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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미국 초석 닦은 워싱턴의 경고.. ]

뚝섬 2026. 3. 19. 09:32

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미국 초석 닦은 워싱턴의 경고

"민주정치의 가장 큰 敵은 당파성"

 

⑤ 민주공화국의 기본을 세우다

오합지졸 대륙군 지휘해 英에 승리
삼권분립 헌법 제정 후 대통령 취임
두번째 임기 마치고 정계은퇴 선언
"당파심 억제가 정치와 국민의 의무"
 

1787년 9월 17일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헌법제정회의에서 토론 끝에 미국 헌법이 탄생하는 장면. 이 회의를 이끌고 추후 초대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이 오른쪽 단상에 서 있다. 이 그림 중앙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이 지팡이를 쥔 채 앉아 있다. /미 연방의사당

 

미국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의 영토는 약 11배 확대됐고 인구는 135배 폭증했다. 세계 제1 경제력을 갖춘 건 100년 전이다. 영국인들이 세운 식민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기적을 이뤘을까? 미국과 세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선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 주

 

신대륙에 건너간 이민자들이 세운 미국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특별하다. 고대 아테네 이후 민주주의를 토대로 세워진 두 번째 국가이며, 역사상 가장 오래 민주주의를 지속해 온 초강대국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원인은 다양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리더십의 몰락이다. 모든 제도에는 장단점이 있고 운용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미국의 위기를 보고 있노라면 국부(國父)들이 떠오른다. 탁월하고 헌신적이며 자유를 사랑했고 공익을 우선시한 지도자들. 그중에서도 단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면 조지 워싱턴(1732~1799)이다. 그의 위상은 대륙군 총사령관, 헌법 제정 회의 의장, 초대 대통령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워싱턴이 정계를 은퇴할 때 남긴 말은 지금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치인들도 되새겨 봐야 한다. 

미국 독립전쟁을 상징하는 그림 /위키피디아

 

◇대륙군 총사령관 조지 워싱턴

 

보스턴에서의 유혈 충돌로 전쟁이 시작되자 대륙회의는 1775년 6월 15일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버지니아 대표였던 워싱턴은 성공한 농장주로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는 7년 전쟁 당시 버지니아 민병대장으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식민지의 독립과 자유라는 대의에 헌신했다. 그러나 상대는 당대 최강의 영국군이었다.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하는 대륙군은 어설프고 전투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과 같았다. 열정은 높았지만, 영국군을 이길 확률은 희박했다.

 

군사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대륙군 총사령관을 맡은 워싱턴의 가장 큰 장점은 절제와 평정심이었다. 장기전을 책임져야 할 장군에게 중요한 덕목이었다. 나아가 그에게는 분열된 식민지들을 하나로 모아 전쟁을 치르는 리더에게 꼭 필요한 관대함과 고결함이 있었다. 이런 덕목은 수많은 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을 위대한 대의에 헌신하게 만들고 단결시킬 수 있었다.

 

1776년 7월 4일, 식민지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본격화됐다. 워싱턴은 전면전을 피하고 신중하게 진지전을 펼치면서 영국군에 맞섰다. 훈련과 규율이 부족한 대륙군이 전면전에서 패할 경우 군대 자체가 붕괴될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로 전선이 바뀌는 내내 워싱턴은 끈질기게 방어전을 유지하며 영국군의 진을 뺐다. 1778년 봄, 프랑스가 영국에 대한 원한으로 참전하자 전황이 급반전했다. 반격에 나선 워싱턴은 1781년 10월 19일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콘월리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견제와 균형의 헌법 제정

 

1783년 파리 회담으로 아메리카 식민지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3개 식민지는 13개 주(州)가 됐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각 주는 제각각 국가처럼 행동하며 서로 시기하고 반목했다.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이를 ‘모래 밧줄로 연결된 나라’로 여겼다.

 

중앙 정부의 필요성에 공감한 사람은 드물었지만, 이 신생 독립국은 애팔래치아 산맥과 미시시피 강 사이 드넓은 서부의 영토 관리, 인디언과의 계속되는 분쟁, 유럽 열강의 위협, 농민들의 반란 등 해결 과제를 산적히 떠안고 있었다. 뉴욕 주의 해밀턴을 비롯한 소수가 강력한 중앙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유다. 해밀턴의 요청으로 1787년 5월 각 주의 대표단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대표단은 헌법 제정 회의에 앞서 워싱턴을 의장으로 선출했다. 독립전쟁 당시 보여준 리더십과 그에 대한 아메리카인들의 존경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대표단은 이상과 현실의 타협이 핵심이라는 것을 자각했다. 그러려면 여론의 영향력을 차단해야 했다. 제헌 회의는 모든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했고, 토의 내용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민주 헌법은 역설적으로 이렇게 비민주적인 환경에서 태어났다.

 

회의 주도권은 오랜 기간 헌법을 연구한 버지니아가 잡았다. 그 핵심은 견제와 균형을 중심으로 한 삼권분립과 양원제였다. 뉴저지는 의회에서 선출한 소수의 운영위원으로 구성된 느슨한 정부와 단원제를 제안했지만, 다수가 “입법 권한에 제약이 없으면 자유도 안정성도 없다”는 의견에 동조했기 때문에 기각됐다. 타협 끝에 코네티컷주의 로저 셔먼이 제안한 “상원은 각주가 균등하게 2명, 하원은 인구에 비례해 대표를 선출하자”는 안이 채택됐다. 1787년 9월 17일 워싱턴과 벤저민 프랭클린의 강력한 인도 아래 헌법이 조인됐다. 미국이 실질적으로 탄생한 순간이었다. 

 

1884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남쪽에 세워진 조지 워싱턴 기념탑.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초대 대통령의 당부

 

최종 과제는 헌법 비준이었다. 어떤 주도 대표들에게 이처럼 혁명적인 헌법을 제정할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헌법에 반대하는 반(反)연방파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결국은 영국 전제정을 대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국민의 권리에 대한 명시적인 조항이 헌법에 담기지 않았다는 것도 반대 이유였다. 헌법에 찬성하는 연방파는 권리장전 제정을 약속하며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 끝에 비준 논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만장일치로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취임했다. 그는 연방파와 반연방파 간의 갈등에서 한발 떨어진 채 조용히 연방파를 지지했다. 그렇게 신생 국가의 기초를 닦은 후, 워싱턴은 세 번째 집권을 거절하고 1796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고별사에서 마치 예언하듯이 민주정치의 가장 큰 위협은 당파성이라고 경고했다. “당파심은 가장 부패한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에 정부에겐 최악의 적이다. 한 파벌이 복수심으로 다른 파벌을 지배하려 든다. 시대와 나라만 다를 뿐 여러 곳에서 가장 악독하게 자행돼 온 무서운 독재다. 현명한 국민이라면 그 해악을 고려해 당파심을 억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의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미국 정치인들과 국민은 그의 당부를 잊었다. 그 결과 미국은 분열했고, 민주주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미국은 워싱턴 같은 리더가 다시 출현할 때, 민주주의가 복원되고 다시 위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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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임기 후 대통령직 물러나

 

워싱턴은 왜 國父로 추앙받나 

 

미국을 대표하는 초상화가 길버트 스튜어트가 1796년에 그린 워싱턴의 전신화. /미 국립 초상화미술관

 

캐피톨(Capitol)은 미국 상원과 하원이 자리한 의사당을 뜻한다. 워싱턴DC의 상징이자 미국 민주주의의 자부심인 이 거대한 건물의 중심부에는 로툰다(Rotunda)가 있다. 대통령 취임식과 장례식 등 국가적 행사가 이곳에서 거행된다.

 

로툰다의 벽면에는 8폭으로 구성된 대규모 회화가 걸려 있는데, 이는 미국 초기 역사 속 주요 순간들을 시간 순으로 보여준다. 그중 마지막 장면은 1783년 12월 23일 아나폴리스에서 조지 워싱턴이 대륙군 총사령관직을 사임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장군이자 군인들에게 사랑받고 시민들에게 존경받던 그가, 헌법도 정부도 아직 없는 무정부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가 주목했다.

 

그는 공개적이고 극적인 의식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권력이 대륙회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명확히 밝혔다. 모든 공직자는 임무가 끝나면 권력을 내려놓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모범을 세운 것이다. 같은 이유로 그는 2번째 임기를 수행한 뒤 대통령직에서도 물러났다. 워싱턴의 사후(死後) 미국 사회는 그를 신격화했고, 오늘날까지도 깊은 존경과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송동훈 문명 탐험가, 조선일보(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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