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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상(女商)] [商高]

뚝섬 2026. 5. 2. 11:05

[여상(女商)]

[商高]

 

 

 

여상(女商)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가난하지만 공부 잘하는 중학생 상당수가 상고(商高)에 진학했다. 덕수상고 같은 명문 상고 합격선은 대부분 인문계고보다 크게 높았다. 합격하려면 중학교 성적이 상위 5%에 들어야 했다. 여상(女商)은 더 높아서 최상위 학교는 상위 1%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그 이면엔 시대의 음영도 깃들어 있었다. 온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 많은 가정이 “아들은 대학 보내고 딸은 가계에 보탬이 되게 여상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남자보다 똑똑했던 여학생들이 대학 못 간다고 인생의 꿈마저 접은 것은 아니었다. 여상 출신으로 사회적 성공을 거둔 이가 적지 않다. 최초의 삼성전자 상무에 오른 양향자 21대 의원은 광주여상 출신이다. 금융권의 활약은 더 도드라진다. 강신숙 전 수협은행장(전주여상), 신순철 전 신한은행 부행장보(대전여상), 윤유숙 우리은행 영업본부장(서울여상), 김덕자 전 하나은행 금융소비자본부 본부장(부산여상) 등이다.

 

▶1960~70년대만 해도 공부에 한(恨) 맺힌 여성이 많았다. 1970년대 주경야독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여공을 위한 산업체 부설 학교도 그때 생겨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장 시찰 중 만난 여공에게 “소원이 뭐냐?”고 물었더니 “교복 입고 공부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눈시울 붉히며 “소원을 들어주라”고 수행한 관료에게 지시한 것이 계기였다. 그런 학교에서 낮에 일하고 밤에 부기와 주산을 배웠다.

 

한국 최초의 여성 실업 교육 기관으로 문을 연 서울여상이 올해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지난 1세기, 4만287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공기업과 금융계 고위층까지 오른 이가 적지 않다. 2000년대 초까지 4대 고시로 통하던 공인회계사 시험에 졸업생이 한 해 10명 넘게 합격한 적도 있다. 지금도 희망자는 100% 취업에 성공하고 대입 합격률도 높다.

 

여상은 이 나라가 가난을 떨치고 비상의 날갯짓을 시작해 고도 성장을 이어가던 시절, 한국 산업을 떠받치는 주요 인력의 산실이었다. 남자 대졸자만으론 기업에 필요한 인력 충원이 버겁던 1980년대에도 똑똑하고 부지런한 여상 출신 인재들이 크게 활약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이후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고 여성의 교육 차별도 사라지면서 여상의 인기가 퇴조하고 있다. 이제는 전국에 20곳 정도만 남아 있다. 그러나 사회 변화에 맞춰 인재를 키워내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서울여상 100년이 이 나라 여성이 흘린 땀과 노고를 돌아보게 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6-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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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高  

 

김대중·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된 15·16대 대선은 '상고 출신이 경기고 출신을 이긴 선거'로 표현되기도 한다. 두 전 대통령은 각각 목포상고와 부산상고를 나왔다. 1970년대까지 명문 상고에 진학하려면 중학교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했다. 공부를 잘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 주로 인문계 고교 대신 진학했다. 1977년 고입 연합고사를 치렀다는 선배는 "당시 인문계 커트라인이 200점 만점에 117점이었는데 덕수상고·서울여상은 180점이 넘었다"고 했다. 

 

▶1980년대 들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상고로 진학하는 인재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90년대 중반 대입 정원 자율화 조치가 내려지자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인문계 고교로 진학했다. 상고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수과목이던 주산·부기를 없애고 비즈니스영어·국제금융·정보처리시스템 같은 과목을 신설했다.

 

▶상고들이 앞다퉈 교명에서 '상업'이란 단어를 없앤 시기도 이때쯤이다. 대동상고가 대동정보산업고를 거쳐 대동세무고로 바뀌었고 경복여상은 경복비즈니스고가 됐다. 영등포여상은 서울영상고가 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교인 목포상고는 2001년 일반계 고교가 되면서 교명을 전남제일고로 바꿨는데 동문들 항의가 끊이지 않자 2014년 다시 '목상고'로 바꿨다. 부산상고는 일반계로 전환되면서 1895년 설립 당시 이름인 개성고를 되가져왔다. 

 

▶우리나라 명문 상고들 중엔 일제시대 때 개교한 학교가 많다. 3·1운동 후 식민지 전략을 문화 통치로 바꾼 일본이 1920년대 초 전국 주요 도시에 상업학교를 세웠다. 한국인을 기능직과 사무직 인력으로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머리 좋은 학생들이 이들 학교에 진학했고 결국 광복 후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인적 토대가 됐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 은행 창구 직원 대부분이 여상 출신이었고 일반 기업의 회계·경리 부서 인력도 상고 출신이 많았다. 

 

▶1920년 설립된 덕수상고도 2007년 특성화계(실업계)와 일반계 과정이 모두 있는 학교가 되면서 이름을 덕수고로 바꿨다. 이 학교를 둘로 나눠 특성화계는 경기상고로 통합하고 일반계 덕수고는 서울 위례신도시로 이전한다고 한다. 고졸 취업률 하락으로 특성화고 인기가 떨어지고 학생도 계속 줄어드는 탓이 크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부터 진옥동 현 신한은행장까지 한국 경제를 이끌어 온 '덕출이(덕수상고 출신)'들의 모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셈이다.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19-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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