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안 짓고 2.3기 늘리는 실용]
['송전선은 기피 시설 아닌 지역 경제 탯줄' 인식 전환을]
원전 안 짓고 2.3기 늘리는 실용

신월성 원전 1,2호기 전경. /뉴스1
“오마르 야기 미국 UC버클리 교수가 ‘위대한 일은 믿기 힘든 법’이라고 했죠? 원전 업계에도 그런 일이 있습니다.”
기자가 쓴 노벨상 석학 인터뷰를 언급하며 취재원이 한 얘기다. 야기 교수는 공기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기술로 지난해 노벨 화학상을 받았는데, 원전 업계에도 그에 못지않은 경이로운 일이 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원전을 짓지 않고도 원전 20기를 새로 건설한 것과 맞먹는 전력을 생산할 방법이었다.
미국 원자력에너지협회(NEI)가 2020년 펴낸 보고서에 등장한 내용이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이 규제를 개선하면서 원전 이용률을 70%대에서 90%대로 끌어올렸다는 게 골자. 이를 가능케 한 핵심은 ‘리스크 정보 기반 성능 중심 규제(RIPBR)’다. 모든 설비를 똑같이 규제하는 대신 사고 확률과 영향을 따져 안전에 중요한 기기에 규제 역량을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 제도를 적용하면 원전을 안전하게 관리하면서도 유지·보수에 유연성이 생긴다.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원전을 멈추지 않고 고장 난 부분을 정비하는 ‘가동 중 정비’를 확대했고, 이용률을 크게 끌어올렸다. 늘어난 전력 생산량이 신규 원전 20기를 추가 가동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취재원은 “더 놀라운 건 원전에서 가장 중요한 안전성이 10배 좋아졌다는 점”이라며 “공기에서 물을 뽑아내는 것만큼 획기적”이라고 했다.
다른 원자력 전문가에게도 확인해봤다. 틀린 말이 아닐뿐더러 업계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얘기라고 했다. 그는 “한국 원전 이용률이 80% 정도인데 미국처럼 9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며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3기의 이용률을 10%포인트씩 높이면 원전 2.3기를 새로 짓는 효과와 맞먹는다”고 했다.
타이밍도 절묘하다. 정부 전망에 따르면 2040년 전력 소비량은 직전 계획보다 최대 7만GWh 가까이 늘어난다. 원전 3기를 더 건설해야 감당할 수 있다. AI 산업이 확대돼 본격적으로 전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면 이마저도 부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규제 혁신은 법제화부터 현장 적용까지 빠르면 1년 안에 가능하다고 한다. 원전 한 기 짓는 데 13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속도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이 혁신을 적용하지 못하고 있을까. 답은 단순하다. 아무도 책임지고 추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조차 “적극 행정으로 피해를 봤다”고 말하는 나라에서 어떤 공무원이 책임 부담을 무릅쓰고 규제를 혁신하겠다고 나설까. 전문성과 사명감을 겸비한 인재가 없다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규제 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연초 업무 보고에서 이를 추진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하지만 진행은 지지부진하다. 실용을 내세운 정부라면 검토에 그칠 게 아니라 적극 행정으로 신속히 실행할 일이다. 있는 원전부터 제대로 활용하는 것, 국가 에너지 안보와 경제에 이만큼 좋은 실용이 있을까.
-최원우 기자, 조선일보(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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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전선은 기피 시설 아닌 지역 경제 탯줄' 인식 전환을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가운데)이 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송전탑건설백지화 지역별 대책위원장들과 간담회를 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전력망 건설에 반대하는 지역 주민 대표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전력망 확충은 AI 시대 시급한 국가적 과제인데, 특별법까지 제정하고 정부가 나섰는데도 여전히 확충이 제대로 안돼 마련한 자리다.
현재 주요 송변전 건설 사업 54개 중 3분의 1인 18개 사업이 지연 상태에 있다. 신한울 원전과 이어지는 동해안~신가평 송전선로, 당진화력발전소에서 만든 전기를 실어 나를 당진화력~신송산 송전선로는 각각 7년씩 지연되고 있다. 송전선로만 아니라 동해안 지역의 발전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기 위한 동서울변전소 내 HVDC 변환 설비 증설 등 사업도 수년째 진전이 없다. 공식 통계 외에 주민들과 갈등이 불거진 곳까지 더하면 사업이 지연된 곳이 전국적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지난해 정부가 보상·지원안을 마련해 주민 갈등을 중재하고 각 부처의 인허가 절차를 통합해 송배전망을 최대한 빨리 구축할 수 있게 하는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무총리 소속의 전력망위원회도 신설해 갈등을 조정하도록 했고 각종 인허가 절차 특례 조항도 담았다. 이 법 시행이 전력망 확충의 물꼬를 틀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건설 관련 인허가 승인 권한 자체는 여전히 지자체가 갖고 있는 데다 주민 수용을 끌어낼 만한 방안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AI 시대에 전기는 국력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가 없으면 산업의 발전은 커녕 일상 생활도 무너지는 세상이다. 송전망을 시급히 확충하지 않으면 어떤 전력 발전 투자도 무용지물이다. 이대로 가면 622조원을 투자해 경기도 용인 일대에 세계 최대 규모로 조성할 반도체 클러스터가 전기가 없어 노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전력망 특별법 자체에 한계가 있는 것이 명확해졌다면 중앙정부가 강력한 집행권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주민 지원·보상 체계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도 필요하다. 전력망이 ‘기피 시설’이 아닌 ‘지역 경제의 탯줄’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주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혜택을 주어야 한다. AI 시대에 전력망은 국가 안보까지 걸린 문제다. 전기를 만들어 놓고도 송전선 설치를 못해 경제와 안보가 흔들리는 일은 막아야 한다.
-조선일보(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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