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 늦게 주면 '아동학대'? 선 넘은 민원 공화국]
[‘민원 공화국’의 자구책… ‘내 몸의 블랙박스’]
우유 늦게 주면 '아동학대'? 선 넘은 민원 공화국
나라 곳곳이 악성 민원으로 신음
학교는 '내 새끼 지상주의'로 엉망
"지각하지 말라" 하니 "정서학대"
'맛 좀 봐라'식 민원과 전쟁 벌여야

이수지, 유치원, MBTI
개그우먼 이수지가 민원에 시달리는 유치원 교사를 패러디한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아이 MBTI가 내향형이니 비슷한 아이들과 반을 묶어 달라” “유칼립투스 성분 들어간 물티슈만 써 달라” 같은 도를 넘은 요구가 담겼다. 유치원 교사들이 “내 얘기인 줄 알았다”며 울면서 본 영상이라고 한다. 그나마 나온 사례들은 ‘순한 맛’이라고 하니 실제 현장은 어떤지 짐작할 만하다.
대한민국은 민원 공화국이다. 지난해 ‘국민신문고’ 등 정부 부처에 접수된 민원 숫자만 1300만건이다. 국민 네 명 중 한 명이 공식적으로 민원을 제기한 셈이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건강보험공단에 접수된 지난해 민원은 5456만건이다. 건강보험료 문의하거나 줄이려고 국민 한 명당 한 건 이상의 민원을 넣은 것이다. 그나마 다소 줄어든 수치라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민원은 공공기관과 소통하는 시민의 권리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행정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중요한 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식을 벗어난 민원이 늘면서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촉발한 소풍·수학여행 논란도 학교 민원 때문에 생긴 문제 중 하나다. 이 대통령은 얼마 전 “요즘 소풍도 수학여행도 잘 안 간다고 하는데 안전 사고, 관리 책임 걱정 때문일 것”이라며 “하지만 구더기 생길까 장독을 없애버리면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교사들 탓으로 돌리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체험학습 인솔 교사가 과실치사 혐의로 6개월 실형을 선고받아 교직을 잃을 뻔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체험학습이나 수학여행을 가면 학부모 민원이 그야말로 쏟아진다고 한다. 단순 항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교를 상대로 법적 대응으로 연결되는 경우도 많다. 박소영 교사노조 정책처장은 한 프로에서 “현장체험학습은 업무, 민원, 고소의 총집합”이라며 “구더기 무서워 장독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현장은 이미 장독 안에 구더기가 너무 많은 것”이라고 했다.
소풍·수학여행만이 아니다.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선 운동회 계주 선수로 뽑히지 못한 학생의 학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항의했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으면 교사들이 운동회를 하고 싶겠는가. 일부 학부모가 ‘내 새끼 지상주의’에 빠져 민원을 압박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는 정당한 교육까지도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부당한 아동학대 신고에서 살아남기’는 억울한 신고로 직위 해제 위기까지 겪은 25년 차 현직 교사의 기록이다. 이 책 첫 문장은 “우유를 늦게 줘서 아동학대로 신고됐다고?”다. 정식 수사로 이어진 실제 사건이라고 한다. 이 책엔 친구를 때리고 욕하는 학생을 교실에 남겨 지도했다고 감금, 잠자는 아이를 흔들어 깨웠다고 폭행, “지각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정서학대 혐의로 신고당한 사례가 담겨 있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신고를 당해 경찰서 다니는 교사가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
학교에 악성 민원을 넣고 고소·고발을 일삼는 사람은 소수겠지만, 그들 때문에 다수가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분명하다. 한국교총은 모호한 정서학대 기준을 명확히 하는 아동복지법 개정, 교육활동 관련 소송 국가책임제 도입, 악성 민원에 대한 교육감 맞고소 의무제 도입 등을 요구하고 있다. 개혁신당 천하람 의원은 “민원을 남발하는 사람에겐 비용 물리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정부가 ‘맛 좀 봐라’식 악성 민원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피해가 가장 두드러지는 학교에서부터 강력 대응했으면 한다.
-김민철 논설위원, 조선일보(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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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공화국’의 자구책… ‘내 몸의 블랙박스’

공무원이나 경찰을 향한 요즘 민원인들의 폭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 “어디서 ××이야” 같은 욕설이 무뎌질 정도로 난무한다는 것이다. 무례한 생떼는 때로 멱살잡이와 손찌검, 주먹질, 기물 파손 같은 폭력 행위로 이어진다. 포항에서는 민원인이 공무원 얼굴에 제초제로 추정되는 화학약품을 뿌렸고, 경주 시청에서는 손도끼를 치켜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민원인들의 위법 행위는 2021년 5만 건을 넘어섰다.
▷도를 넘은 악성 민원에 시달려온 이들 사이에선 보디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지난달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 이후엔 교사들도 “보디캠이라도 달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지경이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시중에서는 20만, 30만 원대에서 80만 원짜리 고급형까지 다양한 보디캠이 쏟아지고 있다. 네모난 소형 녹음기 모양이 일반적이지만 라이터형, 손목시계형, 보조배터리형, 안경형, 넥타이형, 목밴드형 등도 나와 있다. 업체들은 선명한 화질, 초소형 사이즈 등을 앞세우며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고 홍보한다.
▷‘내 몸의 블랙박스’로 불리는 보디캠의 착용은 책임을 다투거나 법정싸움을 벌일 때 자기를 방어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민원 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오는 한국에서 공복(公僕)에 대한 요구는 많고, 악성 민원인에 대한 처벌은 상대적으로 경미하다. 정당방위 인정 범위는 좁다. 그러니 반복, 악화하는 행패를 영상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언제라도 적반하장의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게 공무원들의 문제 제기다. 보디캠 촬영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는데, 이는 난폭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한다.
▷대리운전 기사, 숙박업 종사자 등도 보디캠을 달기 시작했다. 취객의 폭행과 성추행 등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해외에서는 스포츠 심판들의 보디캠도 등장했다. 선수나 코치는 물론 아마추어 유소년 경기의 경우 부모들의 폭언, 폭행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갑질’ 피해를 볼 수 있는 누구라도 보디캠의 기록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보디캠은 찍히는 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영상 유출 피해와 악용 가능성 등의 문제점도 안고 있다. 경찰청이 아직까지 장비 사용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다. 교사들의 보디캠 착용을 놓고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감옥으로 만들려는 거냐”는 반발이 나온다. 논란 속에서도 보디캠 구매가 늘어나는 것은 한국 사회가 고단한 ‘불신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경고일 것이다. 각자도생의 해법에 앞서 악성 민원인 처벌 강화를 비롯해 ‘을’들을 보호할 근본 예방책 마련이 절실하다.
-이정은 논설위원, 동아일보(2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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