있었다. 1577년 발행된 조보에 인성왕후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가 광나루에서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이 어쩌면 근대적 의미의 탐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론사 연구 권위자인 한국외대 정진석 명예교수가 신작 ‘한국언론 연대기’에서 한국 최초의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썼다. 최초의 직업 기자라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록에서 기자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란 의미다. 1898년 9월 14일 자 제국신문 논설에 ‘기자 이승만’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앞에서 말한 탐보인, 기재원 등으로 부르거나 아예 편집인, 주필 등 직함으로 소개했다.

 

이승만은 1898년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이후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등 여러 신문에서 주필로 활약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백성들이 신교육을 받고 스스로 깨어나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썼고, “사람이나 나라나 자기가 제 일을 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외치다가 1899년 투옥되기도 했다. 요즘은 수많은 개인이 1인 미디어를 자처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찾고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 본연의 역할을 항상 생각했으면 한다. 기자의 또 다른 이름으로 와닿은 것은 ‘채방인’이다. 사실을 캐내고, 현장을 찾는 것이 기자가 하는 일의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이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5-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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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

 

[박정훈 칼럼]

폭발한 여당 대표의 ‘XX자식’ 욕설에도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팩트 앞에서 후퇴 말라고 훈련받은 기자들로선 꼭 해야만 했던 질문이었을 것이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가 2020년 7월 10일 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나서며 한 기자의 질문에 화를 내며 노려보고 있다./고운호 기자

 

문 정권이 왜 ‘언론 징벌법’을 밀어붙이는지, 구속된 이상직 의원이 일찌감치 속내를 털어놓았다. 악덕 기업인의 전형이라 할 그는 구속 전 이 법을 가장 강력히 옹호한 인물이었다. 여당 내에서도 유독 이 의원이 총대 메고 법안 강행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저지른 비리 실태가 언론에 줄줄이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이 의원으로선 뒤를 캐는 언론이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구린 곳을 감추려는 권력자가 밝히려는 언론을 손보겠다는 것이었다.

 

작년 한 해 중견 언론인 모임인 관훈클럽 총무로 일했다. 1년간 언론계에선 수많은 일이 벌어졌지만 그중에서도 관훈클럽 운영진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이 ‘이해찬 버럭 사건’이었다. 비극적 선택을 한 박원순 서울시장 빈소에 민주당 이 대표가 조문을 왔다. 진 치고 있던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고 한 기자가 “고인의 의혹에 대한 당 차원 대응 계획”을 물었다.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이 대표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언성을 높이며 기자를 노려보더니 “그런 걸 예의라고 하느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XX 자식”이란 욕설이 튀어나왔다. 둘러싼 민주당 지지자들은 “기레기는 물러가라”며 고함을 질러댔다.

 

그다음부터가 반전이었다. 여권 실세의 분노 폭발에 위축될 만도 할 텐데 기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험악한 분위기에서도 질문이 계속 이어졌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말진 기자들이었을 것이다. 그 젊은 기자들이 주눅 든 기색도, 주저하는 모습도 없이 흥분한 권력자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기자들이 훈련받았던 대로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팩트 앞에서 물러서지 말라고 배웠을 그들로선 꼭 해야만 하는 질문들이었을 것이다. ‘XX 자식’ 욕설을 들은 기자는 그날의 취재 뒷얘기를 관훈클럽 회지(會誌)에 썼다. 제목은 이 대표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였다.

 

그해 관훈클럽 언론상은 ‘N번방’ 사건을 탐사 보도한 국민일보·한겨레신문 취재팀에 돌아갔다. 라임·옵티머스펀드의 정·관계 유착을 파헤친 SBS팀, 산재 노동자의 비극을 추적한 경향신문팀도 상을 받았다. 오로지 언론만이 해낼 수 있는 진실의 기록들이었다. 수상작은 못 냈지만 조선일보 역시 울산 선거 개입, 탈원전 경제성 조작 등 수많은 보도를 통해 진실이 바로 서는 데 기여했다고 자부한다. 기자 말고 누가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유튜버와 소셜미디어가 언론 행세를 하고 있다. 자칭 평론가며 선동가, 진영 정치꾼들이 온갖 주장을 사실인 양 포장하며 대중을 호도한다. 그러나 ‘대안 언론’은 언론이 될 수 없고, ‘대안적 진실’은 진실이 될 수 없다. 언론이 언론이고, 기자가 기자인 것은 오직 팩트라는 나침반에 의존해 진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에 죽고 사는 팩트 지상주의야말로 언론의 정체성 그 자체다.

 

30여 년 기자로 일하며 특종도 해보고 숱하게 ‘물’(낙종)도 먹었다. 그중에서도 아팠던 것이 2011년 3월 중앙일보에 실린 천성산 르포 기사였다. 천성산 KTX 구간은 지율 스님 등 환경론자들이 도롱뇽을 원고로 내세워 소송을 벌인 상징적 장소다. 온갖 공사 방해 끝에 KTX 터널이 완공됐다. 그런데 천성산에 가보니 생태계 파괴는커녕 “물 웅덩이마다 도롱뇽 알 천지였다”는 것이다. 팩트는 힘이 세다. 이 르포 하나로 지율의 논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왜 우리 취재팀은 현장에 갈 생각을 못 했단 말인가. 팩트 경쟁에서 졌다는 생각에 한동안 낭패감을 삭일 수 없었다. 기자라면 누구나 다 그럴 것이다.

 

여권은 교통방송 진행자 김어준씨를 ‘언론인’이라 칭한다.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숱한 가짜 뉴스를 시사 보도로 포장해 유포한 장본인이다. 소설과도 같은 ‘세월호 고의 침몰설’까지 퍼트렸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언론인의 ‘언’ 자도 붙일 자격이 없다. 팩트에 목숨 걸지 않는 사람은 언론인도, 기자도 아니다. 그런 사이비 언론인이 넘쳐난다.

 

기자도 실수를 하고 오보도 낸다. 그러나 팩트에 대한 집착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다. 잘나서가 아니다. 오로지 사실만 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훈련받는 직업이 기자이기 때문이다. 욕도 먹고 오점도 많지만 그래도 훈련받은 기자가 진실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당은 언론 징벌법이 ‘가짜 뉴스’를 벌주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정작 ‘가짜 뉴스 제조원’은 법안에서 뺐다. 가짜 뉴스의 진원인 유튜브나 소셜미디어, 1인 미디어 등은 징벌적 손해배상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불편한 진실을 캐내는 비판 언론만 손보겠다는 것이다. 진실을 감추려는 권력이 진실을 밝히려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한다. 이게 ‘언론 개혁’으로 포장한 언론 징벌법의 실체다.

 

-박정훈 논설실장, 조선일보(21-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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