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극단 시나리오가 폐기됐다]
[시장 망치는 무원칙 에너지 정책]
기후 극단 시나리오가 폐기됐다
[한삼희의 환경칼럼]
10여년간 논의 지배한 '4도 이상 상승'의 재앙적 미래 예측
유엔 기후과학기구가 지난달 공식 폐기.. '차분한 대응'의 분기점 될지

낮 기온이 30도 안팎으로 올라 더운 날씨를 보인 14일 서울 중구 청계천에서 시민들이 더위를 피하고 있다. /뉴시스
유엔 산하 기후과학기구(IPCC)는 5~9년 간격으로 여섯 차례 ‘기후 평가 보고서’를 발간해 왔다. 일곱 번째 보고서가 2028~2029년 나올 예정이다. 보고서는 국제 협상과 각국 정책의 논리적 근거가 된다. 보고서 작업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우선 210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이 어떻게 흘러갈지 배출 시나리오를 작성(에너지 모델링)하고, 그걸 받아 시나리오별로 지구 기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기후 모델링)하게 된다. 그 앞 단계의 배출 시나리오 작업이 마무리돼 지난달 지구과학 저널에 발표됐다. 44명 전문가의 3년 걸린 국제 협동 연구 결과다.
이번 ‘시나리오 모델 비교 연구’는 획기적이다. 종전 5차·6차 보고서에서 채택했던 극단적 기온 상승 시나리오를 폐기했다. 5차(2014년) 보고서는 파리협정(2015년)의 기반 논리가 됐었다. 거기서 4개 경로 시나리오가 제시됐는데 그 가운데 ‘RCP8.5’라는 초(超)고배출 경로가 포함돼 있었다. ‘RCP8.5’를 쉽게 설명하면, 산업혁명 전 대비 2100년의 기온 상승력이 ‘지구 전 표면적에 걸쳐 매 평방미터(㎡)마다 1와트(W) 미니 전구 8.5개를 켜놓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당시 보고서엔 미니 전구 2.6개, 4.5개, 6.0개 시나리오도 있었다. 그러나 RCP8.5가 ‘기준(baseline) 시나리오’로 제시됐고, 자연스럽게 ‘별도 추가 정책 없이 기존 경제 활동과 에너지 소비를 유지할 경우(BAU)’의 2100년도 기후 미래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경우 이산화탄소 농도는 1000ppm 이상(현재는 430ppm)으로 치솟고 기온은 산업혁명 전 대비 4도 이상(3.7~4.7도)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후 기후 논의는 RCP8.5의 최악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2018년께부터는 스웨덴 소녀 툰베리 류의 지구 종말 메시지가 범람했고 ‘멸종 저항’ 등 급진 단체들 시위가 이어졌다. 유럽 그린딜, 미국의 그린뉴딜, 각국의 탄소 중립 선언도 그런 배경을 반영한 것이다. 단적인 예로 2019년 ‘거주 불능 지구’라는 책을 낸 베스트셀러 저널리스트(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는 “유엔 보고에 따르면 우리가 현행 기조를 고수하는 경우 2100년에는 기온이 약 4.5도 상승한다”면서 “(지구상에) 살 만한 지역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2017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박사과정생(현재는 교수)이 문제의 RCP8.5 시나리오가 터무니없는 가정에 기초했다는 걸 폭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세계 석탄 소비가 2100년까지 무려 5~7배 증가하는 걸 전제하고 기후 미래를 전망했다는 것이다. 자동차, 건물 냉·난방, 산업 에너지까지 석탄을 액화·가스화한 연료로 대체한다는 가정 아래의 극단 시나리오였다. 실제 석탄 소비는 2015년 이후 10년 동안 5% 늘어났을 뿐이다. 세계의 전문가 집단, 미디어, 환경 운동가들은 그런 사정에 대한 분석적 검토 없이 ‘㎡당 미니 전구 8.5개씩 깔아 놓은 지구’를 상당히 그럴듯한 미래로 받아들이고 급진적 대책을 주장해 왔던 것이다.

RCP8.5 시나리오(빨간색 실선)는 2100년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1000ppm을 넘는 걸로 예측하고 있다. /한삼희 환경칼럼니스트

회색 음영으로 표시된 부분은 RCP8.5로 갈 경우 2100년의 기온 상승치(3.7~4.7도)인데 보고서는 이걸 ‘기본선(baseline)’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삼희 환경칼럼니스트
유엔 기후과학기구의 평가 기조는 6차 보고서(2023년)까지 유지됐다. RCP8.5를 이어받은 최악 시나리오(SSP5-8.5)에서 2100년 기온 상승치를 4.4도로 전망했다. 그런데 이번 7차 보고서의 배출 시나리오 연구팀은 5차·6차 보고서의 극단 고배출 시나리오에 대해 “있을 법하지 않다(implausible)”고 평가하고 폐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유로는 ‘재생에너지 가격 하락과 기후 정책의 강화 흐름’을 꼽았다. 연구팀은 대신 3개 그룹(High, Medium, Low)의 7개 시나리오를 제시했는데, 그중 고배출(High) 상황의 기온 상승치를 3.5도로 예측했다. 기후 정책 후퇴와 국제 협력 붕괴를 가정한 시나리오다. 연구팀은 그 같은 고배출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평가했다. 2025년 시점의 정책이 더 강화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는 중배출(Medium)에선 기온이 3.0도 상승할 것으로 봤다.
현재 지구 기온은 산업혁명 이전 대비 1.5도 정도(미니 전구로는 2019년 기준 2.72개) 올라 있다. 최근 기후 전문가들의 2100년 기온 상승 예측치는 2.5~2.7도로 수렴하는 분위기다. RCP8.5의 최악 시나리오와 비교해 2도 가까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굉장히 겁나는 세계임에는 틀림없다. 아마 2100년의 미래는 지금보다 많이 나빠져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걸 헤쳐 나가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불과 몇 년 전까지 했던 암울한 상상보다는 훨씬 밝은 미래가 아닐까. 뭣보다 지난 10년 사이 미래 예측은 상당히 개선됐다. 그렇다면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봐도 괜찮지 않겠는가.
-한삼희 환경칼럼니스트, 조선일보(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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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망치는 무원칙 에너지 정책

기름값 인상 요인이 발생했지만, 정부는 석유 최고 가격을 세 번 연속 동결했다. 서울의 한 주유소 앞으로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정부가 국민에게 약속한 에너지 가격 결정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이 점점 당연한 풍경이 되고 있다. 최근 산업통상부는 5차 석유 최고 가격을 또다시 동결했다. 세 번 연속 동결인 가운데, 누적 인상 요인은 휘발유 200원, 경유 400원, 등유 600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민생 안정과 물가 관리를 명분으로 시장의 가격 신호를 억눌렀다. “2주마다 국제 가격 변동을 반영해 최고 가격을 조정하겠다”는 설명은 대체 왜 한 걸까.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분을 분기별로 전기요금에 반영하겠다며 2021년 1분기부터 시행 중인 ‘연료비 조정 단가’ 제도 역시 무력화된 상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 올라간 국제 연료비가 낮아져 한국전력은 올해 2분기 전기 요금을 kWh(킬로와트시)당 11.2원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후에너지환경부는 한전에 ‘현상 유지’를 지시했다. 4년 전 연료비 급등기 때 전기료를 억제한 탓에 천문학적 부채가 쌓여 있어 이를 메워야 한다는 이유였다. 한 번 스텝이 꼬이니 올려야 할 때도 못 올리고, 내려야 할 때도 못 내리는 엇박자가 반복된다.
SK가스, E1 등이 수입해 오는 LPG(액화석유가스) 국제 가격은 3월에서 4월 사이 50%가량 치솟았다. 하지만 이 기업들은 5월 LPG 가격을 누적된 미인상 분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수준에서 올렸다. ‘LPG는 택시나 가정에서 쓰는 서민 연료란 사실을 잊지 말라’는 정부 압박 탓이다. LPG 업계 관계자는 “기업도 고통 분담에 동참하고 있으나, 수익성 악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고 푸념한다. 한국가스공사 미수금은 4년 전 2000억원 미만에서 어느덧 13조3000억원으로 67배 폭증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가격 왜곡이 국민의 소비 행태까지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은 ‘소비를 줄이라’는 시장의 강력한 경고다. 그러나 정부는 인위적 개입으로 이 경고음을 소거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는 여름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에어컨을 틀거나 겨울철 실내에서 반소매를 입고 난방을 돌리는 에너지 과소비 문화가 뿌리내렸다. 가격 신호가 사라지니 자원 빈국인데도 모두가 에너지를 펑펑 쓴다. 서민 보호를 명분으로 에너지 가격 상승을 일괄 억제하고 있지만, 그 혜택의 상당 부분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보다 대형 세단을 타는 고소득층에게 돌아가는 ‘역진적 분배’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민생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원칙을 아예 무시한 채 정권의 정무적 판단만으로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가 굳어져선 안 된다. 정부는 에너지 가격의 시장 연동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에너지 안보 역시 시장의 경고를 수용하고 가격 정상화라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 가능해질 것이다.
-전준범 기자, 조선일보(2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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