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이들은 왜 19세에 '심리적 은퇴'를 꿈꾸는가]
[애플·다이슨을 만든 건 디자인이 아니라 '설계의 힘'이다]
[AI 투자 미·중 500분의 1 韓, '국대' 쇼는 훨씬 요란]
우리 아이들은 왜 19세에 '심리적 은퇴'를 꿈꾸는가
[朝鮮칼럼]
한국 교실은 '안전가옥'
수능과 내신점수를 향해 불확실성은 거세된다
안정된 전문직이라는 좁은 트랙에 갇혀 있으니
'파괴적 혁신'은 언감생심

세계 최대 IT(정보기술)·가전 전시회인 'CES 2026'의 올해 주제는 ‘혁신가들의 등장'이었다. /뉴스1
2026년 새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CES에서 또 한 번의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한국 기업들이 전체 혁신상의 절반가량을 휩쓸었다는 것. 2024년부터 이런 일이 매년 이어지고 있으니, 이것만 보면 대한민국은 세계를 이끄는 혁신 강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화려한 지표 이면에는 찜찜한 역설이 숨어 있다. 우리는 더 얇은 TV, 더 정교한 폴더블 디스플레이, 더 빠른 센서로 상을 휩쓸지만, 왜 정작 애플·구글·메타처럼 인류의 일상을 재정의하거나, 엔비디아처럼 연산 문법을 새로 쓰거나, 오픈AI처럼 인류의 지적 생태계를 뒤흔드는 ‘파괴적 혁신’은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실제로 포브스가 발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순위에서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세계인의 삶을 지배하는 한국 브랜드는 거의 없다. 시가총액 최상위권을 장악한 미국의 빅테크들이 플랫폼, 운영체제(OS), 대형 언어 모델(LLM) 등의 ‘판’을 짜는 동안, 우리는 그 판 위에서 돌아가는 무언가를 더 완벽하게 만드는 데 몰두해 왔다. 물론 이것도 대단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자. 우리에게는 아직 비즈니스 생태계 자체를 창조하는 ‘지배적 설계’ 능력이 없다. 우리는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2위지만, 원천 기술과 글로벌 표준 지배력은 여전히 중진국 수준이다.
그래서 CES의 화려한 성적표가 반갑지만은 않다. 기존 규칙 안에서의 생존법을 체득한 ‘고효율 추격자’들의 훈장처럼 읽힌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의 용어를 빌리자면, 대한민국은 ‘정상 과학’의 세계 챔피언인 셈이다. 정상 과학이란 이미 확립된 패러다임 안에서 주어진 수수께끼를 가장 정교하게 풀어내는 활동을 말한다. 한국 산업의 주역은 정해진 답을 누구보다 빠르게 오차 없이 찾아내는 최적화의 선수들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들은 문명의 지도를 새로 그릴 수 없다. 파괴적 혁신은 기존의 판을 깨고 새로운 게임의 규칙을 제시하는 이단아적 발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파괴적 혁신가가 되지 못 하는가? 많은 사람이 이 수수께끼를 제도와 법, 역사와 문화의 측면에서 다뤘지만, 청소년의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문제가 보인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교실은 거대한 ‘안전 가옥’이다. 10대 아이들의 폭발적인 도파민 에너지는 오로지 불확실성을 거세하는 작업, 즉 수능과 내신 점수라는 확정적 보상을 향한 최적화에만 투입된다. 아이들이 마주하는 종착역이 ‘안정’이라는 이름의 은퇴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생애 가장 역동적인 시기에 리스크를 관리하고 오답을 지우는 법만 배웠기 때문이다. 의대 열풍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청춘의 초상은 생물학적 활성이 멈춘 ‘심리적 은퇴’를 열망하는 최적화 지상주의의 슬픈 결말이다.
이는 인류 진화의 흐름에 역행하는 중대한 ‘적응적 불일치’다. 청소년기는 호모 사피엔스의 생애 주기 중 보상 민감성이 정점에 달하며, 리스크를 감수하고 새로운 서식지를 탐색하라는 진화적 명령이 내려지는 시기다. 인류를 아프리카 초원에서 전 지구로 확산시킨 동력은 바로 이 시기의 무모한 탐색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교육 시스템은 이 강력한 탐색 엔진을 안정적 전문직이라는 좁은 트랙 위에 묶어두고 시동을 꺼버렸다. 생물학적으로는 모험가로 설계된 존재들이 환경적 압박에 의해 순응주의자로 조립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이런 교육은 이미 늦었다는 점이다. 대학에서의 기업가 정신 교육은 마치 튼튼한 안전 가옥에서 ‘안정 천국’이라는 돌기둥을 제거하는 ‘철거 작업’에 가깝다. 이 작업을 선행하지 않고 19세 청년들에게 용기와 실패를 다루는 법을 가르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등학교에 창업 교과목을 신설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핵심은 ‘세상은 내가 바꿔볼 수 있는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청소년기부터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가르쳐야 할 기업가 정신은 한탕의 용기가 아니라 ‘실험의 태도’다. 관행의 균열을 알아보는 눈, 아이디어를 가설로 취급하는 습관, 실패를 데이터로 전환하는 성장 마인드, 그리고 타인의 삶을 개선하려는 책임의 상상력이 그것이다.
19세에 심리적 은퇴를 선언한 아이들이 대학에 밀려 들어오고 있다. CES의 혁신상이 ‘개선’의 증거를 넘어 ‘창조’의 상징이 되려면, 이제 우리 교실은 아이들의 도파민 엔진을 조용히 끄는 행위를 멈춰야 할 것이다.
-장대익 가천대 스타트업칼리지 석좌교수·진화학, 조선일보(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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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다이슨을 만든 건 디자인이 아니라 '설계의 힘'이다
'리버럴 아츠'는 인문학이 아니다
오해 마라, 디자인은 설계라는 뜻
라파엘로 그림 '아테네 학당'처럼
학문 경계 넘는 크리에이터 필요
우리나라 인문학 열풍은 2011년 3월, 스티브 잡스가 사용한 슬라이드 한 장에서 시작됐다. 잡스는 애플의 정체성을 기술(Technology)과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융합으로 설명했다. 이때 언론이 리버럴 아츠를 인문학으로 보도하자, 인문학 서적이 주목받고 기업들은 앞다퉈 인문학 특강을 열었다. 하지만 리버럴 아츠를 단순히 인문학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새해에도 계속되는 우리 산업의 어려운 현실은 아마도 이런 언어의 오해도 한몫하는 것 같다.
리버럴 아츠는 중세 대학이 기본 소양으로 가르친 문법, 수사학, 논리학, 기하학, 산술, 음악, 천문학 등 일곱 과목을 말한다. 이를 ‘자유 7과’라고 한다. 인문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대학이 원한 것은 문·이과 통합형에다 예체능까지 겸비한 르네상스형 인재였다. 새로움을 창조하는 자유로운 인간이 목표였기에, 리버럴 아츠는 전문직 실무 교육과 대비됐다. 대표적인 직업 교육은 법학과 의학이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리버럴 아츠의 영향인지, 법학과 의학은 학부를 졸업해야 갈 수 있는 대학원 과정으로 정착됐다.
리버럴 아츠를 볼 수 있는 좋은 예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여기서 라파엘로는 피타고라스가 연구하는 도식에 로마 숫자 6, 8, 9, 12와 도식을 꼼꼼히 그려 넣었다. 이 숫자들을 전개하면 진동수비 1:2, 2:3, 3:4가 만들어진다. 이 비율로 악기를 조율하면 도레미파솔라시도를 만들 수 있다. 이를 피타고라스 음률이라고 한다. 화가 라파엘로는 음악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수학자 피타고라스를 바티칸에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다. 과학과 인문학, 예술의 경계를 넘는 것, 이것이 바로 리버럴 아츠다.

인문학뿐 아니라 자연과학·예술·철학 등 지적 학문을 아우르는 ‘리버럴 아츠’ 개념이 한국에 널리 알려진 계기는 2011년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의 아이패드 2 제품 발표회(하단 오른쪽 사진)였다. 하지만 리버럴 아츠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는 다양한 분야의 고대 학자들이 모여 리버럴 아츠를 교육하는 ‘아테네 학당’(큰 사진)의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냈다. 그림 왼쪽 하단의 칠판에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음정 사이의 관계를 수학적 비례로 풀이한 ‘피타고라스 음률’ 도식이 보인다. /바티칸박물관·애플
리버럴 아츠에 대한 오해는 애플 제품에 대한 오해로 이어진다. 애플은 이제 기술 회사가 아니라 디자인 회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소셜미디어에 퍼지고 있다. 애플이 인공지능에 뒤처졌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디자인에 대한 오해가 핵심을 가리고 있다. 대개 디자인을 맵시가 예쁜 외관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원래 의미는 설계이다. 디자인은 제품을 만드는 부품 설계와 공정 설계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다. 디자인이 무엇인지는 애플 디자인을 책임지던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의 스튜디오를 보면 알 수 있다.
흔히 디자인 사무실이라면 멋진 인테리어에 뭔가를 그리는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제조 공장처럼 꾸민 작업실에서 조너선 아이브는 절삭 가공용 공작기계 CNC 머신으로 제품을 설계했다. 기계 가공을 IT에 도입해 부품을 줄이고, 조립을 단순화했다. 이를 양산에 적용하자 CNC 머신은 원가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아이폰은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이 15%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스마트폰 전체 영업 이익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어떻게 아이폰의 가격 경쟁력이 중국 업체들보다, 베트남에서 만드는 제품보다 비교 불가인지는 외형 디자인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이슨의 디자인도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임스 다이슨(James Dyson)이 청소기 시장에 혁신을 가져온 것 중 하나는 3차원 원심 임펠러이다. 원심 임펠러는 공기를 잘 압축하므로, 이를 반대로 작동시키면 공기를 잘 빨아들인다. 하지만 기존에는 단순한 2차원 임펠러를 사용해 효율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슨은 우주항공에서나 사용되던 3차원 원심 임펠러를 과감히 도입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곧 후발 주자들이 이를 따라갔다. 그러자 다이슨은 한발 더 나아간다.
원심 임펠러는 공기를 잘 압축하지만, 유량을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유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축류 임펠러이다. 다이슨은 터보제트 엔진에 사용하는 고성능 축류 임펠러를 헤어드라이어에 장착했다. 그리고 단숨에 세계 시장을 휩쓴다. 또 후발 주자들은 이를 따라갔다. 그럴수록 다이슨은 더 앞서간다. 이번에는 항공 엔지니어 헨리 코안다가 발견한 코안다 효과를 이용한 제품을 출시한다. 모발 손상 없이 머리를 가꿀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코안다 효과는 오래전부터 알려졌지만, 누구도 이를 헤어 스타일링에 쓸 생각을 못했다.
주목할 점은 이 제품들의 중심이 되는 초고속 회전 모터를 단일한 크기로 디자인(설계)했다는 사실이다. 다이슨의 경쟁력은 이렇게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다. 놀라운 것은 조너선 아이브와 제임스 다이슨 모두 공대가 아니라 디자인 학교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공학적 원리를 디자인에 도입한 것은 경계를 넘는 폭 넓은 시야에서 가능했다. 한편, 제임스 다이슨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모교였던 영국 왕립예술학교 학장을 맡았고, 후임 학장은 조너선 아이브였다.
엔지니어는 엔진을 만드는 사람이다. 여기서 엔진(Engine)은 연기를 내뿜는 내연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물을 뜻하는 인제니움(Ingenium)이 어원이다. 찰스 배비지가 제시한 초기 컴퓨터에 엔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엔지니어는 크리에이터(Creator)로 볼 수 있다. 새로운 것은 늘 경계 너머에 있기에 엔지니어는 경계를 넘어야 한다.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와 제임스 다이슨은 엔지니어였다. 리버럴 아츠의 전통이다. 하지만 우리 대학은 생산 현장과 거리를 두고, 공대 출신조차 엔지니어라 불리기를 꺼린다. 불확실한 대외 여건으로 우리 산업에 대한 걱정이 많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서는 먼저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민태기 '판타레이' 저자·공학박사, 조선일보(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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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투자 미·중 500분의 1 韓, '국대' 쇼는 훨씬 요란

국가대표 AI
정부가 발표한 ‘국가대표 AI’ 선발 1차 평가에서 국내 선두 업체 네이버클라우드는 일부 오픈소스 활용에 따른 독자성 미달로 실격됐고, 엔씨소프트는 점수 미달로 탈락했다. 목표치보다 많이 탈락하자 정부는 재공모를 결정했다. 당초 계획대로 진행돼도 2년 넘게 걸리는 국가대표 AI 선발전은 더 지연될 상황이다. 현장의 절박감을 외면한 행정 편의주의란 비판이 쏟아지는 이유다.
지금 미·중의 AI 기업들은 유례없는 ‘쩐의 전쟁’ 중이다. MS와 오픈AI는 1000억달러(약 135조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며, 중국은 민관 합동으로 매년 100조원 이상을 AI 굴기에 쏟아붓고 있다. 우리는 최종 2팀을 뽑아 인프라 이용 등을 합쳐 2000여억원을 지원한다며 국가대표 AI 선발전을 치르고 있다.
정부는 선택과 집중 때문에 불가피하다고 한다. 하지만 AI는 포항제철처럼 정부가 기업을 낙점해 밀어붙이던 ‘기획 시대’의 산물이 아니다. 민간의 창의성과 속도가 생명인 영역에서 정부가 오디션을 치르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정부는 심판이 아니라 철저한 조력자여야 한다. 구글이나 오픈AI 등 글로벌 AI 시장의 주역 중 정부 오디션으로 성장한 곳은 없다. 오죽하면 업계에서 “K-AI가 오디션 예능이냐”는 냉소적 지적이 나오겠는가.
더 기막힌 것은 지원은 더디면서 규제는 세계 최초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22일 시행될 ‘AI 기본법’은 기술 후발주자인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빗장을 걸어 잠그는 과속 행정이다. 특히 ‘고위험군 AI’의 정의가 모호해 각종 규제를 지킬 자본과 시간이 부족한 스타트업들은 이미 크게 반발하고 있다.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자화 100%’라는 순혈주의 대신 글로벌 오픈소스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실리적 접근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미스트랄 AI가 오픈소스를 지렛대 삼아 글로벌 강자로 도약했듯 전 세계는 기술 순혈보다 생태계 확장과 속도에 사활을 걸고 있다. 우리가 확보해야 할 AI 주권은 원천 기술보다는 국방·의료 등 안보와 직결된 분야에서 독자적 데이터 통제권을 갖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AI 전쟁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길은 관료 중심의 오디션이 아니라 민간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인프라 지원과 전향적 규제 혁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조선일보(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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