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쳐 버린 어린 시절]
[이젠 초6부터 “엄카 대신 내카”]
놓쳐 버린 어린 시절

조지 롬니, 줄리아나 윌로비의 초상, 1781~1783년, 캔버스에 유채, 125.7 × 100.3 cm, 워싱턴 DC, 내셔널 갤러리 소장.
1781년, 영국 상류층 지주 집안의 크리스토퍼 윌로비는 외동딸 줄리아나의 초상화를 조지 롬니(George Romney·1734~1802)에게 주문했다. 당시 롬니는 런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가였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줄리아나는 고작 네 살. 화가가 바쁘기도 했겠지만, 네 살배기가 캔버스 앞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초상화가 완성되는 데 무려 2년이 걸렸다. 작품의 엑스레이 사진에는, 처음에 머리에 딱 맞는 동그란 모자를 쓴 아기 얼굴로 시작했다가, 도중에 챙이 큰 모자로 바꿔 그린 게 드러난다.
앙증맞은 두 손을 모아 리본을 움켜쥐고 화면 밖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동자에는 어른에게선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호기심, 천진함, 수줍음이 들었다. 줄리아나의 엄마이자 윌로비의 첫 부인은 불행히도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이 초상화가 완성되고 몇 년 뒤, 윌로비는 재혼해서 많은 자녀를 뒀지만, 그들의 초상화가 전해지지는 않는다. 윌로비에게 엄마 없는 외동딸 줄리아나가 각별했던 게 틀림없다.
롬니는 일찍이 부인과 어린 아들, 딸을 시골에 남겨두고 홀로 런던에 정착해 화가로 성공했다. 딸은 세 살 무렵 사망했지만, 그때도 부인은 혼자였다. 롬니가 마침내 가족에게 돌아온 건, 무려 40년이 지난 다음, 병들어 죽기 직전이었다. 아버지의 존재 없이 장성해 목사가 된 아들은 훗날 롬니의 전기를 집필했다. 거기서 그는 ‘아이들의 장난기와 생동감을 이렇게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가 자기 아이들을 의도적으로 버려뒀을 리 없다’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사실 롬니가 줄리아나를 공들여 그리는 동안, 놓쳐 버린 아들의 어린 시절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 버렸던 것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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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초6부터 “엄카 대신 내카”

혹시나 해서 지갑에 현금을 좀 넣어 다니지만 좀처럼 쓸 일은 없다. 신용카드나 간편결제, 계좌이체로 대부분 해결된다. 아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편의점이나 생활잡화점, 패스트푸드점 등에서 능숙하게 카드를 쓱 내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실제론 ‘엄카(엄마 카드)’, ‘아카(아빠 카드)’를 빌려 쓰는 것이지만, 이젠 초등학교 6학년도 본인 명의의 ‘내카’를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신용카드는 만 19세 이상 성인만 발급할 수 있었지만, 4일부터 여신전문금융업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발급 가능 연령이 크게 낮아졌다. 부모가 신청하면 만 12세 이상 자녀 명의로 ‘가족카드’를 발급할 수 있다. 그동안 일부 카드사에서 혁신금융서비스로 제한적으로 운영하던 것을 전면 허용했다. 무분별한 소비를 막기 위해 한도는 월 10만 원(부모 허락 시 최대 50만 원)으로 제한된다. 문구점, 편의점, 학원, 병원 등 실생활에 밀접한 업종에서만 쓸 수 있고, 유흥·사행성 업종의 결제는 차단된다.
▷원칙적으로 신용카드를 가족을 포함한 타인에게 빌려주는 것은 여신법과 카드사 약관 위반이다. 분실·도난으로 부정 사용이 발생해도 책임소재를 따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변화하면서 매번 용돈을 현금으로 주는 대신 ‘엄카’를 빌려주는 게 관행처럼 돼 왔다. 금융당국은 자녀들이 음성적으로 부모 카드를 쓰는 대신, 부모의 통제 아래 투명하게 소비를 관리하는 구조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 본인 명의의 카드 사용을 통해 금융 시스템의 근간인 ‘신용’의 개념을 일찍 익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우려의 시선도 만만찮다. 당장 통장에 잔액이 없어도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경험은 아직 자제력이 부족한 청소년들에겐 치명적인 유혹이다. 신용카드의 본질은 결국 ‘빚’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용돈 당겨쓰기’의 단맛에만 일찍 길들여질 우려가 있다. 아이들은 ‘내 카드로 내가 샀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엔 부모의 신용에 기대는 구조다. 내가 맘대로 써도 결국 누군가 갚아줄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형성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 통장 잔액 한도 내에서만 쓸 수 있는 체크카드만으로 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카드가 빚이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 사회는 엄청난 수업료를 치렀다. 소득 없는 대학생, 저신용자 등에게 무분별하게 카드를 남발했다가 수백만 명의 신용유의자(옛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2000년대 초반 카드대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카드를 긁는 행위가 훗날 어떤 책임으로 돌아오는지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첫 신용카드가 독배가 될지, 건강한 경제관념을 키워주는 자양분이 될지는 결국 카드를 허락한 어른들에게 달렸다.
-김재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6-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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