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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석유수출국기구), 美·英 석유회사 맞서려 산유국 연합 등장]

뚝섬 2026. 5. 14. 05:40

OPEC(석유수출국기구), 美·英 석유회사 맞서려 1960년 산유국 연합 등장

 

원유 매장량 세계 6위이자,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셋째로 원유 생산량이 많은 아랍에미리트(UAE)가 지난 1일 OPEC을 탈퇴했어요. UAE는 “OPEC을 탈퇴함으로써 (생산량) 의무에서 벗어나 유연성을 갖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OPEC은 회원국들이 정해진 양만큼만 원유를 생산하도록 제한하고 있는데요. UAE는 막대한 투자로 원유 생산 능력을 늘렸지만, 이 규정 때문에 충분히 원유를 생산하지 못했대요. 이 때문에 OPEC 내에서 UAE는 원유 생산 제한을 중시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갈등을 겪어왔습니다.

 

자동차 연료, 플라스틱, 비닐봉지, 옷감 등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물건은 석유를 원료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석유를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죠. 이 같은 석유 시장의 중심에 주요 산유국들의 협의체인 OPEC이 서 있답니다. 여기서 세계 시장에 공급되는 원유 생산량을 조절해 국제 유가가 너무 크게 오르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하죠. 오늘은 OPEC에 대해 알려드릴게요. 

 

OPEC 로고/EPA 연합뉴스

 

7대 석유 회사 ‘세븐 시스터스’

 

석유는 기원전 2000년쯤 인류 역사에 등장했어요. 고대 사람들은 석유를 윤활유나 설사약 등으로 썼지만, 연료로 사용하지는 않았어요. 17세기까지는 고래 기름이나 땔감이 떨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대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인기 없던 석유는 19세기 후반 가솔린 엔진이 등장하면서 빛을 봤어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동 지역에서 대규모 유전이 개발되면서 인류는 석유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답니다.

 

영국은 1차 대전 이후부터 중동 곳곳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석유 채굴권을 독점하다시피 했어요.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상황이 급변했습니다.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진 영국을 대신해 그 빈자리를 거대한 자본과 국력을 앞세운 미국이 채우기 시작했어요. 특히 미국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고, 중동 석유 시장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이 주도하게 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븐 시스터스’가 성장했어요. 세븐 시스터스란 당시 전 세계 석유의 생산부터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장악한 7개 석유 회사를 의미하는데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 아틀라스의 일곱 자매처럼 똘똘 뭉쳐 시장을 독점하는 모습에 비유한 것입니다. 엑슨모빌, 셰브론 등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형 정유사의 전신을 포함해 5개는 미국계, 2개는 영국계 회사였습니다. 

 

이탈리아 에너지 기업 Eni를 설립한 엔리코 마테이예요.

 

‘세븐 시스터스’에 도전한 사람들

 

그러다 세븐 시스터스를 공포에 떨게 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탈리아 출신 엔리코 마테이였어요. ‘세븐 시스터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도 마테이였습니다. 그는 중동에서 미국·영국 석유 기업이 배타적 사업권을 가진 데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마테이는 세븐 시스터스에 도전하기 위해 1953년 이탈리아에서 에너지 기업 ‘Eni’를 설립했어요. 그는 먼저 중동으로 가서 당시 영미계 석유 기업들이 석유 수익을 중동 국가들과 ’50대50′으로 나누는 원칙을 깨려고 했습니다. 이후 이란에서 ’75(산유국)대 25(석유 개발사)‘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석유 개발권을 따내기도 했죠. 아프리카와 아시아 산유국에 진출하여 Eni의 사업을 확장하려고 했던 마테이는 의문의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마테이뿐만 아니라 1950~1960년대 중동 산유국들은 세븐 시스터스가 주도하는 석유 질서에 불만이 많았어요. 특히 세븐 시스터스와 산유국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던 부분은 석유 판매 가격이었습니다. 당시 세븐 시스터스가 일방적으로 원유 공시 가격을 결정해 산유국의 불만이 컸거든요. 산유국과 석유 기업 간 수익 분배의 기준은 공시 가격이었어요. 즉, 공시 가격이 내려가면 산유국의 수익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죠.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석유 장관이었던 압둘라 타리키는 이 같은 구조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세븐 시스터스 중 한 기업이 1960년 중동산 원유 가격을 평균 10% 인하하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기업들도 동참하면서 중동 국가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졌어요. 이에 타리키는 남미 베네수엘라의 석유 장관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와 손잡고 미국에 대항하기로 했어요. 알폰소 역시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수입하는 석유 물량을 제한해 미국에 반발심이 컸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등도 동참해 1960년 9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OPEC이 결성(당시 5개국)됐어요. 

1960년 9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열린 제1차 OPEC 회의/1974년 1월 미국의 한 주유소에서 시민이 휘발유 배급 관련 기사를 읽고 있어요. 뒤 표지판에는 ‘휘발유가 없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기름값이 급등하고 연료 부족이 발생한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위키피디아

 

석유 파동으로 ‘갑’이 된 OPEC

 

OPEC의 결성으로 공시 가격이 더 떨어지는 것은 막을 수 있었어요. 회원국도 늘어났죠. 하지만 각국의 입장 차이로 생산량 규제와 석유 가격에 대한 합의엔 이르지 못해요.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은 OPEC 내 주도권을 놓고 충돌했고, 석유의 생산 기술·수송·판매 등은 여전히 석유 회사들이 장악해 산유국들이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죠. 1970년대 초반까지 OPEC의 영향력은 미미했습니다. 심지어 리비아·나이지리아·알제리·이집트 등에서도 유전이 발견돼 아프리카의 석유 생산량이 급증했고, 석유 공급 과잉으로 OPEC의 힘은 더 없어졌어요.

 

그러다 OPEC이 세계적 ‘갑’이 되는 사건이 발생해요. 1973년 제1차 석유 파동(오일쇼크)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의 중동 전쟁이 터지자, OPEC 내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돕는 나라에 석유를 팔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석유 가격이 순식간에 4배까지 오른 겁니다. 기름값이 감당 못 할 정도로 뛰자 전 세계 공장이 멈추고 물가가 폭등했어요. 그동안 이해관계가 서로 달랐던 OPEC 회원국들도 이를 계기로 자신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결속하게 됩니다.

 

석유 파동을 겪으며 OPEC은 원유 생산 및 국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도 OPEC이 전 세계 석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어요. OPEC은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들과 손을 잡고 OPEC+라는 더 큰 연합체를 만들어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죠. 여전히 세계 최대의 강력한 석유 카르텔이랍니다.

 

-서민영 경기 군서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정해민 기자, 조선일보(2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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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수출국기구(OPEC)

 

“석유가 나왔다.” 1976년 초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렇게 밝혔다. 포항 영일만에서 질 좋은 원유를 시추했다는 대통령의 고백에 국민이 열광했다. 시원하게 원유 터지는 소리로 시작하는, ‘제7광구’라는 대중가요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비슷한 해프닝이 1949년 이탈리아에서도 있었다. 하원의원 앙리코 마테이가 “알프스 산맥 밑에 엄청난 양의 원유가 묻혀 있다”는 낭설을 퍼뜨렸다.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석유공사(ENI) 회장으로 취임하여 석유 시추를 직접 지휘했다. 물론 결과는 변변치 않았다.

 

그러자 마테이는 목표를 외국으로 돌렸다. 당시 국제 원유 시장은 미국과 영국 회사 7곳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마테이는 그들을 ‘칠공주파’ 즉 ‘세븐 시스터스’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미국의 입맛에 맞추어 국제 유가를 주물럭거린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석유 산업 과점 구조 해체를 부르짖었다.

 

아니나 다를까 세븐 시스터스는 1960년 8월 산유국들과 전혀 상의도 없이 원유가를 8%나 인하했다소련이 낮은 가격을 앞세워 원유 시장 점유율을 높여가는 데 대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물가 상승률을 감안하면 원유의 실질 가격은 1948년 대비 이미 10% 이상 하락한 상태라서 산유국들의 반미 감정이 치솟았다. 1960년 오늘 이라크·이란·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베네수엘라 등 5대 석유 수출국이 이라크의 바그다드로 모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탄생이다.

 

그때 마테이는 소련과 송유관 연결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늘날 러시아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노르드스트림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이래저래 미국 눈 밖에 난 마테이는 1962년 10월 의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1976년 연두 기자회견 직후 조갑제 국제신문 기자는 대통령의 발언에 의문을 품었다가 유신 정권의 눈 밖에 났다. 그 탓으로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곤욕을 치렀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조선일보(22-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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