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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초의 박물관] [고인돌, 가장 한국적 유물의 비밀]

뚝섬 2026. 5. 19. 07:21

[인류 최초의 박물관]

[고인돌, 가장 한국적 유물의 비밀]

 

 

 

인류 최초의 박물관 

우르의 신전 구역 중 엔니갈디-난나의 박물관 부지, 기원전 약 530년, 이라크 남부 디카르주 소재.

 

1925년 영국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의 팀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이라크 남부 우르의 신전 구역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건물터를 발굴했다. 기원전 530년 전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 미스터리의 건물은 벽돌로 만든 여러 개의 방이 중정을 둘러싼 구조였다. 여기서 석조상(石彫像) 파편, 명문이 새겨진 다수의 점토판, 봉헌용 곤봉의 일부와 토지 경계석, 상아로 만든 화장품 상자 등이 나왔다. 유물의 용도가 가지각색인 데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전 2100년쯤부터 기원전 600년쯤까지, 약 1500년의 시간대에 걸쳐 있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1600년 전이라는 까마득한 과거로부터 동시대의 산물까지 한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거주의 흔적이라고 보기엔 시간대가 지나치게 넓은 이 공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수수께끼는 유물과 함께 발굴된 작은 점토판에서 풀렸다. 점토판에는 ‘이것은 1000여 년 전 옛 왕이 만든 벽돌이며, 폐허 속에서 발견됐다. 보는 이들의 경이를 위해 여기에 옮겨 적는다’는 글귀가 있었다. 울리는 이 명문을 토대로 이곳이 유물을 분류해 전시한 박물관이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흔히 ‘인류 최초의 박물관’이라고 불리게 된 이곳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딸이자 사제였던 엔니갈디-난나가 만들었다.

 

멸망 직전의 왕가에서 고대의 유물을 진열한 이유는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워보려는 안간힘이었다. 현대 박물관과 같은 대중 교육과 학술 연구 용도는 아니었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 가운데 하나가 된 국립중앙박물관은 과거의 유산이 한 왕가가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임을 증명한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조선일보(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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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가장 한국적 유물의 비밀

 

수천이 밧줄 맞잡고 돌 옮겨 세웠다… 권력 아닌 화합의 산물 K고인돌 

경남 김해시 구산동 도시개발사업 과정에서 발견된 고인돌. 길이 10m, 너비 4.5m, 무게 350t에 이르는 세계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지석묘다. 동아일보DB·강인욱 교수 제공


한반도의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물은 단연 고인돌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을 비롯해 지금까지 확인된 전 세계 고인돌의 약 40%가 한반도에 집중돼 있다. 그 수가 3만∼4만 기에 이른다. 최근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서는 350t이 넘는 돌을 올린 고인돌이 발굴됐다. 청동기시대 한반도 사람들은 왜 고인돌을 좋아했을까. 또 수 km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돌을 어떻게 옮겨와 세울 수 있었을까. 세계 문명사 속 ‘작은 거인’ 같은 한반도 고인돌의 비밀에 대해 알아보자.

세계 최대 규모 추정 김해 고인돌

2007년 김해시 구산동에서 세계 최대 규모로 추정되는 고인돌이 발견됐다. 길이 10m, 너비 4.5m, 높이 3.5m. 무게가 350t에 달했다. 영국의 스톤헨지나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도 단일 돌은 100t을 넘지 않는다. 이를 감안할 때 구산동 고인돌의 크기는 압도적이다. 주변에서는 길이 85m, 너비 19m의 돌을 깔아 놓은 제단도 함께 발견됐다. 거대한 고인돌을 떼어내 옮기는 과정에서 자칫 지반이 가라앉을 수 있으니 당시 사람들은 주변 땅을 단단하게 다지고 돌을 깔아 통로를 만들었다. 이는 동시에 제단으로도 사용됐다.

 

전남 화순군 고인돌공원에서 원시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고인돌 운반 과정을 재현하는 모습. 강인욱 교수 제공제대로 된 기계조차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350t에 이르는 거대한 돌을 옮길 수 있었을까. 최근 김해 주변 지역을 조사한 결과, 바로 뒤편에 있는 경운산에서 고인돌 채석장이 확인됐다. 산에서 끌고 내려오는 것이니 상대적으로 힘이 많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0년대 이래 고고학자들은 스톤헨지나 중국 자금성 등 대형 기념물의 축조 방식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연구마다 차이는 있지만 평지에서는 대략 1t의 돌을 옮기는 데 12∼16명이 필요하다. 구산동 고인돌의 경우 경운산에서 끌고 내려오는 것이라 경사 5∼10도 구간에서는 평지의 절반 이하 인력으로도 같은 무게를 옮길 수 있다. 낙동강에 뗏목을 띄워 옮기면 필요한 노동력은 더욱 절감된다. 구산동 고인돌을 만들 때 동원된 인력은 2500명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 경남 창원·김해 권역의 여러 마을이 힘을 합쳤다면 충분히 가능한 규모다.

이들은 그저 수천 명이 모이는 것을 넘어 조직적으로 기술을 교환하고 협력했다. 고인돌은 겉으로 보면 거친 돌이 대충 놓인 것 같지만 그 밑을 보면 사정은 다르다. 상석 밑 여러 틈에는 작은 돌조각들이 정교하게 끼워져 있다. 세밀하게 무게 계산을 하며 돌을 세우는 수백 년에 걸친 기술이 있었기에 한반도에 수만 개의 고인돌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고인돌 속 작은 무덤이 말하는 것

구산동 고인돌 주변을 발굴한 결과 작은 무덤이 나왔다. 더 밑에는 청동기시대 벼농사를 짓던 사람들의 집터가 발견됐다. 이 지역은 원래 마을이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마을을 없애고 그 위에 사방에서 잘 보이는 거대한 고인돌을 지은 것이다. 신기한 것은 고인돌 밑에서 발견된 무덤이었다. 뚜껑돌은 거대하지만 정작 그 밑의 무덤은 길이 140cm의 소형이었고, 유물은 항아리 한 점과 굽다리그릇 한 점이 전부였다. 청동기는커녕 이 시대에 많이 사용했던 돌칼(마제석검)도 발견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인돌 안에 가장 검소한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한국의 고인돌은 규모가 클수록 유물이 빈약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고인돌의 역설은 바로 한반도 고인돌의 본질이다. 거대한 고인돌은 특정 권력자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만든 기념물이 아니었다. 수천 명이 힘을 합쳐 돌을 옮기고 세우는 과정 자체가 공동체의 행사였다. 진시황릉이나 피라미드 같은 유적이 한 사람을 위한 거대한 기념물이라면, 고인돌은 공동체의 것이었다. 무덤에 묻힌 이는 재물을 독점한 지배자가 아니라 의례를 이끈 제사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부장품의 검소함은 가난이 아니라 선택이었다.

왜 한국에 고인돌이 많을까

전남 영암군 들판에 퍼져 있는 고인돌. 전 세계 고인돌의 약 40%가 한반도에 있다. 동아일보DB

 

고인돌은 한국만의 문화가 아니다. 프랑스 브르타뉴의 바닷가, 러시아 코카서스 산록, 인도 남부의 데칸고원, 이스라엘과 요르단 일대 등 세계 곳곳에서 고인돌은 등장한다. 연대 또한 약 7000년 전부터 최근까지 다양하다. 학자들은 고인돌을 특정 민족이나 문화의 산물이 아니라 일정한 조건을 갖춘 사회라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본다.

공통점은 바로 정착 농경이다. 사방을 돌아다니는 수렵민들과 달리 농경민은 농사에 유리한 땅을 점유하고 대를 이어 산다. 한정된 땅에서 살아가려면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공동 기념물을 만들어 단결할 필요가 있었다. 벼농사처럼 물을 함께 관리해야 하는 경우 공동체 협동은 필수적이다. 사람들은 함께 모이는 의례 공간을 만들었다. 조상을 기리고 풍년을 빌며 이웃 마을과의 유대를 확인하는 공간이 바로 고인돌이었다. 쌀농사가 주업인 인도네시아 숨바섬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100여 개의 고인돌이 마을 행사처럼 세워진다.

한반도의 지리 환경도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한반도의 3분의 2는 산지다.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산맥이 뻗어 있고, 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이 흘러 바다로 이어진다. 수십, 수백 t의 돌을 채석할 수 있는 산이 주변에 있고, 물길을 이용해 효율적으로 그 돌을 나를 수 있었다. 세계 곳곳의 고인돌이 하천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길과 경사를 읽는 지혜, 그리고 마을 사이의 신뢰. 그 세 가지 조건이 한반도에서 가장 잘 갖춰져 있었기에 거대한 고인돌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청동거울과 고인돌

구산동에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로, 이미 경남 해안가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고인돌이 사라진 시기였다. 같은 시기 호남 지역에서는 고인돌 대신 고조선 지역에서 남하한 다뉴세문경(잔줄무늬거울)과 화려한 청동거울을 사용한 샤먼들의 무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기후 환경 변화로 벼농사가 점차 어려워졌다. 이에 많은 사람은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의 주체가 되기도 했다.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고인돌 대신 고조선 지역의 새로운 청동기와 제사 문화를 받아들였다.

위기 상황에서 김해 지역 사람들은 다른 선택을 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힘을 모아 거대한 고인돌을 세우며 협력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한반도 각지의 선택은 다소 달랐지만 분명한 것은 위기에 슬기롭게 대처했다는 점이다. 고인돌과 청동거울의 시대를 거친 한반도는 빠르게 삼국의 태동기로 나아갔다. 삼국시대에도 돌을 사용해 거대한 무덤을 쌓는 전통이 이어졌고, 고인돌을 만들며 축적된 건축 기술은 면면히 계승될 수 있었다.

한국의 고인돌이 특별한 이유

이집트 피라미드나 중국 진시황릉처럼 거대한 기념물만이 위대한 문명의 증거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한국의 고인돌은 그 등식을 거부한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단일 돌을 얹어 만든 고인돌에서는 정작 그릇 두 점만 묻힌 소박한 무덤이 발견됐다. 거대함과 검소함이 한 공간에 공존하는 독특함이 있는 것이다. 한국 고인돌은 특정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결과물이 아니라 함께 협동해 공통의 결과물을 만들고 행복을 기리는 화합의 산물이었다. 산에서 돌을 깨 수천 명이 밧줄을 나눠 잡고 통나무를 깔아 옮기면서 여러 마을이 협력했고 기술을 교환했다. 그러한 협력이 쌓여 한반도 고대 국가를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생각해 보면 한반도는 고인돌이 번성하기에 결코 쉬운 땅이 아니었다. 3분의 2가 산지이고, 기후는 변덕스러웠으며, 골짜기마다 마을이 나뉘어 있었다. 어렵기 때문에 협동했고, 협동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이 좁은 반도에 몰려 있는 것은 그 오랜 협력의 흔적이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 서로 협력해 살아남기를 선택한 선조들이 땅 위에 남긴 증거다. 세상의 어떤 화려한 피라미드나 고분도 주지 못하는 우리 고인돌의 메시지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동아일보(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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