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놀고 싶어요"]
[어머니의 누름돌, 사랑은 무게다]
"하루라도 놀고 싶어요"

서울시청 앞을 걷다 초등생 둘의 대화를 들었다. “너 어린이날 선물 뭐 받았어?” “새로 나온 게임” “흐흐, 난 그날 학원 안 가도 된다. 엄마가 허락해 줬어” “좋겠다, 정말. 난 그날도 무조건 가야 해.” ‘학원 1일 면제권’을 선물로 받은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이었다.
▶맞벌이인 후배 부부의 딸은 학교가 끝나면 학원으로 직행한다. 국영수는 기본이고 발레, 피아노, 인라인스케이트까지 배운다. 후배는 말했다. “지금 기초를 잘 닦아 놓으면 전교 1등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대한민국에서 초등생은 사교육 참여율이 가장 높은 집단이다. 87%다. 부모가 아직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중고생 참여율은 60% 수준이다. 스스로 학습을 내려놓거나 적성을 찾아 학원 밖으로 나서는 중고생도 꽤 있지만, 초등생과 영유아의 발걸음은 당사자가 아니라 부모 의지다.
▶초등생의 소원 1등은 ‘쉬는 시간과 놀이 시간 보장’, 2등은 ‘공부 부담 줄이기’라는 조사가 나왔다. 전교조가 어린이날을 맞아 초등 4~6학년 2800명에게 물어본 결과다. ‘학교 폭력 없는 안전한 환경’이 뒤를 이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아이들은 스마트폰이나 닌텐도 게임기 같은 ‘물건’을 1순위로 꼽았다. 지금은 ‘숙제 없는 날’ ‘학원 안 가는 날’이 최고의 선물이 된 셈이다.
▶요즘 아이들은 개발도상국 시절을 보낸 부모 세대와 달리 선진국에서 태어났다. ‘물리적 결핍’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풍요 속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갈증은 세계 공통이다. 일본 초등생은 ‘자유시간’ ‘친구와 마음껏 놀 수 있는 부모의 허락’을 원하고, 미국에선 ‘가족과 보내는 시간’ ‘총기 사고 없는 안전한 학교’가 맨 위에 있다. 영국에선 ‘어른들의 지지와 경청’ ‘학교의 과도한 압박 완화’를 바란다. 국적은 달라도 아이들은 물건보다 ‘경험’과 ‘자율성’을 원하고 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늘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365일 내내 맛있는 것 먹고 좋은 옷 입으니 매일매일 어린이날 아니냐고 반문하는 어른도 있을 것이다. 맞다. 물질적으로는 풍요의 시대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요즘 아이들은 1년 중 하루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작은 직장인’이기도 하다. 아이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은 최신형 장난감이 아니라, 마음껏 날고 달릴 수 있는 자기들만의 시간일지 모르겠다.
-어수웅 논설위원, 조선일보(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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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징검다리 연휴에 서울 학원가는 특강 듣는 어린이로 북적. 어린이날도 어른 될 일 대비하는 슬픈 한국 어린이.
-팔면봉, 조선일보(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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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누름돌, 사랑은 무게다

집 근처에 새 마트가 문을 열었다. 요리사에겐 달력보다 식재료가 먼저 봄을 알려준다. 마트에 진열된 과일과 채소를 둘러보면서 계절이 어디쯤 와 있는지 생각한다. 과일의 색을 살피고 냄새를 맡으며 한눈을 판 사이 아내를 놓쳤다. 한참을 헤매다 통화해 만난 아내는 멋쩍게 웃으며 오이 한 봉지를 흔들었다. 싸고 좋은 놈으로 골랐단다. 카트에 넣으며 말했다. “이걸로 오이지 담그자.” 그 한마디에 기억이 50년 전 어느 시장 골목으로 휙 끌려갔다.
서울 돈암시장. 어머니 장 보러 가는 길엔 늘 따라나섰다. 비 온 뒤라 바닥이 질퍽거려 땅만 보고 걷다가, 고소한 기름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외면할 수 없는 비주얼의 꽈배기가 김을 올리고 있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를 놓쳤다. 떼쓰는 아이만 잡아간다던 망태기 할아버지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거대해졌다. 시장 한복판에서 울고 있는데 멀리서 나를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가 다리를 붙잡고 더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양손에는 오이가 잔뜩 들려 있었다.
오이 철이면 어머니는 반 접씩 사 오셨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았다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깨끗이 씻어 항아리 속 오이 위에 얹는 일은 내 몫이었다. 장가가며 집을 떠날 때까지 매년 그랬다. ‘그게 지금 어디에 있지?’ 어머니가 떠나신 뒤 그 누름돌을 아무도 챙기지 않았다. 물려받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30년을 주방에서 살며 무게의 의미를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시간의 무게는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돌덩이 하나가 인생에서 가장 아까운 것이 되다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건네준 자잘하고 즐거운 추억들이 내 안에 묵직하게 얹혀 있다. 시장에서 울던 아이를 부르던 목소리, 부엌에서 오이지 썰던 소리, 두건을 쓰고 항아리 앞에 앉아 계시던 뒷모습. 그런 것들이 여전히 나를 누르고, 짠물을 빼주며, 천천히 숙성시킨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누름돌이 내 안에 들어와 있었다. 사랑은 무게다.
-유재덕 파불루머, 조선일보(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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