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놔라 배 놔라]
[기막힌 우연과 놀라운 능력]
감 놔라 배 놔라
오키나와에 왔다. 오랜만의 휴가다. 연재하는 자들은 휴가 전 미리 마감하려 애쓴다. 애만 쓴다. 모든 게 그렇지만 글도 마감이 닥쳐야 나오는 법이다. 법은 아니다. 변명이다.
오키나와에 오면 글감이 생길 줄 알았다. 국경의 긴 구름을 빠져나오자 남국이었다. 행복했다. 글쟁이는 너무 행복하면 안 된다. 글은 심성이 좀 고약해져야 나오는 법이다. 역시 변명이다.
유명 카페에 갔다. 해변에 평상이 여러 개 놓인 곳이다. 사람은 많아도 파도 소리만 들렸다. 요가는 못 하지만 평상에서 카마수트라 자세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그건 요가 자세가 아닌가. 아무튼 평화로웠다.
돌고래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남국의 섬이다. 돌고래가 아니었다. 한국 아이였다. 아이는 신을 신은 채 평상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부모는 말리지도 않았다. 옆 일본인과 눈이 마주쳤다. 최대한 한국인이 아닌 척했다. 얼굴이 좀 친일파처럼 생겨서 가능한 일이다.
속으로는 환호했다. 소재가 생겼다. 왜 요즘 부모는 아이를 훈육하지 않느냐는 소재로 쓰면 따봉을 많이 받을 것이다. 사례 하나로는 부족하다. 이틀 뒤 적막한 해변에서 또 돌고래 소리를 들었다. 한국 엄마였다. 위험한 곳에 가지 말라며 아이 이름을 고래고래 외쳤다. 기뻤다. 소재가 굳는 순간이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깨달았다. 눈동자 속 천진한 광기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엄마 눈동자 속 슬픈 광기도 봤다. 애가 없는 나는 감히 도달할 수 없는 광기다. 현실 광기에서 탈출하려 온라인에 접속했다. 뭘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한예종 이전 등 여러 일에 감 놔라 배 놔라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르는 것에 대해 너무 말이 많다.
나는 젊은 부모들에게도 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다만, 서울 사는 민재 군은 제발 엄마 말 좀 듣기 바란다. 자꾸 그러면 엄마가 돌고래 창법으로 득음할 것이다. 머라이어 캐리 뺨을 칠 것이다.
-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조선일보(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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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우연과 놀라운 능력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덕분일까. 국민 대다수는 조선의 왕 단종이 어떻게 삶을 마감했는지 알고 있다. 단종이 16세라는 창창한 나이에 유배지 강원 영월에서 죽은 것은 1457년 음력 10월 24일이었다. 이날 영월에는 비가 왔다고 한다. 영월 사람들이 하늘도 슬퍼하며 내렸다고 믿는 ‘단종우(端宗雨)’다. 가을이면 곧잘 내리는 가을비가 우연하게 죽음과 맞아떨어져 슬픔의 상징이 된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우연이 많다. 생명의 역사에도 과학자들조차 기막힐 정도라고 감탄하는 우연이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눈으로 보는 것은 간단하지만, 이를 위한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과정이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정교한 연쇄 반응이 필요하다. 최대한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우리 눈에는 간상세포와 원추세포가 있다. 이들 세포막에는 옵신이라는 단백질이 겹겹이 박혀 있는데, 이 옵신들은 레티날이라는 작은 분자를 반지 속의 반지알처럼 품고 있다. 빛을 흡수하기 위해서다. 빛을 흡수한 ‘반지알’은 구부러진 형태에서 곧게 펴지게 되는데, 이 힘의 변화가 반지알을 품고 있는 옵신에게 전달된다. 이런 전달과 증폭 등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뇌로 신호가 간다. 우리가 무언가를 보는 과정이다.
최대한 쉽게 설명한다고 했지만 ‘그래도 어려운데?’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한다고 해 놓고 어렵게 설명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과정은 과학자들에게도 쉽지 않다.
그런데 할로박테리움이라는 한 고대 미생물의 단백질이 이 복잡한 구조와 과정을 똑같이 갖고 있다. 신호를 뇌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에너지로 만든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같은 종조차 갈라져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면 다른 진화를 만들어 가는데, 우리와는 까마득한 태고에 갈라져 진화적으로 완전히 다른 뿌리를 가진 생명체가 판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같은 과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두 옵신 모두 빛을 효과적으로 감지하기 위해 세포막을 뱀처럼 7번 들락날락하며 원통형의 공간을 만드는 3차원 구조(7TM)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7번이라는 횟수까지 같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우주적인 확률의 우연이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자연이 빛을 보는 방법을 두 번 발명했다”고 말하는 이유다.
그런데 이 우연을 진짜 놀라운 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2021년 프랑스와 스위스 공동연구팀은 단세포 녹조류에서 추출한 옵신 유전자를 40년간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의 눈에 주입했다. 옵신 기능이 망가져 시력을 잃은 사람의 눈에 같은 기능을 가진 유전자를 넣어준 것이다. 어땠을까? 성공이었다. 망막 신경에 자리 잡은 미생물 옵신 덕분에 횡단보도 정도는 보며 건널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우연이 많다. 우연이 돈을 만나면 대박이 되고, 기회를 만나면 성공이 된다.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을 만나면 불행이 되고 슬픔이 된다. 이런 우연을 우연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무언가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우연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능력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장, 동아일보(2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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