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이란 교류의 역사]
[팔레비 왕조]
[이스파한(Isfahan)]
[이란]
한국과 이란 교류의 역사
1977년 서울엔 테헤란로, 테헤란엔 서울로 생겼어요
지난달 28일 시작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전쟁이 오늘로 20일째를 맞았어요. 세계 원유의 상당량이 이동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국제 유가가 급등했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 각국은 에너지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이란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란은 우리와는 어떤 관계였을까요? ‘쿠쉬나메’ ‘테헤란로’ ‘양곰’이라는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경북 경주 괘릉에 있는 무인상입니다. 이국적인 생김새 때문에 페르시아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기도 해요./경북 경주 용강동에서 출토된 흙인형. 이 유물도 페르시아인을 형상화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인 닮은 신라 유물
이란은 고대에 ‘페르시아’로 불렸던 나라의 후신입니다. 역사를 보면 페르시아는 서로 다른 시기에 두 차례 등장해요. 먼저 성경에도 나오는 기원전 550~330년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넓은 영역을 지배했던 페르시아 제국이에요. 이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로 불립니다. 또 하나는 서기 224~651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에요. 이 사산 왕조 페르시아를 거치면서 이곳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란인’으로 부르며 오늘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됐답니다.
2010년 이희수 한양대 교수가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옛 서사시 인쇄본 하나를 입수했습니다. ‘쿠쉬나메(Kush-nameh·쿠쉬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서사시는 11세기에 만들어져 14세기에 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하자 주인공인 아비틴이 유민을 이끌고 당나라로 망명했다가 다시 그 인근 ‘낙원과도 같은 곳’이라는 나라 ‘바실라’로 피신합니다. 이곳 바실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해 낳은 아들이 훗날 이란으로 돌아가 페르시아를 핍박하던 아랍군을 물리친다는 줄거리죠.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바실라’가 신라라고 해요. 신라를 옛 페르시아 문헌에서 그렇게 표기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당시 페르시아와 신라 사이 교류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문학 작품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일부 페르시아인이 신라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큰 거죠. 아랍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페르시아인이 살기 좋은 머나먼 동쪽 황금의 나라 신라로 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통일신라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괘릉의 무인상과 경주 용강동 출토 흙인형 등의 외모는 움푹 파인 눈, 우뚝 솟은 코를 지녀 이국적인 풍채와 용모를 보이는데, 페르시아인을 모델로 한 것이란 분석이 있습니다. 신라 향가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이 페르시아 출신일 거라는 추측도 있죠.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전경
이란 혁명 이후에도 남은 ‘서울로’
대한민국과 이란의 수교는 1962년 10월 23일 이뤄졌어요. 이때 이란은 1925년부터 지속된 팔레비 왕조의 왕국이었고, 2대 국왕인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재위 1941~1979)가 통치하고 있었죠. 그는 급진적인 근대화·산업화를 추구했으며 친미·친서구 성향을 보였습니다. 당시 한국과 이란은 종교나 문화 등이 달랐지만, ‘빠른 산업화의 길을 걸으려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 근로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는데, 이란에도 2만명 넘는 한국 근로자가 코람샤 항만 공사장 등에서 일했어요. 신라 때는 이란에서 한반도로 사람들이 이동했다면 이제 반대 상황이 된 거죠.
이처럼 양국 관계가 좋았던 1977년 6월,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의 골람레자 닉페이 시장이 방한합니다. 그는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과 만나 “서울과 테헤란에 서로 ‘길 이름’을 교환하자”는 데 합의했죠. 그래서 테헤란에 ‘서울로(路)’가,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겨나게 됐어요.
이후 테헤란의 서울로는 여느 도로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길로 남은 반면, 서울의 테헤란로는 대단히 유명한 길이 됐습니다. 강남 한복판 4.1㎞ 길이에 왕복 10차선인 이 도로는 양쪽으로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여러 금융사와 벤처·IT 기업이 자리 잡은 번화가가 됐죠. 그래서 지금은 ‘이 길 이름이 왜 테헤란로냐’라는 의문을 지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고 이란에는 이슬람 근본주의로 돌아간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습니다. 이에 따라 이란의 외교 노선도 반미(反美)로 바뀌었지만 한국과 이란의 관계는 유지됐어요. 서울에 테헤란로가 생겨나게 한 닉페이 시장은 팔레비 왕조에서 건설부 장관이 됐다가 이란 혁명 이후 공개 처형됐지만, 테헤란의 서울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서울 강남구 강남역 1번 출구 인근에 있는 테헤란로 표지석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오종찬 기자•위키피디아
‘대장금’ 이란 시청률 90%
2007년 이란에서는 수입 TV 드라마 한 편이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최고 시청률이 지금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수치인 90%에 달했다는데요. 한마디로 환자나 여행을 간 사람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방송 시간마다 전 국민이 TV 앞에 모였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여성 주인공에 요리를 소재로 삼았던 한국 드라마 ‘대장금’이었어요.
어떻게 이 정도까지 인기를 누릴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당시 테헤란에 취재 갔던 한국의 한 기자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한국인임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멈춰 서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양곰!”이라고 외쳐대는 바람에 나중엔 성가실 정도였다고 하네요. ‘양곰’은 ‘장금’의 이란식 발음입니다.
이후 2009년 이란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주몽’이 85%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이란 내 ‘한드’의 인기는 이어졌답니다. 주연을 맡았던 배우 송일국은 당시 이란을 방문해 큰 환대를 받았어요. 송일국이 광고 모델을 맡은 한국 기업은 이란에서 매출이 크게 오르기도 했어요. ‘주몽’이란 이름으로 이란인의 개명 신청이 이어지는가 하면, 한국으로 가서 ‘주몽’의 주연 여배우 한혜진과 결혼하겠다며 떼를 쓰는 청소년이 생겨날 정도였다고 해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사이 전쟁은 언제 어떻게 끝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자국민을 탄압해 온 이란의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가 향후 어떻게 될지도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란 국민 9300만명 중 한국에 대체로 우호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유석재 역사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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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비 왕조
독재로 몰락한 이란 마지막 왕조… 시민은 왜 그리워할까
경제 위기 때문에 시작된 이란의 반(反)정부 시위가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어요. 이란 화폐인 리알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가 오르면서 생활고에 시달린 국민이 거리로 나온 겁니다. 이 과정에서 이란 정부가 시위를 강경 진압해 수천~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인 팔레비 왕조의 레자 팔레비 왕세자는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 이란 정권을 비판했어요. 그는 미국에 망명한 상태입니다. 레자 팔레비는 “팔레비 왕조가 무너질 당시만 해도 이란의 GDP(국내총생산)는 한국의 5배였지만, 지금 이란은 북한처럼 됐다”고 지적했습니다.
팔레비 왕조가 20세기 초 등장한 이후 이란의 수도 테헤란은 ‘중동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발전해 있었답니다. 현재 일부 시위대는 ‘왕정복고(폐지된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까지 외치고 있다고 해요. 이란 근대화를 이룬 팔레비 왕조는 어쩌다 몰락한 걸까요?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 샤./레자 샤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 샤.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다
1925년 등장한 팔레비 왕조는 이슬람 혁명으로 1979년 몰락할 때까지 2명의 ‘샤(왕)’가 50여 년 동안 이란을 통치했습니다. 팔레비 왕조 이전 20세기 초 이란은 수 세기 동안 이어진 폭정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제1차 세계대전, 기근 등으로 붕괴 직전이었어요. 당시 카자르 왕조의 아흐마드 샤는 이런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죠.
이때 기회를 엿보던 사람이 바로 팔레비 왕조를 세운 레자 칸이었습니다. 1921년 2월 그는 근대식 군대를 이끌고 테헤란에 무혈(無血) 입성합니다. 당시 이란 국민은 새 지도자의 등장으로 무능한 기존 왕조가 끝났다고 생각해 쿠데타를 오히려 환영했다고 해요.
레자 칸은 군대 지휘권을 장악한 후 전쟁부 장관, 총리를 거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갔어요. 결국 1925년 이란 의회는 카자르 왕조의 아흐마드 샤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새 샤로 선출합니다. 레자 샤의 팔레비 왕조가 시작된 것이죠.
팔레비 왕조 창건자의 몰락
레자 샤는 즉위 후 나라의 공식 명칭을 서구식 이름인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며 민족 정체성을 강조했답니다. 이슬람 성직자를 구시대의 잔재로 보고, 이슬람 율법학자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정책도 실시합니다. 이슬람 종교 학교에 대한 지원도 중단됐어요.
이 시기 이란 여성의 지위도 상승했는데요. 레자 샤는 1936년 히잡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남녀 모두 다닐 수 있는 학교도 늘렸어요. 그러나 선택적 근대화라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노동조합과 정당을 금지했고, 언론을 강력하게 탄압했기 때문이죠.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레자 샤는 이란에서 소련과 영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해 나치 독일과 교역을 늘렸습니다. 이는 1941년 영국과 소련이 이란을 점령하는 구실이 됐어요. 당시 미국·영국·소련 등이 속한 연합국이 독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죠. 연합국은 이란을 거쳐 인도에서 소련으로 전쟁 물자를 이송하기 위해 레자 샤를 퇴위시켰고, 그의 아들 무함마드 레자 샤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무함마드 레자 샤는 나이도 어리고 정치 경험도 없어 연합국이 관리하기 쉬운 인물이었거든요. 퇴위당한 아버지 레자 샤는 망명 생활을 하다 194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습니다.


1973년 무함마드 레자 샤(왼쪽)와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이슬람 혁명을 이끈 루홀라 호메이니가 지지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있어요.
스쳐간 이란의 자유
1940년대 후반부터 1953년까지는 이란 현대사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로 평가받아요. 공산주의부터 민족주의까지 다양한 정당이 등장해 경쟁했고, 언론도 활성화됐습니다. 이 가운데 민족주의자인 무함마드 모사데크가 1951년 총리로 취임했어요.
모사데크는 오랜 기간 영국 등 외국에 착취당한 이란의 천연자원을 되찾고자 석유 산업을 국유화했습니다. 영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죠. 공산주의가 이란에 침투할 것을 우려하던 미국과 손잡고 모사데크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추진합니다. 결국 1953년 모사데크는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은 세력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말았어요.
팔레비 왕조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서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를 막는 전투 기지가 됐습니다. 미국은 이란에 대규모 군사 원조를 했고, 이 과정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이란 내 인물들을 감시하는 비밀 경찰인 사바크(SAVAK)도 만들어졌어요. 사바크는 팔레비 왕조가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사용한 공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혁명 이후 반복된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이 사그라들지 않자, 연합국이 앉혀준 왕인 무함마드 레자 샤는 1960년대 의회를 해산합니다. 여성의 참정권 확대와 토지 재분배 등을 포함하는 서구화 정책인 ‘백색 혁명’도 펼쳐요. 이로 인해 이슬람과 민족주의 세력의 불만은 커졌습니다. 특히 이슬람 종파 중 하나인 시아파 지도자들이 여성 자유화 법률이 이슬람 가치에 어긋난다며 서구화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훗날 이슬람 혁명을 이끈 루홀라 호메이니도 이 중 한 명이었죠.
1970년대 이란이 세계 최대의 석유 수출국이 되면서 도시화와 산업화가 빨라졌지만, 사회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았어요. 전통적 윤리가 이미 무너진 상태였고, 경제 성장의 성과가 소수 고위층에만 집중돼 빈부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죠.

1978년 9월 팔레비 왕조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행진하고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한 대중은 1978년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혁명이 격화되자 무함마드 레자 팔레비는 해외로 망명했고, 혁명을 이끌었던 루홀라 호메이니는 성직자 중심의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세웠어요. 이란은 ‘라흐바르’라는 종교적 권위자가 최고 지도자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돼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팔레비 왕조의 독재를 끝내고 등장했지만 또 다른 독재 국가가 됐어요. 라흐바르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권력은 정치, 사법, 군사권까지 장악해 이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죠. 새로운 자유가 찾아올 것이라는 국민의 기대와 달리, 시위를 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면 체포뿐 아니라 징역이나 사형까지 선고되는 경우도 있었답니다. 여성들은 다시 의무적으로 히잡을 써야 했어요. 히잡과 순결법을 만들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에게 최대 10년 징역형을 내릴 수 있게 됐죠. 여성 차별, 정치적 탄압, 경제 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이란 사회는 여전히 권위주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조선일보(26-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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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Isfahan)
'세상의 절반' 줘도 바꾸지 않겠다던 17세기 페르시아 수도
강이 지나가는 '이란의 오아시스'…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 400㎞에 위치
아바스 1세, 이스파한으로 수도 옮겨… 대학 48개, 여관 1802개 생기며 번성
도시 중앙에 지은 화려한 '이맘 광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일 "이란 내 공격 목표 52곳을 정해뒀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그는 이란의 문화유적도 포함돼 있다는 뉘앙스의 말도 덧붙였죠. 13일 현재 미국이 이란의 유적을 타격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이란에 많은 문화유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기회가 됐죠. 이란은 유네스코 세계유산만 24곳이 있거든요. 고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조로아스터교 유적이 남아 있는 도시 야즈드, 그리고 오늘 소개할 도시 '이스파한' 같은 곳이 즐비합니다.
◇이란이 품은 오아시스
이스파한(Isfahan)은 이란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400㎞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란이 품은 오아시스'로 불리기도 하는데 생명을 주는 강이라는 뜻의 자얀데(Zayandeh)강이 이스파한을 가로지르기 때문입니다. 자얀데강 덕분에 이스파한은 건조한 사막 기후에서도 푸르른 오아시스 도시가 될 수 있었어요. 자얀데 강 주변의 비옥한 토지에는 기원전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고 합니다. 이스파한은 현재 이란에서 셋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란 도시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 전경. 광장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2층 아케이드가 특징입니다. 이스파한은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시기 국제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뜻밖에도 과거에 이스파한은 유대인과 인연이 깊은 땅이었습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키루스왕이 바빌론을 점령하고 그곳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풀어줬는데 이들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스파한에 정착했다고 해요. 이후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야즈데게르드 1세(재위 399~420)는 유대인 부인을 위해 이스파한에 유대인 정착촌 '예후디예'를 조성했고요. 사산 왕조가 멸망하고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에게 쫓겨나서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요.
◇'세상의 절반 줘도 안 바꿀 도시'
이스파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사파비 왕조(1501~1736) 4대 샤(황제) 아바스 1세(재위 1587~1629) 때였습니다. 이슬람교 시아파였던 그는 수니파인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국가들과 교류하며 유연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는 수도를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옮기고 상업을 발전시켰어요. 그는 아르메니아의 부유한 상인들을 이스파한으로 불러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르메니아 상인들에게 종교적 자유를 주면서까지 경제를 살렸습니다.

아바스 1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라"고 명령했고, 당시 내로라하는 예술가와 공예가를 데려왔어요. 새 건물들이 착착 지어졌지요. 17세기 페르시아를 다녀와 여행기를 남긴 프랑스인 샤르댕(Chardin)은 이스파한을 이렇게 묘사했어요. '사원 162개, 대학 48개, 여관 1802개, 공중목욕탕 273개가 있고 인구가 100만에 달한다.'
그 결과 아바스 1세 시절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Nesf-e Jahan·네스페 자한)'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세상의 절반을 줘도 이스파한과 바꾸지 않겠다는 자부심이 담긴 이름이었죠. 이스파한은 여러 민족과 종교를 아우르는 국제도시로 발전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맘 광장'
이스파한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맘 광장'이 있습니다. 이스파한 심장부에 자리한 남북으로 길쭉한 직사각형 광장입니다. 광장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왕궁의 문인 '알리 카프(숭고한 문)', 동쪽에는 아바스 1세의 장인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셰이크 로트폴라흐 사원'이 있지요. 그리고 남쪽에는 이맘 사원과 자미아 사원, 북쪽에는 게이사리예 바자르(재래시장)가 있습니다. 광장이 2층 아케이드로 둘러싸여 있다는 게 특징이죠. 오늘날에도 광장 주위로 늘어선 건물들의 채색 타일과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는 당시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어요.
[기원전 페르시아서 시작된 '폴로'… 실크로드 따라 동아시아로 전파]
이스파한의 이맘 광장〈그림〉은 사파비 왕조 시절 '폴로' 경기장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현재 광장에는 분수와 정원이 조성돼 있지만 남북으로 양쪽에 각각 두 개씩 대리석 골 기둥이 남아 있어요.

/위키피디아
폴로는 '말을 타고 하는 하키'라고 설명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흔히 영국 상류층이 즐기는 스포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페르시아에서 시작됐다고 해요. 기원전 페르시아에서 기마병 훈련법으로 도입됐고 이후 인기를 얻으면서 페르시아 여성도 폴로 경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폴로는 서쪽으로는 이스탄불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고, 동쪽으로는 비단길을 따라 동아시아에도 '격구(擊毬)'라는 이름으로 퍼졌어요.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일보(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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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여유와 포용의 제국 페르시아의 귀환
제국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 핵 타결 후 거대한 변화 조짐
한때 '세상의 절반'이라 불린 수도 이스파한을 가졌던 제국의 여유와 포용력으로 새 시대 열어갈 수 있을까. '페르시아'라는 이름의 거인이 결박을 풀고 있다. 오랜 제재를 받아 온 이란이 핵 협상 타결 이후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설 모양새다. 고대와 중세를 아우르며 시대를 풍미했던 제국의 후예들이 보이는 몸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이웃 나라들은 아연 긴장하고, 국제사회는 기대와 우려가 함께 담긴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다.
부침(浮沈)은 있었지만 제국 페르시아는 늘 강인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이끌었던 사이러스(키루스 또는 고레스라고도 함) 대제(大帝)의 신화는 제국 역사의 절정이다. 메소포타미아를 정복한 그는 흉포한 바빌론 제국이 정복했던 소수민족들을 해방시킨다. "누구도 다른 민족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민족은 평등하며 지배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그의 선언은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연상케 한다. 이 선언은 점토 기둥에 쐐기 문자로 새겨져 수천 년이 흐른 지금 대영박물관에 남아있다. 포로로 끌려와 강가에 앉아 예루살렘을 향해 울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고향을 되찾게 해준 이가 바로 사이러스 대제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이 함께 그를 숭앙하는 이유다.
중세 페르시아의 상징은 압바스 대왕이다. 사파비 왕조를 이끌며 고대 페르시아의 영화(榮華)를 되살려냈다. 그는 정복한 영토 위에 자기만의 왕국을 구축하지 않았다. 생소한 문화와 문물을 동서로부터 끊임없이 받아들여 중앙아시아와 지중해를 이었다.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 이스파한은 '세상의 절반'이라 불리며 문명 교류의 정점을 구가했다. 페르시아의 문화와 사상을 흠모하는 조류, 즉 '페르소필리아(Persophilia)'도 이때 연유했다. 제국의 힘은 무력과 배타성에 있지 않다. 세계를 함께 아우르며 공존하게 할 수 있는 여유와 포용에 진정한 제국의 힘이 있다.
하지만 천하의 제국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근·현대에 접어들고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과 미국의 영향력에 굴복했다. 카자르 및 팔레비 왕조는 유약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은 결정타였다. 교조적 종교 이념이 권력을 송두리째 장악하면서 이란은 폐쇄적이고 음습한 신정(神政)국가로 변신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소수민족을 끌어안으며 분리된 세계를 연결했던 페르시아는 없었다. 이란 이슬람공화국은 퇴행적이었다. 핵 개발 문제가 맞물리면서 의혹과 불신의 이미지까지 덧대어졌다.
그러나 속살 한구석, 페르시아의 자취는 옅게 남아 있었다. 성직자 통치의 혹독함 속에서도 이란 국민은 마냥 굴복하지는 않았다. 선거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투표를 통해 자신들 손으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결기를 지켜왔다. 그뿐이랴. 여전히 시와 노래를 사랑하고, 여성들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도 세련된 자신의 멋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신의 다스림으로도 인간의 세계를 완전히 굴복시키지 못한 셈이다.
그 이란에 지금 새로운 변화의 전조가 나타나고 있다. 계기는 역시 선거였다. 2013년 대선을 통해 핵 협상 타결에 이르렀다. 그리고 금년 2월 총선에서 이란 국민은 정치권을 향해 고립을 깨고 국제사회와 더 깊이 함께해줄 것을 요구했다. 어쩌면 그들은 사이러스와 압바스의 페르시아를 다시 떠올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땅을 차지하는 제국, 특정 이념에 복속되는 제국이 아니라 나라를 열어 갈라진 세상을 잇고, 소수민족과 종파를 존중해주는 페르시아의 전통을 되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미사일 실험과 인권침해를 일삼는 일부 보수 기득권 성직자의 완고한 배타주의를 이겨낼 이 시대의 사이러스와 압바스를 보고 싶다. 오늘의 희망이 단순한 미망(迷妄)에 그치지 않기를 기대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조선일보(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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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제국:
오늘날 이란의 영토에 근거한 여러 개의 제국을 서양에서 일반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기원전 550년-기원전 330년)를 페르시아 제국이라고 부르지만, 넓은 의미로는 1979년까지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여러 개의 제국들을 모두 페르시아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본래 남부 이란의 한 주(州)인 파르스에서 유래했는데 그 곳에 아케메네스조의 수도가 있었다. 이 때문에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 왕조를 그 지역 이름으로 불렀으며, 오늘날의 유럽 언어도 그것을 따랐다. 그래서 영어를 비롯한 유럽 어에서는 이 나라를 페르시아라 통칭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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