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에 막힌 석유 문명, '소기시대(塑器時代·플라스틱 시대)'의 지혜로 푼다면
석기시대식 경직성, 파국 불러
플라스틱처럼 유연한 변화 필요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서력(西曆)으로는 2026년이지만, 지구 생물의 역사를 기준으로는 신생대 ‘홀로세(Holocene)’를, 인류 문명의 잣대로는 여전히 ‘철기시대’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과 이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뜬금없이 ‘석기시대’라는 말이 소환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진짜 현실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플라스틱으로 빚어진 시대, ‘소기시대(塑器時代)’를 살고 있다.
지질학계에서는 이미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는 새로운 시대 선포가 논의되고 있다. 홀로세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라는 뜻으로서 1만17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인류가 정착 생활을 하고 농경을 시작한 시점부터 현재까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기의 인류는 지구의 환경을 급격하게 바꾼다. 먼 훗날 지구의 주인이 콘크리트, 플라스틱, 닭 뼈, 그리고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능으로 뒤덮인 토양을 발굴해 낼 것을 생각해 보면 인류세란 용어가 수긍이 되기도 한다.
철기시대란 구분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새로운 시대의 작명이 필요하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거대한 철 구조물보다 손톱만 한 반도체의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감안한 ‘실리콘시대’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플라스틱시대’란 말도 제안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뒤덮은 수없이 많은 플라스틱 제품이 그 증거다. 그리고 그것이 미세한 가루가 되어 우리의 호흡기를 드나들고 혈관까지 타고 흐르는 것을 생각해 보면 플라스틱시대가 더 와닿는다.
그런데 플라스틱시대라는 말은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한자와 한자어가 홀대를 받는 현실이지만 ‘석기, 청동기, 철기’에 운을 맞추려면 한자어로 된 시대 명칭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한자가 활발히 만들어지던 시기에 플라스틱이 없었으니 딱히 가져다 쓸 한자가 없다. 그래도 플라스틱을 뜻하는 중국어 ‘塑料(suliao)’나 ‘塑胶(sujiao)’가 참고할 만하다. 한자 ‘塑’는 흙으로 빚은 인형을 가리키는데 ‘플라스틱(plastic)’ 또한 재료를 빚어 형상을 만든다는 뜻이니 서로 잘 들어맞는다.
그렇다. 우리는 소기시대(塑器時代)를 살고 있다. 철과 함께 오늘날의 인류 문명을 떠받치는 원유를 증류해 나프타를 얻고 이것을 쪼개고 이어 붙여 플라스틱의 최종 원재료인 펠릿을 만든다. 펠릿에 열을 가하면 찰흙과 같아져 뭉치고, 떼고, 붙이는 것이 가능하니 그것이 바로 ‘塑(흙 빚을 소)’와 통한다. 게다가 붕어빵처럼 틀에 넣어 형상을 만들고, 가래떡처럼 구멍으로 파이프를 뽑아내고, 공기를 불어넣어 페트병을 만들 수 있으니 그야말로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원하는 물건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 소기시대가 석기시대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란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란의 민간 기반 시설을 폭격해 이 문명을 석기시대로 되돌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호전적인 수사는 단순한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으로 원유 수송로가 막히는 순간, 소기시대를 지탱하는 나프타의 혈류도 멈춘다. 당장 쓰레기봉투 한 장 생산하기 어려워지는 일상의 마비, 이것이 석기시대적 사고가 소기시대를 타격하는 방식이다. 철의 전쟁에서 석기가 언급되면서 소기시대를 빚는 작업이 어려워진 것이다.
재료공학 용어인 탄성(彈性), 소성(塑性), 취성(脆性)은 소기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일깨워준다. 힘을 가해도 본래대로 돌아오려는 것이 탄성이라면, 한계를 넘어 형태가 완전히 바뀌는 성질이 소성이다. 플라스틱은 이 소성을 극대화해 인류에게 편리를 선사했다. 반면 돌덩이는 소성 변형이 불가능해 버티다 못해 한순간에 깨져버리는 취성만을 갖는다. 석기시대를 운운하는 야만적 경직성은 결국 모두를 부러뜨리는 취성의 파국을 부를 뿐이다. 부러질 것인가, 유연하게 변화하며 공존의 형상을 빚어낼 것인가. 선택은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지금 인류세 소기시대를 살고 있다.
-한성우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조선일보(2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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