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부끄러우면 안 된다"]
[권력 앞 '항소하면 손해' 바이러스]
[정치판 가면 거덜날 사주]
"나라가 부끄러우면 안 된다"
"부끄러우면 안 된다" 다짐 적어
한 기업인이 보낸 신년 탁상 달력
진흙탕에 뒹구는 국내 정치로
고개 숙이는 일 올해는 없기를

한일 관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알게 된 기업인 S씨가 탁상 달력을 보내왔다. 신년 인사 겸 회사 홍보차 보내온 것이다. 그런데 달력의 첫 장에 뜻밖의 문구가 크게 쓰여 있었다. ‘회사가 부끄러우면 안 된다!’ 같은 제목의 편지도 동봉돼 있었다.
S씨는 달력에 이 문구를 써 놓은 이유로 최근 시세로 1조원이 넘는다는 주일 한국 대사관 부지를 기증한 재일 교포 서갑호 회장을 거론했다. 주일 대사관 1층의 서 회장을 기리는 공간에서 그가 남긴 말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를 보고 감동했다는 것이다. S씨는 “대한민국이 가난한 시절, 특히 힘들고 어려웠던 재일 교포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우려고 도쿄 중심부의 토지와 건물을 내어준 서 회장의 마음이 서려 있는 글귀”라고 했다.
그는 서 회장의 마음을 담아 ‘회사가 부끄러우면 안 된다’를 새해 슬로건으로 정했다고 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부끄럽지 않은 회사를 만들기 위해 전 직원이 합심해서 맹렬히 전진해 나갈 것을 다짐한다”고 썼다.
중견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서 회장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새해 좌표로 삼은 것이 잔잔한 울림을 줬다. 동시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가 부끄러우면 안 된다’가 올해 정치권의 슬로건이 되면 좋겠다고.
30년 넘게 일한 신문사에서의 경력과 현재 직책 때문에 국내외에서 외국인들을 비교적 자주 만나는 편이다. 지난해만 해도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 아산 플래넘, 한일포럼, 제주포럼 등에서 해외 인사들을 접하곤 했다. 이때마다 2024년 12·3 계엄 이후 한국 사정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국내 상황을 설명하기 전에 부끄럽다며 고개를 숙이곤 했다. 지난해 12월 방한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무엇보다 매일 밤 폭탄주를 수십 잔씩 마신다는 소문이 돌던 대통령이 병정놀이하듯 계엄을 선포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리고도 반성하지 않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 반사 이익으로 정권을 잡은 집권 세력이 국회와 특검을 손안의 공깃돌처럼 다루며 연성(軟性) 독재의 징후를 숨기지 않는 것 역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런 부끄러움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얼마 전 본지와 인터뷰한 가수 최백호씨는 이렇게 토로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지요. 싸워대느라 난장판이에요. 이 사람들, 좌우를 떠나 정말 부끄러워요.” 단가(短歌) 시인 손호연씨의 딸 방송인 이승신씨는 새해 인사를 주고받을 때 “나라(가) 제발~ 밖(에) 나가면 부끄럼”이라고 했다.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는 후배 기자는 ‘언론 악법’을 밀어붙이는 권력을 향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자랑스러운 성취는 모두 비(非)정치적 영역에서 나왔다. K컬처를 비롯, 한국과 관련된 것은 모두 비상하고 있는데, 유독 K폴리틱스(정치)는 진흙탕을 뒹굴고 있다. 세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국은 지난해 수출 7000억달러를 달성했다. 우리보다 먼저 연간 수출액 7000억달러를 넘은 국가는 미국·독일·중국·일본·네덜란드 등 5개국에 불과한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다가도 정치를 보면 환멸을 느낄 정도다. 한국에선 정치와 거리를 두면 둘수록 자랑스러워지는 ‘원심력 패러독스’가 작용하는 것일까.
해마다 연초가 되면 어떤 탁상 달력을 책상에 올려 놓을지 고민하곤 했다. 올해는 예외다. S씨가 보내준 달력을 잘 보이는 곳에 올려 놓았다. 자주 바라보며 나 자신부터 부끄럽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국내 정치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되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조선일보(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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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앞 '항소하면 손해' 바이러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연합뉴스
기자는 과거 형사 국선 사건만을 전담하는 국선전담변호사로 일했다. 당시 검찰은 선고가 나면 으레 항소했다. 유죄가 나도 형량이 기준에 못 미치면 항소했고, 무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국선전담변호사는 “벌금 10만원을 부과받고 정식 재판을 청구해 무죄를 받아낸 사건도 검찰이 항소했다”며 “항소를 안 하는 검찰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했다.
최근 대장동 사건의 항소 포기나 서해 피격 사건의 ‘사실상’ 항소 포기는 이런 실무 관행에 비춰서도 매우 낯설다. 검찰은 서해 피격 사건에 대해 “항소의 실익을 고려해 (명예훼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항소심에서 결과가 바뀔 가능성인 ‘항소의 실익’은 무죄가 선고된 사건에서 검찰이 항소할지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법원은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와 국정원에서 다수의 특수 첩보와 보고서를 삭제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고의로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처럼 사실관계에 대한 ‘해석’이 문제 되는 사건은 상급심에서 다퉈볼 만한 대표적인 경우다. 2심의 해석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이 이해충돌방지법을 좁게 해석해 결과적으로 민간 업자들이 수천억 원의 이익을 가져간 대장동 사건도 마찬가지다.
반면 법원이 증거 수집이 위법하다고 했거나, 법리상 범죄 성립이 안 된다고 하면 항소의 실익이 거의 없다. 이재용 회장이 기소됐던 ‘삼성 부당 합병’ 사건은 회사 서버 압수 수색 절차가 위법하다고 판단했고, 고위 법관들이 재판 개입 혐의로 대거 기소된 ‘사법 농단’ 사건은 법리상 범죄 성립이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검찰은 이 사건들에 항소는 물론 상고까지 했다. 별건 수사로 얻은 증언에 대해 법원이 “진실을 왜곡하는 부당한 방법”이라고 질타했던 카카오 김범수 창업자의 시세 조종 사건도 결국 항소장을 냈다.
이처럼 검찰은 ‘국가 형벌권의 정당한 행사’를 내세워 무리해 보이는 항소도 강행해 왔다. 그런데 최근엔 당연히 항소해야 하는 사건들까지 포기하고 있다. 하필 이재명 대통령 관련 사건이거나, 이 대통령이 검찰을 비판한 사건들이다. 한 법조인은 “권력 앞에 ‘항소하면 손해’ 바이러스가 도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만일 그렇다면 검찰의 공소 유지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3심제를 스스로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1심 판사는 신이 아니다.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검사라면 잘못된 판결에 대해 당연히 시정을 구해야 한다.
검찰의 기계적 항소에 따른 인권 침해가 문제라면 차라리 ‘무죄판결 항소 금지법’을 만드는 게 낫다. 그러면 검찰도 “권력자 눈치 보고 항소 포기했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고, 피고인도 사법 리스크를 벗어날 수 있다. 권력 앞에 작아지는 ‘항소의 실익’은 사법 신뢰만 떨어뜨릴 뿐이다.
-양은경 기자, 조선일보(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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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가면 거덜날 사주

새해마다 사주를 본다. 재미로 본다. 돈 내고 보지는 않는다. 인터넷으로 본다. 요즘은 인공지능(AI) 사주가 인기다. 용하다고 소문이 났다. 인공지능이 직업을 위협하는 시대다. 나 같은 글쟁이는 위기다. 사주쟁이도 위기일 줄은 몰랐다. 사주쟁이 여러분 사주는 어떤지 궁금하다.
꼭 정치수가 나온다. 어머니가 보는 사주에도 정치수가 매년 나온다. 어머니는 매년 말한다. “아들은 장관 할 사주라는데.” 나는 답한다. “집안 거덜 낼 사주라는 뜻이네.” 어머니는 말한다. “거덜 안 내는 정치인도 있던데.” 그런 정치인도 있긴 하겠다. 청문회장에서 코인 거래를 해 한몫 챙긴 양반처럼 말이다.
청문회가 문제다. 나는 청문회를 아름답게 통과할 자신이 없다. 기억나는 죄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게 못 된다. 이혜훈 장관 후보자는 10년 전 전화 한 통에 발목을 잡혔다. 보좌진에게 “널 죽였으면 좋겠다”고 난리를 친 녹취가 공개됐다. 이혜훈은 기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스스로 사소하다 생각하는 과거의 행동은 언제나 돌아와 뒤통수를 친다.
얼마 전 영화감독 마이크 빈더가 팟캐스트에서 할리우드 뒷담화를 하나 공개했다. 2006년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각본을 작업하고 있었다. 주연 후보는 벤 애플렉이었다. 스필버그는 거절했다. 벤 애플렉이 파티장에서 스필버그 어린 아들을 수영장에 집어던져 울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 빈더가 “캐스팅이랑 뭔 상관이죠?”라고 물었다. 스필버그는 답했다. “그 친구 너무 차가워.”
인품 탁월하기로 유명한 영화감독도 이토록 개인적인 이유로 함께 일할 사람을 판단한다. 한 인간의 경력은 능력만으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과거의 사소한 행동이 쌓이고 쌓여 경력을 빚어 올린다. 혹은 무너뜨린다. 그러니 새해에는 우리 모두 사소하게 친절하자. 참고로 인공지능이 본 내 사주는 “정치수는 있는데 정치판 들어가면 망가질 사주”란다.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 물론 나도 할 것 같은 평범한 소리가 언제나 진실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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