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위한 과학'을 만든 두 사람]
[先進國으로 가는 막차 시간]
'모두를 위한 과학'을 만든 두 사람
170년 전 앨버트 공이 만국박람회로 뿌린 '과학 민주화'의 씨앗
동물학자 애튼버러가 BBC 자연 다큐멘터리로 세계에 퍼뜨려
1819년 독일 연방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의 왕자로 태어난 프란츠 알베르트는 1838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귀족 자녀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고대 그리스·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의 문물을 익히는 당시의 유행, 이른바 ‘그랜드 투어’였다. 이 여행에서 알베르트는 중요한 의문을 갖게 된다. 아름다운 예술과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2년간의 여행이 끝난 뒤 영국으로 건너가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면서 ‘앨버트 공’이 된 그는 직접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수고는 가장 많이 지면서 혜택은 가장 적게 누리는 사람들에게 예술과 과학이 이뤄낸 성과를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이런 철학은 1851년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로 실현됐다.
‘세계를 바꾼 141일’로 불리는 이 박람회에는 당시 영국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600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았다. CES와 MWC 같은 현대 박람회의 출발점이었다.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패키지 여행을 만들어 판매한 ‘토마스 쿡’은 일약 세계 최대 여행사가 됐다. 앨버트 공은 박람회로 벌어들인 돈으로 자연사 박물관과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을 건립해 모두에게 개방했다. ‘과학과 예술의 민주화’를 앞장서 실천한 것이다. 1861년 앨버트 공이 세상을 뜨자 빅토리아 여왕은 만국박람회가 열린 하이드 파크 인근에 대중을 위한 초대형 공연장 ‘로열 앨버트 홀’을 세웠다.
지난 금요일 이 로열 앨버트 홀에서 특별한 생일잔치가 열렸다. 이날 100세를 맞은 주인공은 방송인이자 동물학자, 자연주의자인 데이비드 애튼버러. 그의 옆자리에는 윌리엄 왕세자가 앉았고 찰스 3세가 생일 축하 편지를 쓰는 장면이 단편 영화로 상영됐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케이트 블란쳇, 주디 덴치 같은 유명 배우는 물론 UN 사무총장 안토니우 구테흐스까지 영상으로 메시지를 보냈고 객석을 가득 채운 5000여명이 일제히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지질학과 동물학을 전공한 뒤 1952년 BBC에 입사한 애튼버러는 자연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생명의 신비’ ‘살아 있는 지구’ ‘푸른 행성’ 등 전설적인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그의 기획과 내레이션으로 탄생했다. 애튼버러는 “자연은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보물이며,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이라고 했다. 그 덕분에 열대우림의 독개구리가 새끼를 등에 업고 나무를 오르는 장면, 혹등고래 어미가 노래로 새끼를 부르는 순간, 남극 황제펭귄이 영하 60도의 눈보라 속에서 알을 품는 기적 같은 장면을 세계인이 볼 수 있었다. 시청자들은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함께했다. ‘관찰하되 개입하지 않는다’는 애튼버러의 원칙은 오늘날 모든 자연 다큐멘터리의 절대적인 지침이다. 사람의 눈에 잔인하고 비극적으로 보이더라도, 그것 역시 자연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영국 왕립학회가 2018년 생물학 분야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연과학을 선택한 가장 큰 동기로 애튼버러의 다큐멘터리를 꼽은 응답이 압도적 1위였다. 2017년 방영된 ‘블루 플래닛 2’에서 플라스틱 오염 문제를 다루자, 영국인의 88%가 플라스틱 사용 습관을 바꾸겠다고 했고 영국 정부는 일회용 플라스틱 금지 정책을 도입했다. 학계에서는 이를 ‘애튼버러 효과’라고 이름 붙였다. 2020년 애튼버러가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하자 4시간 44분 만에 팔로어가 100만을 돌파했고, ‘영국의 국보(國寶)’를 묻는 유고브의 최근 여론조사에선 36%로 압도적 1위에 올랐다. 껍데기가 너무 작아 들어갈 수 없는 달팽이, 거대 식충 식물, 기생 곰팡이, 배가 파란 도마뱀, 60년 만에 발견된 가시두더지 등 애튼버러의 이름이 붙은 생물은 50가지에 이른다. 영국의 첨단 극지 탐사선 이름도 ‘데이비드 애튼버러호’다. 이보다 성공한 인생을 산 사람이 또 있을까. 애튼버러는 170년 전 앨버트 공이 꿈꾸던 세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구의 목소리를 들려준 그의 삶을 보며 문득 궁금해진다. 모두의 존경과 신뢰를 한몸에 받는 인물을 우리는 언제쯤 갖게 될 수 있을까.
-박건형 콘텐츠앤AI전략팀장, 조선일보(2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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先進國으로 가는 막차 시간
파격적 복지 시대.. 몰락은 그때 시작됐다
'後發 利點' 살려 경제 일으킨 한국
대통령, '유럽 病者 독일' 살린 슈뢰더와 대화 나누기를
한국은 늦게 출발해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다. 경제 개발 동기생(同期生)은 수십 나라에 이르지만 삼성·현대차·LG 같은 세계적 독자 브랜드를 갖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성공한 나라들은 닮은 구석이 있다. 그중 하나가 '후발(後發)의 이점(利點)'을 잘 이용했다는 것이다. 출발이 늦었다 해서 손해만 보지는 않는다. 지각해 덕을 보는 경우도 있다.
후발 주자(走者)는 앞서 달리는 상대의 장점을 쉽게 모방·흡수할 수 있다. 선발(先發) 주자가 어디서 어떻게 넘어졌나를 관찰하면 불필요한 시행착오도 피해갈 수 있다. 후발 주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경쟁 우위(優位)를 확보하고 선발 주자를 추격·추월(追越)해 역사 흐름을 바꾼다. 독일과 일본은 '후발의 이점'을 살려 선진국으로 도약한 영리한 나라다.
1851년 제1회 만국박람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선두 주자답게 각 분야 금메달을 쓸어 담다시피 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트공(公)은 제철(製鐵) 분야 금메달이 산업혁명의 지각생 독일에 돌아간 게 영 마음에 걸렸다. 기업가와 과학자들에게 자신의 불길한 느낌을 전했으나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4년 후 파리 만박(萬博)에선 후발 국가 독일이 영국을 추월했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메이지(明治) 유신을 전후해 등장한 일본 섬유 산업도 비슷한 코스를 밟았다.
독일과 일본을 선두로 이끈 혁신 기술의 고향은 영국이다. 혁신 기술은 주류와 기득권이 장악하고 있는 중심부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출현한다. 기업가들은 새로운 설비 투자가 필요한 혁신 기술 대신 과거 방식에 안주(安住)하기 쉽다. 1850년대 무렵 영국에 출현한 제철과 방직 분야 혁신 기술이 그런 불우한 처지였다. 독일과 일본은 고향에서 푸대접받던 혁신 기술을 과감하게 도입해 '후발의 이점'을 극대화했다. 독일과 일본이 올라탄 차가 선진국으로 들어가는 막차였다.
기술 세계에선 효율과 비효율, 효과와 역효과의 차이가 빨리 드러난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판단이 서면 쉽게 차를 돌릴 수 있다. 문제는 제도(制度)다. 많은 후발 국가가 나라의 틀과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제도라는 장애물에 걸려 주저앉았다. 제도는 실시하기 전엔 결함을 가려내기 힘들다. 부작용도 천천히 나타난다. 통증(痛症)이 예리하지 않으니 자각 증상도 없다. 어딘가 불편하다고 느꼈을 때는 병이 몸 전체에 퍼진 상태다.
제도가 무서운 것은 중독(中毒) 증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베네수엘라는 잘못된 제도의 해악(害惡)을 보여주는 시범 케이스다. 한때는 '천국(天國)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로 불렸던 나라라서 국민 고통이 더하다. 베네수엘라는 석유 매장량이 가장 많은 나라, 그리스는 조상(祖上) 덕에 관광 수입이 굴러들어오는 나라다.
2016년 베네수엘라 물가는 700% 폭등했다. 빈곤 인구 비율은 82%로 치솟았다. 끼니를 거르는 가정이 많아 국민 75%의 체중이 평균 8.6kg이나 줄었다는 믿기지 않는 연구도 나온다. 국민 생계(生計)는 나라가 책임진다던 호언장담의 말로(末路)다. 공영방송 KBS가 2006년 2월 18일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이 미국 일방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대안(代案)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1시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냈던 나라 현실이 이렇다.
2010년 국가 부도(不渡)의 절벽에서 구제금융을 신청했던 그리스도 비슷하다. 출근하는 젊은이 모습을 구경하기 힘들다. 근로자 4명 중 1명이 공무원이고 회사 상당수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조선(造船) 강국 소리를 듣던 이 나라 제조업 비율이 5.7%다. 긴축 재정과 연금 삭감에 반대하는 노조 시위대가 개근(皆勤)하듯 시가지를 쓸어간다.
불행의 씨는 19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세 차례 13년 동안 총리를 지낸 파판드레우 시대에 뿌려졌다.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출신인 그는 공무원 대폭 증원·의료보험 적용 확대·연금 인상·저소득층 자녀 해외 유학 지원 등 파격적 복지 시대를 열었다. 몰락은 그때 시작됐다. 그리스 국민 48%는 지금도 파판드레우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총리'로 꼽고 있다. 베네수엘라 친(親)정부 시위대는 여전히 차베스 사진을 앞세우고 행진한다. 중독은 이만큼 무섭다.
문재인 정부 내년 예산은 '복지 시대' '노동 시대'의 개막(開幕) 선언문 같다. 이 선언문에 '후발 국가의 이점'을 이어갈 지혜(智慧)가 담겨 있을까. 문재인 시대는 한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 시간과 겹친다. 막차를 놓치면 그만이다. 500만 실업자와 '유럽의 병자(病者)'라는 불명예를 떠안고 나라 운명을 개척해야 했던 슈뢰더 전 독일 총리의 자서전이 출간됐다. '독일 경제 재생(再生) 계획 10개 항'에 담을 노동 유연성 확보와 의료보험·연금 개혁을 놓고 번민(煩悶)의 밤을 보냈던 슈뢰더와 책을 통해서나마 대화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강천석 논설위원, 조선일보(17-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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